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타고라스(왼쪽)와 소크라테스.

1. 아테네 민주주의

기원전 5세기를 전후로 그리스는 당시 가장 강력한 제국 페르시아의 공격을 받았다. 페르시아는 다리우스와 그의 후계자 크세르크세스로 이어지며 세 번에 걸쳐 대대적으로 그리스를 공격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스의 승리는 살라미스 해전처럼 상당한 행운도 있었으나, 도시국가들의 연합된 힘이 가장 컸다고 하겠다. 당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뭉쳐 페르시아의 대군에 맞섰고, 이 연합은 전후에 델로스 동맹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동맹은 아테네에 황금기를 가져다주었다. 동맹의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한 막대한 자금이 아테네로 들어왔고, 이 돈은 아테네의 경제와 문화를 한껏 고양시켰던 것이다. 그 위에 아테네 민주주의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그 과정에 페리클레스(BC 495?~BC 429)라는 뛰어난 지도자의 리더십이 있었던 것도 물론이다.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해 페리클레스는 다음과 같이 찬양했다.

“우리 정부의 형태는 다른 국가의 제도와 경쟁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정부는 이웃 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웃 나라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치 체제는 민주주의에 해당되는데, 그 까닭은 권력이 소수가 아니라 다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적인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동등하게 법의 적용을 받습니다. …… 국가에 봉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난 때문에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공공 생활이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보장되고, 일상생활에서 서로가 불신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의 이웃이 각자 나름대로 살아간다고 해도 그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비록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불쾌한 표정마저도 짓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생활은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지만, 공공질서를 존중하는 정신이 지배하고 있습니다.”1)

아테네 민주주의의 탄생은 실로 경이롭다. 비록 여자와 외국인은 빠진 불완전한 것이라고 폄하되기도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주저 없이 꼽힐 것이다. 헤겔은 “역사는 발전하며 발전은 자유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하였다. 때로 부침도 있고 퇴보도 있었지만, 크게 보아 헤겔의 말처럼 자유가 확대되고 민주주의가 확산되는 방향으로 역사가 전개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세계의 대부분 국가가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하고 있는데, 이런 현상이 서구의 근대 민주주의에 힘입은 바 크고, 그 뿌리는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로부터 흘러 내려온 것이다. 민주주의야말로 동양에서는 생각조차 못한, 서구 문명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된다.

2. 철학의 탄생, 소피스트의 등장

프로타고라스(BC 485?~BC 414?)는 페리클레스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의 사상이 페리클레스의 정치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철학이 당시의 사회상을 상당부분 반영한다고 볼 때, 얼마간의 영향력 또한 분명이 작용하고 있었으리라고 추측할 수는 있겠다.

“나는 신들이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하지 않는지 모른다. 신들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을 어렵게 하는 방해물은 수도 없이 많다. 이 문제는 너무나 불명확한데 비해 인생은 짧다.”2)

프로타고라스의 이 말은 그를 무신론자로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말이 무신론의 근거가 되는지는 더 따져 봐야할 문제이다. 먼저 그리스어로 신을 의미하는 테오스(theos)란 말은 본래 형용사처럼 쓰였다.3) 예컨대 “아름다움은 신이다”란 말은 “아름다움은 영원하다”란 뜻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뭔가 영원하고 변치 않는 것을 신, 혹은 신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이런 이해를 배경으로 프로타고라스의 이 말을 분석한다면, 아마도 “나는 사물이나 자연에 내재해 있다고 하는 영원히 변치 않는 어떤 존재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그 영원불변한 존재를 알려면 경험의 문제 등 많은 난관을 극복하여야 하는데 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신적인 어떤 것을 알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다.”라고 독해될 수 있겠다. 고르기아스의 “진리(존재)는 없다. 있다 해도 알 수 없고, 안다 해도 전할 수 없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것이다. 즉 영원불변하는 어떤 것이 자연 속에 내재해 있다고 확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태도가 불가지론(不可知論)인 것은 맞지만, 무신론이라고 단장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여튼 불가지론은 필연적으로 회의주의로 나아간다. 우리는 현재 회의주의라는 말에서 얼마간 어둡거나 혼란스러운 느낌을 받는데, 본래 회의주의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고대 그리스는 다신교 사회였다. 올림포스 산에는 제우스를 비롯한 12신이 살고 있었고, 그 외에 무수히 많은 신과 요정들이 곳곳에 존재했다. 인간의 삶은 이들 신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서 결코 분리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는 신과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우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들이 각각의 길로 나뉘게 된다. 철학은 그 지점에서 탄생한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BC 624~BC 545)는 우주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인간이 만물의 근원을 신이 아닌 다른 데에서 찾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자연을 더 이상 종교적인 것에서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로 탐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신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나가는 지점에서 철학이 탄생한다. 신, 혹은 어떤 신적인 것을 배제하고 우주자연을 그 자체로 사색했던 초기의 철학자들을 그리스 자연철학자라고 부른다. 이들의 주된 사색의 대상은 만물의 근원, 즉 아르케(arche)였다. 그 사색의 결과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탈레스), “만물의 근원은 불이다.”(헤라클레이토스), “만물의 근원은 원자이다.”(데모크리토스) 등등의 주장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색과 논쟁의 세월이 흐른 후, 더 이상 만물의 근원을 찾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철학자들도 나오게 된다. 소피스트(Sophist)들이다. “신들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프로타고라스의 말도 영원불변하는 어떤 근원적 존재에 대한 사색으로 더 이상의 시간낭비를 하지 않겠다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오로지 자신의 삶에 충실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제 철학의 관심은 “인간이란 누구이며, 행복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에 답하는 과정으로 전환되었다. 결국 신과 자연과 인간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인간의 관심은 오로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는가?”에 맞춰졌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4)

