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를 구족한 육신으로 볼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구족한 육신으로 볼 수 없사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구족한 육신이 곧 구족한 육신이 아니라, 이름이 구족한 육신이기 때문이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를 구족한 몸매로 불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구족한 몸매로 볼 수 없사옵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몸매의 구족은 구족이 아니옵고 그 이름이 몸매의 구족이기 때문이옵니다.”

청담 스님은 색상(色相)을 여읜 법신의 여래를 깨달아야 한다며 제20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스님은 “모든 부처님은 다 무위법(無爲法)을 증득(證得)했기 때문에 부처라 하는 것이지 상호(相號)를 성취했기 때문에 부처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며 “거울에 아무런 티가 없어서 모든 물건을 비출 수 있는 이치와 같이 여래의 법신(法身)은 필경 육신이 아니기 때문에 상호(相號)를 알 수 없다”고 설한다. 그러면서 “이 상호 두 가지가 부처가 아닌 것도 아니고 법신을 여읜 것도 아니므로 여래는 색신이 아니라 법신이란 뜻으로 ‘색신(色身)이 아니다’라고 했다”며 “또한 색상이 없는 것도 아니므로 색상의 여윈 법신의 여래가 참 법신”이라고 강조한다.

청담 스님은 “이 세상의 모든 색신과 형상(形相)은 인연으로 엮어져 있으므로 참으로 구족(具足)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에 따른 모든 인식(認識)을 떠나보내야 여래(如來)를 볼 수 있다”며 “거울의 먼지와 때를 날려 버려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주는 것과 같다”고 설한다.

시시각각(時時刻刻) 변해 버리고 그리하여 결국에는 없어져 버릴 색상에 마음을 붙이면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참 여래는 보지 못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과거 오백생을 닦은 수행의 과보(果報)로 길상(吉相)으로서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를 지녔는데 이는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에서 말하는 제상(諸相)이라고 강조한다.

마음의 본체는 변하지 않아

또한 청담 스님은 제21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에서 육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사번뇌(生死煩惱)와 일체(一切)의 차별(差別)·번뇌심(煩惱心)으로부터 해탈(解脫)하는 지혜(智慧)가 필요하다고 설한다.

“수보리야, 너는 말하지 말라. 여래가 나는 마땅히 설한 법이 있다는 생각을 하리라고 말하지 말라는 이런 생각도 하지 말라. 왜인고하니,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께서 설한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곧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 되며, 내가 설한 바를 이해하지 못한 이유니라. 수보리야, 설법이라는 것은 법을 설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그 이름이 설법이니라.”
이 때 혜명을 갖춘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자못 미래 세상에 이 설법을 듣고 신심을 낼 수 있는 중생이 있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중생이다. 하지만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중생이라는 것은 중생이 아니요, 그 이름이 중생일 뿐이니라.”

스님은 “여래는 육신(肉身)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모양으로 볼 수 없고, 여래(如來)의 법(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법”이라며 “말도 아니고 설명할 법도 없는데 중생(衆生)을 제도하기 위하여 거짓으로 가정을 위해 법을 설하여 팔만 사천 법문을 설했다”며 중생의 위한 자비심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설법하신 주체인 부처님도 공(空)하고 설하는 내용인 법도 공한 것이니 설법하는 말씀의 실체가 공한 것이고 설법을 듣는 중생 역시 공한 도리로 이끌어오기 위한 대상이어서 부처님의 설법은 종일 말씀하셔도 한 말씀하신 것이 아니며, 45년 설한 것이 한 말씀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아무것도 설한 것도 없는 공한 자리에만 주저앉아서 중생제도도 안하고, 마음을 찾지 않고, 설법도 안하면 소승(小乘)이고 역시 집착”이라고 설한다.

우리가 마음의 정체를 알아보려고 하면 이미 거기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金剛經)》에서는 무념(無念)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어떤 경계(境界)나 장벽(障壁)이 없는 마음의 무애(無碍)한 경지를 무념이라 한다. 이 무념의 경지에서 참선(參禪)을 해야 깨달음, 마음의 본체(本體)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자아에 대한 욕심(慾心)과 경계를 뛰어 넘는 방법인 수행을 통해 번뇌를 제거한다면 본체(本體)는 그대로 드러나는데 본래의 청정한 마음자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설한다.

모든 법은 실체가 없는 자리

부처님께서는 4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온갖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깨달음을 팔만대장경으로 남기셨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인류사에 있어서 최대의 사건이고 부처님의 설법은 인류사(人類史)에 있어서 최고의 걸작이다. 그러나 여래(如來)는 육신(肉身)에 본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깨달음마저도 사량분별(思量分別)로 헤아려질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설한 자(者)도 없고 설한 법(法)도 없다. 부처님이 설하신 일체법(一切法)은 아무런 실체(實體)가 없는 적멸(寂滅)한 그 자리를 굳이 말로 나타내었을 뿐인데, 여래가 무엇인가 힘주어 설법했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여래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되고 심지어는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 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채워 있지도 않고 비어 있지도 않은 평등(平等)한 그 자리를 깨치고, 언어라는 수단을 쓰지 않으면 우리들에게 전할 수가 없어서 설법을 한 것이다. 원래로 텅 비어 있어서 말할 것이 없는 것을 가지고 설법(說法)이라고 하는 것이고 또 그것에 굳이 이름을 붙여 주자니 설법이라고 한 것이다. 바로 이것은 각각의 실상에 대해 언어에 걸리지 말고 차별 없이 보라는 것이다.

