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 스님은 생명은 물질과 허공보다 먼저 존재하여 결국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면서 이를 시(詩)로 표현하고 있다. 스님이 바라보는 생명의 출발점은 곧 나이며, 내가 곧 생명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생명은 나만의 생명이 아니라, 천지 만물의 바탕이 된다. 즉, 생명은 우주이며, 우주가 생명이다. 따라서 나와 우주도 하나가 된다. 하나이므로 곧 나는 내 생명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우주의 주인이기도 하다고 설한다. 결국은 하나의 생명적 근원으로 귀일(歸一)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은 불멸한다. / 생명은 자유하다. / 생명은 천지 만물의 바탕이다. / 생명은 곧 나다. 나는 곧 생명이다. / 그러므로 / 나는 불멸의 것이다. 나는 자유의 것이다. / 나는 우주의 주인공인 것이다. / 생명은 유무와 선악을 초월하였다. / 그러므로 만 가지! 다- / 생명으로부터 일어난다. / 왜 나는 선악과 시공과 유무가 아니며 / 또한 천지 만물의 바탕이 / 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 그러한 까닭으로 / 나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 나는 절대로 구속할 수 없다. / 그리하여 나는 만 가지를 거두기도 한다.

생명은 유무(有無)와 선악(善惡)과 시공(時空)을 초월한다고 인식한다. 청담 스님에게 있어 생명은 인간의 대상일 뿐 아니라 문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생명적 대상을 불교적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불교적 인연설과 초월적 해탈론을 포함한 선시(禪詩)를 통해 결국은 마음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천지만물의 바탕이 되는 내〔我〕가 모든 것을 초월한 중도(中道)와 무(無)와 부처님의 세계, 즉 공(空)에서 생명의 근원을 찾고 진여(眞如)의 세계, 즉 묘유(妙有)를 발견하고자 했다. 유무의 상대성을 초월한 절대 무(無)와 진공(眞空)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시공을 초월한 무와 부처님의 세계까지 긍정하는 진여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또한 선악과 유무와 시공을 초월했음을 설함은 생명과 하나 됨을 중도의 원리로 해석했다고 유추 할 수 있다.

생사(生死)가 없는 존재는 생명

수행의 차원에서 볼 때 중도는 쾌락에 몰두하는 태도와 무익한 고행을 일삼는 태도를 부정하는 실천의 방법이다. 개념의 차원에서 볼 때 중도는 사물과 삶이 불변하는 실체라는 생각과 전혀 존재하지 않는 허무라는 생각을 부정하는 인식의 방법이다. 청담 스님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절대로 구속할 수 없는 존재인 생명을 마음으로 보았고 이것이 중도의 세계요 깨달음의 세계임을 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청담 스님은 다음 시(詩)에서 몸과 마음의 통합체로서의 생명존재에 대한 놀라운 절대긍정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뚫어지게 바라보라. / 이 한 송이 꽃이 지닌 / 생명의 거룩함을. / 골똘히 생각하라. / 이 한 송이 꽃이 지닌 / 그 뜻의 심오함을. / 그리고 조용히 자신에게 물어 보라. / 단 한 번밖에 없는 이 인생을 /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를. / 자신에게 허용된 / 오직 하나뿐인 거룩한 생명을 / 그 목숨 있을 때까지 / 다 바쳐 올바른 틀 속에서 / 참마음과 용기를 가지고 / 주어진 사명을 성취하고 / 모두 함께 힘을 합쳐 / 원만한 가정, 명랑한 사회를 / 이루어 가는 최선의 인간이 되고 싶도다.

스님은 꽃을 보면서 생명의 신비와 존귀함을 발견한다. 무상(無常)이나 부정을 통해 생명의 유한성을 극복하고자 하기 보다는 작은 식물 하나에서 생명의 신성함을 찾고, 그것을 ‘나와 인간’으로 유추한다. 생명이란 차원에서는 꽃이든, 나이든 다를 바가 없다. 인식의 능력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 인식의 능력차라는 것도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우월해 보일 뿐일 수도 있다. 꽃이든 인간이든 소중하게 주어진 이 생명을 거룩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키워나가자는 생각은 불교의 초월적 사유의 전통과는 사뭇 다른 현실적인 감정을 보이고 있다.

