불교는 한반도에 전래 된 이후 1700여 년 동안 우리 민족사상과 문화의 원류를 이루어 왔다. 삼국·통일신라·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찬란한 문화를 형성해 왔으며, 조선 500년의 오랜 박해(迫害)와 억불(抑佛)속에서도 서릿발 같은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이 살아 숨 쉬는 청정승가(淸淨僧家)의 전통을 이어 왔다. 그러나 한일합방 이후 일제(日帝)의 왜색불교에 의해 정법(正法)은 왜곡 되었다. 일제 식민지 정책은 이 땅에 정신적 지주를 억압하고 계승발전을 저해하고, 모든 종교를 음양으로 박해하고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대처육식(帶妻肉食)이라는 전무한 폐습(弊習)을 도입하여 내부로부터의 부패 타락을 조장하였다. 당시 의식 있는 수행자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법을 세우는 것이 대승보살의 본원(本願)이라고 자각했다. 이에 청담(1902~1971) 스님은 정화(淨化)의 횃불을 들고 청정한 조계가풍(曹溪家風)을 세우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이다. 또 통합종단을 이룩한 후부터 열반할 때까지 산중불교를 벗어나지 못한 한국불교를 시대의 중생과 함께하는 불교로, 마음사상을 통한 불교의 대중·현대·세계화에 선도적인 실천행을 보여준 수행자였다.

수행과 교화, 방일하지 않은 삶

청담 스님은 해방 이전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격동의 시대를 산 인물이다. 청담 스님은 암울했던 현실과 격랑이 일었던 시대를 회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문(禪門)에서 수행을 시작하였으나 한국불교의 역사의 현장에서, 그것도 도심 한복판(종로 선학원)에서 정화불교운동의 선봉에 섰고 정법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이와 함께 중생교화를 위한 원력을 불살랐고 현대불교사에서 선풍진작을 위한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마음사상에 선(禪)을 접목시켜 탄생시킨 마음선(禪)은 청담 스님의 정신과 사상을 담은 스님만의 특징적인 선풍이자 일가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다양한 학문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청담 스님의 일생을 살펴보면 수행과 교화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수레의 두 바퀴처럼 수행과 교화는 한 시도 방일하지 않았던 청담 스님의 일대사였다. 특히 수행(修行)과 교화(敎化)라는 양 측면에서 볼 때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도를 몸소 실천해 보인 것이다. 이는 역대 선지식들이 수행 또는 교화에 있어서 한 쪽에 치우친 삶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청담 스님의 돋보인 행장이 아닐 수 없다.

스님은 1954년부터 시작된 불교정화운동의 주역으로 한국 종교계와 불교계의 여러 직책을 수행하였다. 그러면서 수행을 바탕으로 한 불법홍포와 정통불교 중흥에 앞장섰으며, 평생 ‘마음’에 대한 법문과 강연을 통해 중생제도에 진력하였다. 선학원 이사장과 조계종단 행정직책에 충실하면서 철저한 수행과 대중교화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청담 스님은 한영(漢永) 스님이 대강백으로 있던 대원불교전문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졸업했다. 또한 전국 선원(禪院)과 수행처를 찾아 참선수행을 하였으며 덕숭산 만공(滿空) 선사 문하에서 깨달음을 얻고 인가(印可)를 받았다.

이와 같이 청담 스님은 선교(禪敎)를 두루 섭렵한 선지식이었다. 법문이나 강연은 선교(禪敎)에 기초를 둔 ‘마음사상(思想)’을 통해서 전개되었다. 스님에 있어 ‘마음’은 불교관과 수행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떠난 불교나 사상이란 있을 수 없다. 스님에게 있어 ‘마음’은 궁극적 실재이며 상징어였던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자기 ‘마음’을 깨치는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마음을 깨쳤을 때가 곧 부처이다. 우리 중생이 할 일은 이 마음을 깨달아서 바른 삶을 영위하자는 것이다. 청담 스님은 이와 같은 법문을 통해 주체적인 자아의 중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선학원에서 불교정화의 기초 세워