제22 무법아득분(無法可得分)에서는 본래 본성(本性)은 변할 것이 없고 차별이 없으며 여래와 중생을 차별 없이 보는 것에 대해 설하고 있다.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것은 얻는 것이 없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내지 조그만 법도 얻는 것이 없으니 이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 하느니라.”

스님은 “마음의 본성(本性)은 지옥(地獄)을 갔을 때나 천당(天堂)에 갔을 때나 변한 것이 없고 새로운 것이 없다”면서 “부처인 때나 중생(衆生)인 때나 그 본성(本性)은 조금도 다르지 않으므로 깨달은 것도 얻은 것도 아니다. 얻은 것도 아는 것도 다 없애는 공부를 하여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증득(證得)하여 아무것도 얻음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설하다.

“우리 모두는 부처의 씨앗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생(衆生)이라고 할 수가 없다”며 “다만 부처의 씨앗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큰 파도는 파도이고 작은 파도는 파도가 아니다.’라고 한다면 이는 어불성설”이라면서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만이 부처이고 중생(衆生)은 부처가 아니다” 하는 분별(分別)은 맞지 않다고 강조한다.

참 마음이 여래의 법신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로는 또 중생의 위치에 있으니 중생인 부처가 매일 매일 중생 노릇을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중생과 부처를 넘나들되 거기에 걸려서는 안 된다. 그러니 중생이라고 하는 것도 실로는 중생이 아니고 그 이름이 중생인 것이다. 청담 스님은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에서 법신(法身)의 상(相)에 대해 설하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서른두 가지 상으로 여래라고 볼 수 있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그러하옵니다. 서른두 가지 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만일 서른두 가지 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역시 여래라고 할 것이다.”
수보리 존자가 세존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을 제가 아옵기로는 서른두 가지 상으로써 여래를 뵐 수 없사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일 형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능히 여래를 볼 수 없으리.”

청담 스님은 “우리의 참마음이 곧 여래의 법신인데, 이 참마음 자리는 선(善)이니, 악(惡)이니, 복(福)이니, 죄니 하는 차별상(差別相)이 떨어진 자리이기 때문에 복을 지으면 복된 상(相)을 받고, 죄를 지으면 추(醜)한 세상에 나쁜 모습으로 태어나서 화(禍)를 받는다”고 설한다. 그러나 “아무리 복을 많이 짓고, 아무리 거룩한 선행을 많이 해서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 상(相)만 보고 여래를 식별한다는 것은 곧 현상계(現象界)에 떨어진 것이고, 생각·지식·망상에 집착된 중생경계(衆生境界)”라고 강조한다. 스님은 “상(相)도 아니고 생각도 아닌 무상무위(無相無爲)에 열반적정(涅槃寂靜)에 가만히 앉아서 복(福)도 짓지 않고 육바라밀(六波羅密)을 행하지 않으면 업(業)만 쌓게 된다”고 설한다.

여래의 경지는 무아(無我)와 무심(無心)

스님은 제27 무단무별분(無斷無滅分)에서는 얼핏 누구나 알고 있는 듯하지만 쉽게 떨쳐버리기 힘든 관념과 습관, 집착, 모든 집착(執着)에서 벗어나 상(相)을 여읜 선(禪)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고 설한다.

“수보리야. 네가 만일 생각하기를, 여래는 구족상을 쓰지 않음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도다 하겠느냐.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여래가 구족상을 쓰지 않음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지 말라. 수보리야. 네가 만일 생각하기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모든 법이 단멸하는 것으로 말하는구나 한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 그러냐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모든 법에 대해 단멸상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청담 스님은 “부처님은 삼십이상 팔십종호 같은 복(福)된 상(相)에는 아무 생각도 없고 일체의 법에 대해서 모든 진리는 아주다 없어지는 것이라는 단멸상(斷滅相)을 가지기 때문에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얻을 수 있다”면서 “여래의 입장에서 볼 때도 구족한 상호는 진실한 여래와 관계없는 것이 아니라, ‘상(相)에 매달리지 않고 청정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야겠지만 반드시 상이 없어야 된다’라고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고 설한다. “이는 우리들이 부대끼고 매순간 만나는 모든 현상에서도 얼마든지 보리를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이라며 “제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發)한 사람은 형상(形相)으로도 말하지 않고 꼭 형상 아닌 것으로도 말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스님은 “상(相)이 있으면 있는 대로, 상(相)이 없으면 없는 대로 주저함이 없이 깨달음을 구(求)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일체의 상이 끊어진 텅 비어 적멸(寂滅)하기는 하나 아무 것도 없기만 하는, 단멸(斷滅) 또한 아닌 것”이라고 설한다.