앞의 청담 스님 시에서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에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화엄경》)는,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一切唯心造〕’라는 유심(唯心)사상과 ‘여러 가지 꽃과 나무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정원’의 화엄회상(華嚴會上) 등 다양성과 통일성, 보편성과 특수성을 볼 수 있다.

불교는 대체로 미망(迷妄)에 사로잡인 뭇 생명(중생)들의 생사세계가 고통과 번뇌로 점철(點綴)되는 윤회 세계임을 알리며, 생사의 고통과 윤회로부터의 해탈 및 열반으로 상징되는 영원한 생명의 깨침과 극락 세계에 도달할 방법을 가르친다.

불교가 뭇 생명을 구제하는 데에 근본적인 목적을 두고 성불과 불국정토 실현을 궁극적 목표로 삼아, 생명을 주체로 하여 완전한 살림살이가 가능한 세계를 지향하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사회 대중에게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보살행을 권하고 있다.

생명이 경시되고 갈등과 불화가 팽배한 현대 사회인들에게 모두 평등하게 공존 상생하는 연기론적 자각과 평화문화를 함께 가꾸어 나아가야 생명의 존귀성 알 수 있다. 자연환경과 사회도 우리들 공동업의 결과이며 우리의 의지적 노력으로 기존의 병폐를 치유하고 개선할 수 있다는 불교의 업설(業說)에서 현재 우리가 당면한 사회문제들을 주체적으로 풀어 나갈 수 있다. 탐욕과 무지로 말미암은 위험한 질주를 막고 차분히 마음을 맑혀 우리들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진지하게 가다듬어야 한다. 자비와 평화가 충만한 본래의 완전한 인간성 회복과 건전한 생활을 위하여 우선 참선, 즉 마음공부가 시급하다. 때와 장소를 가릴 것 없이 어느 상황에서나 자기 마음을 안정하고, 존재와 삶의 궁극적 물음인 참 생명과 평화 구현에 대한 화두참구를 통해 일상생활과 참선이 하나 되는 불이선(不二禪) 수행에 정진하여야 한다.

깨달음과 중생의 현실을 동시에 아우르는 상황적 인물인 보살은 중생을 지혜와 방편으로 이끌며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갖고 평화로운 사회를 실현하려는 서원을 갖고 있다. 오늘날 우리 세상에서도 바람직한 인격실현과 이상세계 건설의 주역은 보살이 될 수밖에 없다. 청담 스님은 원만한 가정, 명랑한 사회를 이루어 가는 최선의 인간이 되고 싶다고 보살행 실천을 발원하고 있다.

파격(破格) 속에 보살심이 있어

보살은 모든 생명체들뿐만 아니라 무생물까지도 불성이 내재한 존재로 보고, 그 아름답고 훌륭한 참 모습과 능력을 깨닫고 발현(發現)하도록 일깨우며 그 조건을 마련해 나간다. 각각의 보살들은 모두 자신들을 포함하여 모든 중생들이 평안(平安)과 해탈(解脫)을 성취하도록 하기 위해 깨침과 자비를 통한 보편적 목적과 더불어, 특수한 수행 원력과 권능(權能)을 보여준다. 생명과 평화에 원력과 권능을 가진 보살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생명 혹은 평화보살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만공(滿空) 선사로부터 정통 선(禪)을 전수받았던 청담 스님이 구사한 구도 문학의 표현은 자못 파격적이었다. 제목이 따로 없이 그림과 함께 남아 전하는 한글 시(詩)가 그 단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부처님! / 세배 올립니다. / 새해는 복 많이 받으세요. / 저희 돼지들은 / 복쯤은 빌지 않겠습니다. / 구정물이나 썩은 오물쯤이면 / 만족 대만족! 이니까요 / 좋은 것은 다 남 줍니다. / 주다 주다 모자라면 / 이 몸 통째로 시주도 합니다요! / 우리 부처님도 / 대자대비 하시니까 / 꼭 우리들 / 돼지 닮았군요. / 그래서요 모든 중생들이 / 우리 돼지꿈만 꾸면 / 온갖 소원을 다 성취한답니다요. / 몸을 통째로 시주하는 공덕인가 봐요 / 여보게 돼지 친구들! 그대들이 / 부처를 돼지로 보는 것이 정말로 / 그럴 성 하도다.

