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국제적인 학자이자 위대한 유식학자(唯識學者)이며, 서명학파(西明學派)의 태두(泰斗)인 문아 원측(文雅 圓測: 613~696)은 신라 진평왕 때의 왕손으로서 경주 모량부(牟梁部) 출신이다. 휘(諱)는 문아(文雅)이고 자(字)는 원측이며, 3세에 출가하여 경론(經論)을 학습한 뒤에 15세(진평왕 49, 627)에 구법입당(求法入唐)하였다. 장안(長安)에 머물면서 법상(法常, 576~645)과 승변(僧辨, 568~642)의 문하에 들어 구(舊) 유식학을 배웠다.1) 원측이 유학을 간 해에 중국의 유명한 학승 현장(玄奘, 602∼664)은 28세의 나이에 인도로 유학을 떠난다.

원측은 어학(語學)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어서 중국어뿐만 아니라 범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하여, 인도의 말을 들은 이후에 바로 중국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감동한 당나라 태종(太宗)은 원측에게 친히 도첩(度牒)을 내리고 원법사(元法寺)에 머무르도록 하였다. 원측은 그곳에서 비담(毘曇)·성실(誠實)·구사(俱舍) 등 유식학 연구의 기본이 되는 소승경론(小乘經論)을 연구하는 한편, 대승경론(大乘經論)도 폭넓게 연구하였다.

원측은 현장이 645년(唐 太宗 貞觀 19) 18년 간의 인도 구법여행에서 돌아와서, 자은사(慈恩寺)에서 불경번역에 매진할 때, 그에게서 신(新) 유식학을 배웠다. 아마도 이때 원측은 신유식과 구유식을 비교하며 함께 검토할 수 있었을 것이다.

658년 당(唐) 고종(高宗)의 칙명(勅命)에 의하여 현장이 직접 감독하여 건립한 서명사(西明寺)가 낙성되자, 원측은 46세(신라 태종무열왕 5)의 젊은 나이에 대덕(大德, 講伯)이 되어 신유식학 관계의 저술에 힘쓰는 한편, 현장을 도와 유식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2)

원측이 서명사에 머문 기간은 9년인데, 그는 이 기간 동안 저작에 전념하여,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10권, 《성유식론소(成唯識論疏)》 10권, 《인왕경소(仁王經疏)》 6권, 《유식이십론소(唯識二十論疏)》 2권, 《관소연연론소(觀所緣緣論疏)》 2권, 《인명정리문론본소(因明正理門論本疏)》 2권, 《반야심경찬(般若心經贊)》 1권 등을 남겼다.

나당전쟁(羅唐戰爭, 671∼676)으로 인해,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원측은 서명사를 떠나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에 머무르다가, 다시 그곳에서 30여 리 떨어진 외딴 곳에 암자를 짓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 채 수행에 정진하였다.3)

원측은 종남산에서 8년간 은둔한 후 승려들의 요청에 따라 서명사로 돌아가 《성유식론(成唯識論)》을 강의했다. 676년 인도 승려 지바하라(地婆訶羅:日照)가 인도에서 《대승밀엄경(大乘密嚴經)》과 《대승현식경(大乘顯識經)》 등의 불경을 가지고 와 중국어로 번역할 때, 번역을 도울 대덕 5명 중 한 사람으로 뽑혀 증의(證義)로서 참여했다.4) 당시 당나라 고종(高宗)의 황후인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원측을 살아 있는 부처처럼 존경하여, 신라의 신문왕(神文王, ?∼692)이 여러 번 원측의 귀국을 요청했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5)

693년에는 인도 승려 보리유지(菩提流志)가 가져온 《보우경(寶雨經)》을 번역했다. 695년에는 실차난타(實叉難陀)가 우전국(于闐國)에서 가져온 《화엄경(華嚴經)》을 새로 번역할 때 참여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불수기사(佛授記寺)에서 천화(遷化)했다. 696년 당(唐) 무후(武后) 만세통천(萬歲通天) 원년(元年, 신라 孝昭王 5) 7월 22일로 향년 84세였다.

제자들이 사리를 용문산 향산사(香山寺)에 안치했다. 그 뒤 제자인 자선(慈善)과 승장(勝莊) 등이 사리를 나누어 종남산 풍덕사(豊德寺)에 사리탑을 세웠다. 현재 중국 서안(西安)의 흥교사(興敎寺)에 그의 탑묘가 남아 있으며 탑묘 안에 초상이 새겨져 있다. 후대에 송복(宋復)이 지은 <대주서명사고대덕원측법사불사리탑명(大周西明寺故大德圓測法師佛舍利塔銘)>이 있다.