청담 스님은 정혜사(定慧寺) 만공(滿空) 선사 회상에서 5년여 간 참선수행을 하면서 유점사(楡岾寺) 선원도 왕래하였다. 오대산을 비롯한 전국 중요 수행처를 찾아 운수납자(雲水衲子)의 길을 떠났다. 1934년 12월에 출범한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의 이사, 조선불교선종(朝鮮佛敎禪宗)의 서무이사 소임을 맡는다. 스님은 1935년 선학원에서 개최된 수좌대회의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정화불사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청담 스님이 서무이사 소임을 맡으면서 스님이 수좌계 영역에서 활동을 확대해 갔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조선불교선종의 종정(宗正)이자 선리참구원의 이사장이었던 만공(滿空) 선사의 행보와 연결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청담 스님은 수좌대회를 통해 수좌계를 대표하는 반열에 올랐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수좌대회에서 선학원의 주의 주장을 충실히 하기 위해 청규(淸規)를 정하고 수행해야 함을 제안하였다는 점이다. 이 제안을 당시 참가한 수좌들은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이와 같은 청담 스님의 불교정화를 위한 기초 작업은 1939년 3월 23일, 선학원에서 개최된 조선불교선종 제1회 정기 선회(禪會)에서도 나타났다. 청담 스님은 금강산 마하연(摩訶衍) 대표로 참가하였는데, 선원 청규의 실행, 초심납자 지도 문제를 제안하여 실천케 하였다.

스님의 불교정화를 위한 고뇌는 1941년 3월 4일부터 13일까지 열흘간 선학원에서 열린 유교법회(遺敎法會)에서도 재현되었다. 이 대회는 청담 스님과 운허(耘虛) 스님이 만공 선사와 한영 강백과 상의해 개최하였는데, 전통선 수호, 계율 수호를 내세우면서 불교정화의 성격으로 전환되었다

이와 같이 청담 스님은 유교법회를 주도하였다. 법회를 마친 뒤에 비구승을 중심으로 범행단(梵行團)을 조직하여 선학(禪學)과 계율(戒律)의 종지를 선양(宣揚)하기 위한 후속 작업에 들어갔는데, 그 주역은 만공(滿空)·동산(東山)·효봉(曉峰)·청담(靑潭) 스님 등이었다.

이후 청담 스님은 1954년 8월 선학원에서 전국비구승 대회를 소집, 불교정화운동의 횃불을 높이 들면서 “난잡한 요정으로 변해 버린 불교사찰이 청정도량으로 정화될 때까지 목숨을 다 바쳐 싸우자”고 비장한 결의를 표명했다. 또한 선학원 제2대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한국불교의 정통선을 함양하고 대중교화의 구심점으로 삼기도 하였다.

정화(淨化), 현대불교사에 중요한 불사(佛事)

청담 스님의 발자취는 근현대 한국불교의 역사(歷史)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님은 한국불교의 이상·고민·비극·위대성을 바로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고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했으며, 그것은 수행자로서의 삶 속에 유감없이 구현되어 나타났다. 청담 스님하면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불교정화(佛敎淨化)다. 스님의 정화운동의 근본정신은 ‘스스로 부처님 깨달음의 세계로 돌아가 지혜로운 삶을 영위하자’는 데 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 이타행(利他行)의 실천을 통해 불국정토를 만들고자 했다. 이 정신의 근저에는 ‘마음철학’과 ‘마음사상’이 근저(根柢)에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청담 스님의 정화운동은 승려나 불교에만 머물지 않고 인류사회의 정화까지 염두에 둔 포괄적인 뜻을 갖고 있었다. 또한 민족의 역사와 얼이 담긴 인간성 회복, 도덕성 회복을 통한 사회정화도 의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바탕 위에 수행·청정불교의 재건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구국(救國)·구세(救世)·구교(救敎)·구종(救宗)하는 불교의 정화를 실행했던 것이다.

청담 스님의 한국불교 정화는 현대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불사(佛事)였다. 조선 500년의 억불 상황 속에서도 서릿발 같은 청정승가의 전통이 일제와 일본불교의 강요와 영향 아래 왜색불교로 변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왜색불교로 훼손된 계율(戒律)을 복원하고 전통 한국불교와 수행정신의 정립을 통해 청정승가의 위상과 불교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회복운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불교 정화운동은 스님에게 있어 보살도(菩薩道)를 실천하는 한 단계였다. 출가하여 불법을 체득하기 위한 수행 또한 중생구제의 보살정신이었다. 이렇듯 중생구제 보살정신은 불교정화로 나타난 것이다. 청담 스님의 삶에 있어서 일관된 정화불사 이념은 ‘마음철학’으로부터 나왔다.