많은 선사들의 문학 활동은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한시(漢詩)의 형식을 애용할 뿐만 아니라, 거의 전용하다시피 하고 있다. 이와 다르게 청담 스님이 구사한 형식은 전통적인 가사체를 쓰기도 하였으나, 한글자유시를 다양하게 활용하였고, 한시의 형태도 사용하였다. 현재 남아 전하는 작품의 형태는 한글 자유시가 압도적으로 많고, 그 표현도 매우 자유분방하다. 구어(口語)와 문어(文語)의 틈을 최소화시키는 강력한 어조의 표현, 즉 선적(禪的) 표현을 스님은 즐겨 사용하였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거칠게 느껴지기도 한다.

부처님이 돼지하고 똑같다니, 언뜻 들으면 엄청난 불경죄를 저지른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한 줄 두 줄 읽어나가다 보면 무릎을 치며 감탄을 하게 된다. 아, 정말 부처님은 돼지와 같은 존재로구나. 아니, 돼지가 부처님처럼 거룩한 존재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엄청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말 그럴 성하다. 좋은 것은 남 다 주고 더러운 것만 골라 먹지만, 그것마저도 모자라면 자기 온 몸을 바치니 얼마나 거룩한가. 더구나, 세상 사람들이 불교를 믿으면서 복을 빌기에 바쁜 세태를 꼬집기도 한다. 복(福)을 추구하지 않고, 남이 버리는 더러운 것만 먹으면서도 스스로 늘 만족하고 남도 행복하게 해 주는 돼지야말로 부처님의 심성을 그대로 닮은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청담 스님의 걸림이 없는 자유분방한 선풍(禪風)을 엿볼 수 있다.

연기(緣起)·공(空)의 도리 설해

청담 스님은 “견성(見性)한 승려들은 대게 게송(偈頌)을 지어 해탈의 깊이를 나타내는 법인데, 나는 그것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철저하게 미혹을 쫒아내려고 버둥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날 내가 지은 게송을 받고 싶다고 한 동료가 어떻게나 심하게 조르던지 그것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부득이 오도게송(悟道偈頌)을 읊었다고 술회한다. 이 게송에는 나·마음·생명·진리 등이 하나로 된 경지와 이를 깨치어 실천하는 삶이 그대로 응축되어 있고, 그로부터 본격화되는 당신의 불교생활이 함축(含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부터 모든 불조(佛祖)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
어찌 현학(衒學)의 이치를 깨우쳤겠는가?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길가 고탑(古塔)이 서쪽으로 기울었다 하리.

우리는 선사의 오도게송을 이렇게 읽기는 하나, 그 높은 경지와 깊은 뜻, 그 선언적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우리의 지혜와 도심이 그 실상은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담 스님이 말한 모든 불조(佛祖)가 어리석은 것은 실제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깨달음의 마지막에 도달했다는 가슴 벅찬 선언의 결정체(結晶體)다. 그러면서 현학(玄學)의 이치를 깨우치지 못했다는 겸손함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 누구라도 능한 것을 묻는다면 자신 있게 깨달음 경지를 말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보이고 있다. 마지막 게송에서 청담 스님은 오래된 탑신이 서쪽 노을 속에 기울어져 있다고 한 것은 새로운 내 자신이 동트는 하늘 앞에 있다는 것을 내 보인 것이라 볼 수 있다. 오도게송에서 스님은 수행자로서의 겸손과 선사(禪師)로서의 자신감, 그러면서 마지막이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고 걸림이 없는, 막혀 있으면서도 뚫어져 있고 뚫어져 있으면서도 막혀 있는 중도(中道)사상으로서 연기(緣起)·공(空)의 도리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 파격적인 시적 표현은 ‘동산 스님 영결식 법어’에서도 알 수 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 큰 법당(法堂)이 무너졌구나. / 어두운 밤에 횃불이 / 꺼졌구나. / 어린 아이만 남겨 두시고 /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셨구나. / 동산(東山)이 물 위에 떠다니니 / 일월(日月)이 무광(無光)하도다. 억! / 봄바람이 무르익어 / 꽃 피고 새가 운다.