원측은 현장 밑에서 함께 동문수학한 규기(窺基, 632~682)와 함께, 법상종(法相宗)이라고 불리는, 당대 유식학의 쌍벽을 이루는 제자였으나, 학문적 견해를 달리하여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 당시의 중국 유식학은 규기와 그 후계자들을 가리키는 자은학파(慈恩學派)와 원측과 그 후계자들을 지칭하는 서명학파(西明學派)로 나뉘어졌는데, 이는 규기와 원측이 머물던 사찰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원측의 제자 도증(道證, 생몰미상)은 692년(효소왕 1)에 신라로 귀국하여 원측의 유식학을 신라에 전했고, 이것은 다시 해동(海東) 유가종(瑜伽宗)의 대덕(大德)으로 회자(膾炙)되는 대현(大賢, 생몰미상)에게로 이어진다.6) 이와 같이 당나라에 유학 온 신라의 승려들에 의해서 원측의 학문이 이어지기 때문에, 서명학이란 결국 ‘신라계 유식’이란 의미가 된다. 이후 신라의 유식학은 국제적 성격을 갖게 되었으며, 나아가 그것을 기반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법상종은 화엄종에 이은 제2의 종파로서, 신라 교종의 양대 주류를 이루게 된다.7)

규기와 그 후계자 혜소(慧沼, 640~714), 지주(智周) 등 법상종(法相宗)의 자은학파(慈恩學派)는 스스로를 정통파(正統派)로 자처하고 적의를 품어 서명학파를 이단시하고 배척했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전해지는 원측의 도청설(盜聽說)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송고승전》에 의하면 규기가 자은사에서 《성유식론》 강의를 현장으로부터 듣고 있을 때 원측이 문지기에게 돈을 주고 몰래 마루 밑에 들어와 듣고, 규기보다 먼저 서명사에서 《성유식론》을 강의하였다고 한다. 규기는 자기보다 먼저 원측이 강의한 것에 대해 한탄과 원망을 이기지 못하였다고 한다.8)

원측의 저술 중에서 주저(主著)가 되는 것은 《성유식론소(成唯識論疏)》 10권이다. 이 소(疏)로 인하여 중국유식학계는 일대 논쟁을 벌이게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규기의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 40권과 규기의 제자인 혜소의 《성유식론요의등(成唯識論了義燈)》 14권에 잘 나타난다. 규기는 그의 책에서 ‘유인(有人)의 설(說)’을 가끔 들어 자기의 해석과 다름을 논구하였고, 혜소는 200여 곳에서 원측의 설을 인용하여 공박하였다. 원측의 제자들도 지지 않고 도증은 혜소를, 태현은 지주를 공박하였다.9)

주) -----
1) 유식학의 중국 전래는 인도의 진제(眞諦, 拘那羅陀, 499~569) 스님이 무착(無着, Asaṅga)의『섭대승론(攝大乘論)》을 비롯한, 《석론(釋論)》,『대승기신론》등을 전역(傳譯)하자, 이를 바탕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쏟아져 나와 성립한다. 법상과 승변은 모두 그 문하의 승려들이다. 이후 현장이 인도에 다녀온 후 그로부터 비롯되는 유식을 신유식, 진제와 그 문하의 유식을 구유식이라 부르게 된다.
2) 현장은 자은사에서 서명사로 옮겨와 2년간(658년 7월∼659년 10월) 머물렀다. 원측은 이때 대덕이 된다. 자세한 것은 다음 책을 참조. <남무희, 《신라 원측의 유식사상 연구》(민족사, 2009), pp.82∼83.>
3) 위의 책, p.84.
4) 《宋高僧傳》 권2, 周西京廣福寺日照傳(《大正藏》50), p.719a. “釋地婆訶羅。華言日照。中印度人也。洞明八藏博曉五明。戒行高奇學業勤悴。而咒術尤工。以天皇時來遊此國。儀鳳四年五月表請翻度所齎經夾。仍準玄奘例。於一大寺別院安置。幷大德三五人同譯。至天后垂拱末。於兩京東西太原寺(西太原寺後改西崇福寺。東太原寺後改大福先寺)及西京廣福寺。譯大乘顯識經大乘五蘊論等凡一十八部。沙門戰陀般若提婆譯語。沙門慧智證梵語。敕諸名德助其法化。沙門道成薄塵嘉尙圓測靈辯明恂懷度證義.”
5) 남무희, 위의 책, pp.85∼86.
6) 우리나라와 중국의 문헌에서는 대현(大賢)이라고 하였고, 일본에서는 태현(太賢)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대현이 맞다. 자세한 것은 다음 책을 참조. <一然 撰, 《三國遺事》 卷第五(《大正藏》49), p.1009c. 賢瑜珈海華嚴條>
7) 최병헌, <한국불교의 전개>, 《한국사상의 심층연구》(우석출판사, 1986), pp.94∼95.
8) 《宋高僧傳》 권4, 唐京兆大慈恩寺窺基傳(《大正藏》50), p.725c. “周疏畢。無何西明寺測法師亦俊朗之器。於唯識論講場得計於閽者賂之以金。潛隱厥形。聽尋聯綴亦疏通論旨。猶數座方畢測於西明寺鳴椎集僧稱講此論。基聞之慚居其後不勝悵怏。奘勉之曰。測公雖造疏未達因明。遂爲講陳那之論。基大善三支。縱橫立破述義命章。前無與比。又云。請奘師唯爲己講瑜伽論。還被測公同前盜聽先講。奘曰。五性宗法唯汝流通。他人則否.”
9) 고익진, 《원측의 유식사상》, 《한국의 사상》(열음사, 1984), pp.89~90.

이덕진 | 창원 문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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