청담 스님의 정화불사는 마음의 외적(外的) 정화와 내적(內的) 정화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마음의 외적 정화불사는 교단정화(敎團淨化)로 청정승가(淸淨僧伽)를 확립하는 불사였고, 마음의 내적 정화불사는 지계(持戒)를 통한 참선(參禪)으로 무명을 타파하여 반야를 실현하는 견성의 불사로 정법불교를 세우는 불사였다. 정화불사는 입지(立志)를 세워 인고(忍苦)의 수련 속에서 빛을 발한 ‘마음’의 운동이었다. 자신을 깨닫는 마음 찾는 공부로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의 대자유인이 되어 주체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자기 ‘마음’을 깨치는 일이다. 이 마음을 깨쳤을 때가 곧 부처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마음을 깨달아서 많은 중생을 바로 이끌어 주고 복 받게 해 주고 잘 살릴 수 있는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이며, 우주를 다 내 마음대로 하자는 것이다. 청담 스님은 이와 같은 ‘마음법문’을 통해 주체적인 자아의 중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마음선’이라는 새로운 선(禪)사상 구축

청담 스님은 간화선(看話禪)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간화선의 종지(宗旨)만 고집하진 않았다.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수용한 것은 그 나름의 이론과 주장이 분명했다. 청담 스님의 선풍은 ‘마음선’으로 펼쳐진다. 마음사상에 대한 법문과 철학은 중생 교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이루고 있고 핵심의 요체로 파악된다.

마음과 관련된 청담 스님의 독자적인 선(禪)사상은 출가 직전 긴요한 인연으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마음 법문에 심취한 청담 스님은 이로 인해 출가를 단행했고 이후 항상 마음의 당체는 어떤 것인가?’라는 화두(話頭)를 마음속에 품게 되었다.

청담 스님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수행의 방법으로 계율(戒行)과 선정(禪定)·교학(敎學) 공부 모두를 중시하는 균형 잡힌 수행관(修行觀)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중심을 마음에 두는 공부를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의 수행론이 지니는 특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 ‘마음선’을 정착시켰다.

청담 스님이 정법불교의 선양을 위해 매진했던 것은 순교적(殉敎的) 각오를 바탕으로 한 노도 같은 임제선풍(臨濟禪風)의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선기(禪機)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스님은 대한불교조계종의 3대 지표사업인 교육(敎育)·역경(譯經)·포교(布敎)를 평생의 과업으로 추진했으며 한국불교 정통성을 회복하는 정화불사의 면면계승을 위해 출가 승려의 엄격한 수행과 지계를 강조했다. 상하좌우로 종횡무진하며 시간과 대상 즉, 상황에 따라 할(喝)과 방(捧)으로, 또는 대기대용의 선기를 발휘하면서도 보살과 같은 자비심으로 교화에 진력하여 한국불교사에서 보기 드문 이(理)와 사(事)의 능력과 자질을 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특히 이와 사를 아우르며 각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청담 스님은 ‘인간으로서 태어나서 해야 할 일인 일생일대사(一生一大事)로 부처님의 정법심인(正法心印)을 체득(體得)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하리라’라는 서원으로 수행자의 길을 걸었다. 간화선의 영향을 받아 선가의 불립문자(不立文字) 도리를 ‘마음사상’과 ‘선사상’ ‘유심사상’으로 접목시켜 한국불교의 선맥(禪脈)을 견인하였다.

청담 스님의 간화선 내용은 첫째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이다. 선(禪) 수행자가 무심(無心)을 체득하여 보살행을 하는 것이 불조의 혜명을 잇는 길임을 스님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둘째는 수행자가 간화선의 기본요건으로 지계(持戒)·참회(懺悔)·인욕(忍辱)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신심(信心)·분심(憤心)·의심(疑心)을 간화선의 참구법(參究法)으로 제시하고 있다.