선사로서의 삶을 견지(堅持)했던 청담 스님이 시를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큰 법당이 무너졌구나!’로 시작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으로서의 가장 애통(哀痛)함을 감정을 넣어 표현하고 있으며 한국불교의 큰 선지식(善知識)을 잃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중생들의 어두운 밤길〔無明〕에 등불이 되어주었던 동산(東山) 스님의 열반(涅槃)을 간단명료하게 모든 뜻을 담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 ‘어머니’라는 단어를 써가며 친근하게 중생들의 공허함을 달래고 있다. 그러면서 ‘동산이 물 위에 떠다닌다.’고 설한 것은 그 마음의 법계(法界)와 합일(合一)되어 그 법을 이어 펴겠다는 서원(誓願)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일월이 무광하도다. 억!’이라고 한 것은 선사로서의 기질과 진면목을 보인 것으로 동산 스님이 된 청담 스님이 그 광명을 되살리는 파격적 서원이요, 선언이다. 그 마무리에 ‘봄바람이 무르익어 꽃이 피고 새가 운다.’라고 한 것은 참된 활구(活句)로서 무한히 깊고 높은 뜻이 함장(含藏)되어 있다.

말·글에 걸림 없는 마음 도화사(道化師)

부처님의 마음이 선(禪)이고 말씀이 교(敎)라면 《마음의 노래》는 곧 선지(禪旨)를 담은 명상시(瞑想詩)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선사들의 이심전심(以心傳心) 법문은 말과 글을 온전히 떠난 진리이다. 그러므로 무슨 시적인 우아한 속취(俗趣)마저도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빼어난 선시라도 그것은 이미 선(禪) 그 자리를 떠나 있으며, 잠시 시의 품에 깃들여 있을 뿐이다. 역대 조사나 선사들의 활구(活句)와 게송이 선시(禪詩)이자 명상시 아닌 것이 없으면서 속된 문학의 장르에 머물지 않는 것은, 시의 세계보다 마음의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청담 스님은 대중적 설법에서 아주 재미있고 감명 깊은 법화(法話)를 강설·구연하면서 자작 게송이나 시가를 삽입·가창하는 사례가 상당히 있다. 그러기에 《마음의 노래》도 생전에 다양한 부분에 활용되었던 게 사실이고, 열반 후에는 제자·법손들과 뜻있는 신도들이 유훈(遺訓)에 따라 이를 교화의 방편으로 책으로 묶어 낸 것이라 본다.

청담 스님은 오늘날 읽어도 조금도 시대차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평범한 일상어를 사용하면서도 파격적인 형식과 내용을 통해 선(禪)의 묘리(妙理)를 전달하고 불타의 가르침을 삶 속에 구현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우주와 생명, 과학의 측면에서 불교와 선의 이치를 풀어내는 안목과 표현에서 시대를 한참 앞서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승려 시인들이 현란한 수사(修辭)를 동원하고 있는 데 반해 평범하면서도 더욱 현대화된 표현 속에서 유구(悠久)하고 심오(深奧)한 불교와 선의 이치를 담아내고 있다. 청담 스님의 문학세계는 그 이전의 한글가사의 전통을 살리면서 동시에 한글자유시의 전통을 창의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또한, 불교와 선의 이치를 현대적이자 일상적이며, 동시에 선사다운 파격적인 표현으로 일구어 내었다는 점에서 크나큰 성취가 있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스님은 불타오르는 마음의 대장경(大藏經)을 시적인 노래로써 펼쳐 보인다. 보살행의 거울이 되는 신앙의 디딤돌을 우리 중생들 가슴마다에 심어주고, 독특한 선풍을 통해 쉽고 친근하게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청담 스님의 《마음의 노래》에는 믿음의 길 따라 인간의 진심(眞心)을 찾는 그윽한 외침과 솟구침을 들을 수 있다. 청담 스님은 시인(詩人)이 아니다. 말과 글에 걸림이 없는 선사이며, 마음의 도화사(道化師)이며, 실천불교의 개혁적 수행자이다. 그렇기에 시(詩) 이상의 것이거나 그 이하의 것이거나에 관계없이 중생을 깨우치는 연꽃을 피워 보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방남수 | 불교문예학 박사, 평택 청담고등학교장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