어떠한 고정된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모든 법(法)이 끊어지고 없어져 아무 것도 없는 무기공(無記空)에서 깨달음을 얻으려 하면 안 된다. 아무런 보람이나 결과가 없는 무기공(無記空)에 빠지면 나태하고 무기력한 열반에 머무르게 되는데 무기공에 빠지지 말고 원력을 갖고 열심히 뭔가를 하면서 한껏 자신의 삶을 펼쳐야 한다.

부처님만이 갖춘 삼십이상을 통해서도 여래를 보지 못한다. 그러니 구족한 상(相)을 쓰지 않아야 여래를 볼 수 있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실상(實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거울 앞에 섰을 때 나 아닌 다른 모습이 비치는 것도 아니다. 거울에 비친 나와 실제의 내가 둘이 아닌 것이다. 큰 물결이나 작은 물결이나 수분이라는 성질에서 보면 동일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여래(如來)의 세계는 어떤 인위적인 조작이나 상(相)이 없는 세계, 즉 자아(自我)에 대한 존재의식이 없고 상대방이나 어떠한 경계(境界)라는 차별이나 분별심(分別心)이 없어진 무아(無我)·무심(無心)의 경지다. 근원적인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 일체(一切)의 법(法)이 끊어지거나 멸(滅)한 일체(一切)의 사량분별(思量分別)과 번뇌망념(煩惱妄念)이 없는 선(禪)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수행(修行)을 통한 깨달음의 안목 제시

제32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 “일체 유위법은 꿈·환상·물거품·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하라.”라고 하였다. 스님은 “이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의 제상(諸相)은 실상(實相)이 아니며 무자성(無自性)임을 관(關)하라는 것이다. 이 관법이 선관으로 수용되어 깨달음을 체득하는 지름길이 되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為法)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에서 ‘간시궐(乾屎撅)’, ‘마삼근(麻三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등 격외공안(格外公案)의 화두(話頭)가 선관(禪觀)의 관문으로 던져질 수 있었다”며 “이를 깨우쳤을 때 모든 아집(我執)의 칠통이 파괴되어 캄캄한 밤의 어두움이 등불 하나로 소멸되듯 무아의 진리를 체득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이 이러한 선법(禪法)으로 무아법(無我法)을 체득하여 열반의 언덕에 도달하는 것이다.

청담 스님이 설한 《금강경대강좌(金剛經大講座)》는 일반대중이 쉽게 부처님 가르침이나 선(禪)을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음을 어떻게 깨닫는 것인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금강경》에 대한 이해가 목표가 아닌 모두가 《금강경》의 도리를 깨닫도록 하는 선지식(善知識)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알음알이(知解)에 떨어지지 않도록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마음’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것이 청담 스님의 《금강경대강좌》이 가지고 있는 큰 장점이다. 스님은 “그러므로 현상계에서 생명을 찾을 수 없고 그것은 다 마음의 그림자이며, 마음이 곧 여래이니 여래는 오직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여래는 곧 ‘마음’이다. 청담 스님이 《금강경》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은 곧 그의 ‘마음철학’이라 하겠다.

청담 스님은 《금강경대강좌》에서 수행(修行)을 통한 깨달음의 안목과 구체적 현실 속에 행할 수 있도록 일반신도들에게 쉽게 설명하고 있다. 청담 스님은 한국불교의 초석(礎石)을 다지고, 선지식의 혜안(慧眼)과 인욕(忍辱)보살의 구체적인 실천을 나투신 큰 스승으로서 수행의 토대로서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 마음은 진리, 부처, 불성, 신, 우주 등과 하나로 설명되어지곤 한다. 수행이란 중생들이 본래의 마음을 등지기 때문에 그 본래의 마음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스님은 저술에서 밝히고 있다.

《금강경》은 역설화법이 돋보인다. 깨달음을 위해 선문답(禪問答)을 통한 특유의 역설(逆說) 화법으로 궁극의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보리야, 부처가 반야바라밀이라 말한 것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니라.”라고 한 것처럼 강한 부정을 통한 긍정의 효과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부정을 통한 긍정은 반야바라밀이라는 어떤 실체적 존재가 있어서가 아니라 언어(言語)를 통하여 밝힐 수밖에 없는 바라밀다의 깨달음의 세계를 보이기 위한 것이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모든 속박에서 해탈할 수 있는 선(禪)의 길을 바로 이 《금강경》에서 찾을 수 있었기에 청담 스님을 비롯한 역대 많은 선사들이 이 경을 소의(所依)로 하여 전수하여 왔다.

방남수 | 불교문예학 박사, 평택 청담고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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