청담 스님은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으로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했다. 하지만 돈오점수(頓悟漸修) 사상 또한 확실한 논리와 이론을 내세우며 그 입장을 수용했다. 자기 마음에 대한 확신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깨침과 닦음’이다. 따라서 ‘깨침과 닦음’의 성격을 밝히고 체계화하는 일에 진력하였다. 깨침과 닦음에 대해 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 돈오점수 사상의 수용이다. 스님은 바른 마음을 닦는 길은 먼저 마음의 성품을 분명히 깨치고, 그 깨침에 의거하여 점차로 닦아 가는 선오후수(先悟後修) 사상도 받아들이고 있다. 돈오점수는 바로 이 선오후수 사상을 기반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무심(無心)을 교화의 방편으로 내세워

청담 스님은 또한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참선(參禪)을 비판했다. 남악 회양(南嶽 懷讓) 선사가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겠다’는 말로 좌선(坐禪)에만 집착하고 있는 제자 마조 도일(馬祖 道一)을 깨우쳤듯이 스님은 참선에 있어서 정(定)과 혜(慧)를 중시했다. 간화선의 입장에서 정혜쌍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실천한 것이다. 따라서 청담 스님은 철저한 바른 생활을 바탕으로 흔들림 없이 선정(禪定)을 닦을 때 비로소 지혜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참선을 하는데 다른 생각 하나 없이 화두(話頭)만 뚜렷한 것을 선정(禪定)이라 하고 삼매(三昧)에 들었다고 한다. 이는 정과 혜의 두 바퀴가 함께 돌아가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청담 스님의 확고한 신념이자 견해였다.

청담 스님은 마음사상 가운데서도 특별히 무심(無心)을 교화의 방편으로 내세웠다. 중생들도 마음공부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면 모두 부처님과 똑같은 무심의 경지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설했다. 하지만 중생들이 분별하는 마음과 무지와 착각 때문에 이러한 무심의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실 무심의 선사상은 조사선에서 펼친 선의 생활이다. 무심이 평상심이고 평상심이 무심이다. 스님은 “집착과 사량분별에 빠지면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며 무심의 경지에서 지혜롭게 자신의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담 스님이 평생 ‘마음’에 중점을 둔 것은 자기 자신의 궁극적 실체를 인식하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의문에 해답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연기(緣起) 등의 불교사상도 ‘마음’이 근본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면서 무심(無心)을 특별히 강조한 이유는 작위(作僞)를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스님은 도를 구하려는 마음 자체도 작위(作僞)이므로 스스로 속박(束縛)될 위험이 있다며 무심경지를 설파했다. 무심에 들면 자성(自性)이 청정해지고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와 덕성을 구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불성(佛性)에 구족된 반야의 지혜로서 일체의 모든 경계나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 공(空)을 실천하는 것이 선(禪)불교의 실천 정신이라고 하는 점을 대중화하려는 의도였다고 파악된다.

한국불교 미래 위한 주춧돌 놓아

그래서 청담 스님은 선(禪)에 대해 일반 불자들이 알아듣기 쉽고 접근하기 쉽게 대중적으로 선 법문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어렵게만 느껴졌던 선을 일반인들이 친근감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도록 ‘마음’에 접목시켜 강의한 것은 선사상을 대중화해 한국불교를 현대화하려는데 목적을 둔 것이다. ‘마음선’은 이러한 과정에서 정착된 청담 스님의 업적 중의 하나다.

청담 스님은 사판(事判)으로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1955년 조계종 총무원장, 1956년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 1957년 해인사 주지 등을 역임하면서 1962년 통합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을 출범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미쳤다. 정화운동의 와중에서도 일부 사판승들이 대처 측과 타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용납하지 않았다. 정법불교 선양을 비롯해 포교, 역경, 도제양성 등의 불사는 거의 스님으로 인해 그 기초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62년 대한불교(현 불교신문 전신)의 초대 발행인을 맡아 정화운동을 비난하고 왜곡하는 세력들과 맞선 것도 자나 깨나 한국불교를 걱정하는 청담 스님의 배려 덕분이었다. 사판에서도 두각과 능력을 나타낸 청담 스님을 흠모한 나머지 대한불교조계종은 1966년 통합종단 제2대 종정으로 추대한다. 스님은 결코 이름만 걸어놓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한국불교의 또 다른 100년 미래를 위한 주춧돌을 놓고자 동분서주했다. 청담 스님의 노력으로 조계종의 대외적 위상은 높아갔고 미래의 희망은 밝아졌다.

실로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이 있기까지 청담 스님은 이(理)와 사(事) 모든 곳에 불조의 혜명을 이어준 법둥(法燈)이었고, 풍부한 자양(資糧)을 심어 준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다만 청담 스님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학문적 조명이 부족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번 본인의 논문을 포함해 보다 많은 후학들이 청담 스님의 사상과 한국불교사에 남긴 족적에 대해 활발한 연구 작업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끝>

방남수 | 불교문예학 박사, 청담고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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