프로타고라스의 유명한 이 말에서 인간은 개인이다. 개인 하나하나가 우주의 중심이고 진리의 기준이다. 그 어떤 진리나 그 어떤 도덕도 개인에게 종속된다. 동양에서는, 중국이든 한국이든, 일본이든 인도든, 보통 사람들은 차마 꿈꿔보지 못한 생각이다. 수천 년 동안 동양인은 자유로운 개인이란 생각을 차마 하지 못했다. 위로는 부모가 있고, 아래로는 자식이 있다. 수없이 많은 관계망 속의 한 요소로서 내가 있을 뿐, 그 관계의 사슬을 끊고 뛰쳐나갈 생각을 차마 하지 못하였다. 어버이로서 자식으로서, 지아비로서 지어미로서 각각 지켜야할 도리(道理)가 있었고, 그 도리는 말 그대로 윤리(倫理)였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따라야 할 도덕법칙이었던 것이다. 불교 같은 몇몇 혁명적인 사상이 보편적 도덕법칙이나 절대적 진리관을 부정했지만, 그 대가는 혹독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승려는 천민이었고, 그들은 사대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조선시대보다도 훨씬 오래전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는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하며 개인의 행복을 최고선으로 인식하였다. 민주주의는 개인주의에 기초한다. 개인 한 명 한 명의 생각과 판단을 존중해야만 민주주의는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프로타고라스의 선언은 개인주의의 완성으로 읽힌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개인의 생각과 견해에 절대적인 존경을 표한 것이다.

개인주의는 상대주의를 기본적인 속성으로 삼는다. 나의 생각과 너의 생각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 다름을 인정할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가능해진다. 내 생각이 옳고 나와 다른 너의 생각은 틀렸다는 관념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민주주의는 성장하지 못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상대주의가 넓게 퍼져 있는 토양 위에서 민주주의는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3. 소크라테스의 절대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대주의가 매우 못마땅하였다. 그들은 진리는 절대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따지고 보면 이들의 말이 틀리지 않다. 진리라는 말이 가능하려면 절대적이어야만 한다. 오늘은 진리였다가 내일은 아니거나, 오늘은 이것이 진리였다가 내일은 저것이 진리라면 이를 진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진리라면 당연히 오늘도 내일도, 백만 년 전이나 천만 년 후나,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아야 할 것이다. 보편성과 절대성은 진리이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졌던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소크라테스(BC 469?~BC 399)이다.

