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나 계율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먼저 억압의 이미지나 경직되고 답답한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꼭 지켜야만 하는 것이 아닌데도 억지를 부리는 모습이나 국민윤리 같은 이름으로 우리를 억압하고자 했던 독재자의 얼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계율도 마찬가지다. 선불교 중심으로 정착한 한국불교계에서 유독 계율에 관대한 정도를 넘어서 바라이죄를 범한 승려조차 감싸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이유 중 하나는 계율을 단박 깨침[頓悟]의 이름으로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우리 불교계에서 계율이 경시되는 이유는 더 다양하고 복잡하다. 또 다른 이유로 비구계와 비구니계로 상징되는 사분율(四分律)과 보살계로 불리는 대승계를 동시에 수지하는 전통 속에서 너무 많은 계율을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오히려 그 중요성은 뒷전으로 밀리는 현상을 들 수 있다. 이 현상은 각각의 개인이 주로 돈을 통해 살아가야 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맞으면서 더 복잡해졌고, 그러다보니 계율의 과잉이 오히려 계율의 망각 또는 의도적인 무시를 가져오는 부정적인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우리 시대의 계율에 대해 다시 고민해야만 한다. 우리 불교는 보살이 주인공인 대승불교에 속하고, 그 보살에는 당연히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이 있다. 출가 수행공동체가 중심을 이루기는 하지만, 재가자들에게도 충분한 수행과 깨달음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것이 대승불교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일체중생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오염된 것이 없습니다. 우바리여, 망상이 오염된 것입니다. 망상이 없으면 곧 청정인 것입니다. 그릇된 생각은 오염된 것이지만, 그릇된 생각이 없으면 곧 청정입니다.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염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청정입니다. ...(중략)...모든 것은 아지랑이나 물속에 비친 달과 같고 거울 속에 비친 영상과 같이 망상으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야말로 계율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며, 이 계율을 잘 지켜나가는 사람이야말로 해탈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유마경》, 강조는 필자의 것임)

재가보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유마보살의 계율관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게 하는 경전의 한 부분이다. 일체중생의 마음이 본래 청정함을 알고 온갖 고통과 죄가 그 망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올바로 알고 보는[如實知見] 사람이 곧 계율을 잘 지키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곧 해탈한 사람이지 깨달음이 다른 곳에 있지 않다고 강조하는 유마힐의 가르침을 듣고 부처님의 제자 우바리는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이처럼 명석하고 사물의 이치에 통한 사람은 없다.’라고 감탄하며 존경심을 표한다.

깨달음과 계율의 관계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불교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자본주의적 일상의 거대한 파고 속에 휩쓸려 헤매고 있다. 돈과 소비를 중심으로 우리 앞에 펼쳐지는 온갖 현상들이 모두 오염된 망상의 결과물일 뿐임을 제대로 알고 볼 수 있는 지혜가 바로 계율을 잘 지키는 것 자체와 이어져 있다는 유마힐의 계율관은 우리들로 하여금 계율 준수와 깨달음이 결코 둘이 아님을 가르쳐주는 경책으로 다가선다.

출가보살은 물론 재가보살들도 자신의 일상 속에서 그러한 지혜를 갖추고자 노력해야 하고, 그 노력은 거꾸로 우리 시대에 맞는 계율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일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서늘함이 옷깃 안으로 스미는 계절에 시간의 무상함과 연결되어 있는 나 자신의 무상함을 제대로 바라보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계율과 깨달음 사이의 깊은 연관성[不二性] 또한 깨칠 수 있게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한국교원대 교수,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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