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9년 감은사지 발굴 현장 모습. 맨 오른쪽이 고 김정기 박사.

우리나라 고고학과 고건축 개척자이자 국립문화재연구소 초대 소장을 역임한 창산(昌山) 김정기 박사가 노환으로 26일 오후 7시 30분에 별세하였다. 향년 86세. 장례는 국립문화재연구소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동국대학교 일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8월 29일 오전 3시 40분이며, 장지는 창녕 선산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하상연 여사와 김병곤 동국대 교수 등 1남 1녀가 있다.

▲ 고 김정기 박사.
1930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6년 일본 메이지대 공학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 일본 도쿄대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했다. 1964년 국립박물관 고고과장을 거쳐, 1969년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실 초대 실장과, 1973년 경주고분 조사단장, 1975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한림대 사학과 교수, 문화재위원회 위원,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발굴조사단장 등을 역임했다.

고인은 일제에 의해서가 아닌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유적발굴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1960년대부터 개발계획으로 인해 대규모 유적발굴이 시행되는 1970년대 유적발굴을 이끌었다.

고인은 1959년 말 우리나라 기술과 인력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유적 발굴인 경주 감은사지 발굴을 주도했다. 1973년 경주 천마총 발굴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독대해 개발과 문화유산 보존의 조화를 언급할 정도로 신념이 강했다.

고인은 1975년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실(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초대 소장 재임 시절 황남대총과 황룡사지, 안압지 등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경주지역 유적 대부분을 비롯하여 익산 미륵사지 등 중요한 발굴 사업을 진두지휘하였다. 뿐만 아니라 현장고고학과 건축학의 기초를 세워 일제가 아닌 자생적인 학문의 토대를 구축하였으며, 후학 양성에도 이바지했다.

한국 고고학과 고건축학의 산증인이었던 고인은 동료, 후배, 제자들과 40여 년에 걸쳐 유적발굴과 연구에 매진하였으며, 국립문화재연구소 퇴임 후 연구발전 격려를 위해 창산문화재 학술상을 마련하는 등 인재양성에도 꾸준히 애정을 보였다.

고인은 얼마 전부터 자신의 일대기를 비롯해 앞으로 학계의 역할과 방향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고 있었다. 주요저서로《한국의 유적을 발굴한다》(1977),《한국의 고건축》(1980) 등이 있다.

한편, 정부는 고고학과 고건축 분야 개척과 우리나라 방식의 문화재 발굴조사를 이끌면서 문화재 전문 인력 양성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8월 28일 고인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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