소크라테스는 석공(石工)인 아버지와 산파(産婆)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비록 석공이었지만 귀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아버지를 따라 석공 일을 하면서 그리스의 다른 청년들처럼 기하학과 철학을 배웠다. 군에 입대하여 세 번이나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BC 406년에는 평의회 의원이 되어 정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소크라테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아테네가 몰락하던 시기였다.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장기간에 걸친 전쟁은 아테네의 몰락을 재촉하였다. 나라는 기울고 체제는 혼란스러웠다. 그 어느 때보다 객관적이며 보편타당한 기준이 요구되었다. 이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진리란 절대적이며 보편적이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당시 팽배해 있던 진리상대주의의 오류를 논파해 나갔다. 실상 진리나 윤리적 상대주의는 매우 불량하다. 나도 옳고 너도 옳다면 무엇이라도 허용될 수 있다. 어제는 이랬다가 내일은 저럴 수 있다면 무슨 일도 할 수 있다. 오늘 결혼을 약속하며 욕망을 채웠다가 내일 약속을 파기한들 이를 비난할 근거가 없다. 이들 상대주의가 도덕적 타락으로 흐르는 것은 명약관화할 것이다. 하여 소크라테스는 분연히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 소크라테스에게 부과된 젊은이를 타락시켰다는 혐의는 매우 부당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타락으로부터 젊은이들을 구해내었다고 상을 받았어야 옳다.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신탁이 있었다. 그는 이 신탁이 옳은지를 검증하기 위해 많은 현자들을 찾았다. 그리고 본인이 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그들은 실상 아름다움이나 선에 대해 모르고 있으면서도 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점이 내가 그들보다 더 현명한 이유일 것입니다.”5)

소크라테스에게서 예컨대 진(眞)ㆍ선(善)ㆍ미(美)는 영원히 변치 않는 어떤 본질이다. 오늘은 선이었는데, 내일은 불선이라면 이를 참다운 선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아름다움 또한 영원히 변치 않는 것임에 틀림없어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무지의 자각은 영원불변한 진리가 있다는 확신의 다른 표현이며 상대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끊임없이 신의 소리를 들었다. 그는 《변론》에서 자신은 다이몬(daimon)의 소리를 듣는다고 밝히고 있다. 다이몬은 신적인 것, 혹은 신령스런 어떤 것이다. 다이몬의 소리는 흔히 양심의 소리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영원불변한 존재에 대한 자각이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하게 하는 언표이다. 양심에 의한 자각이든, 영혼의 깨달음이든,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는 믿음 위에서만 진실로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논리는 소크라테스를 존재하게 하는 이유였다. 이런 믿음과 깨달음을 기반으로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다. 마치 등에가 소잔등을 물고 또 물어 소로 하여금 쉼 없이 꼬리를 흔들게 하는 것처럼, 아테네 시민들을 흔들었다. 이런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소크라테스를 위대하게 만든 건 절대를 향한 열망, 보편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 열망과 투쟁이 타고난 천성에서 비롯한 것이든 깊은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든, 사실상 당시의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성숙한 민주주의 체제에서라면 소크라테스의 절대론조차 하나의 상대적 의견으로 수용될 수 있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 당시의 체제는 체제에 비판적인 의견까지 용납할 만큼 너그럽지 못했다. 어찌되었든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당하게 맞섰고 기꺼이 독배를 마셨다. 이런 선택은 당연한 것이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피하고자 탈옥을 감행했더라면 그가 평생을 두고 싸우며 쌓아왔던 깨달음을 송두리째 허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어느 쪽이 더 좋은지는 오직 신만이 알고 있습니다.”6)

그렇게 소크라테스는 기꺼이 죽음을 택하였다. 그는 죽음으로써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정말로 그런 진리가 있는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를 거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그를 누구보다도 존경해 마지않았던 제자 플라톤은 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적이 되었다.

사족 : 독배를 마시는 날, 소크라테스는 친구와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 그의 아내 크산티페가 울부짖자 제자를 시켜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낸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죽음에 직면해서 부녀자들을 밖으로 나가게 했다.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딸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그들에겐 임종할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어련할까, 여자들에겐 이름조차 없었으니. 그들은 그저 누구의 딸, 혹은 누구의 어머니로서만 존재할 따름이었다. 크산티페는 그 이름이라도 전해지는데, 아테네가 그나마 민주주의 체제였기에 가능했던 건 아닐까. 누구라도 소크라테스처럼 못생기고 무책임한 사내를 남편으로 두었다면 악처가 안 되는 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주) -----
1) 투키디데스(Thucydides),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2) 프로타고라스, 《신들에 대하여》
3) W. K. C. 거드리, 박종현 옮김, 《희랍철학입문》
4) 플라톤, 《대화편》 〈테아이테토스〉
5) 위의 책, 〈소크라테스의 변론〉
6) 위의 책, 〈파이돈〉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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