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 방외지사(方外之士) 방내지사(方內之士)

죽음은 인간이 존엄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인간은 죽음을 통해 동물과는 다른 차별성을 얻고, 신조차도 누릴 수 없는 삶의 환희를 맛볼 수 있다.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위대하며 존엄할 수 있는 바탕이다. 그 위에 인간은 위대한 문명을 건설하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 죽음은 지극히 가볍고 하찮다.

장자(莊子)가 죽을 때가 되자 그의 제자들이 장례를 성대히 치를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자 장자는, “나는 하늘과 땅으로 관을 삼고 해와 달로 구슬장식을 삼으며 만물로 문상객을 삼을 것이다. 내 장례에 모든 게 다 갖추어졌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이냐?”라고 하였다.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선생님의 시신을 까마귀나 솔개가 먹을까봐 두려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자가 다시 말하였다.

“땅위에 두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되고, 땅 밑에 묻으면 개미와 땅강아지의 밥이 되는 것이다. 저쪽에서 빼앗아 이쪽에 주면 불공평한 것 아니겠느냐?”1)

조장(鳥葬)을 하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되고, 매장(埋葬)을 하면 개미와 땅강아지의 밥이 된다. 장자의 말인즉 어차피 죽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건 똑같은데, 매장(埋葬)은 되고 조장(鳥葬)은 안 된다는 법이 어디에 있냐는 뜻이겠다.

장자의 아내가 죽었을 때의 일이다. 혜시(惠施)가 조문을 갔는데 장자는 마침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시가 책망하자, 장자는 말한다.

“나고 죽은 건 마치 춘하추동이 바뀌는 것과 같네. 아내는 천지라는 큰 집에 누워 편히 쉬고 있으니 내가 울고불고 따라 곡한다면 이는 천명을 모르는 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쳤다네.”2)

장자에게서 죽음은 참으로 가볍다. 마치 봄이 왔다가 여름이 되고 다시 가을이 오는 것처럼, 때가 되면 왔다가 때가 되면 가는 것이 인생이고 죽음이다. 그러니 죽었다고 하여 시끄럽게 호들갑떨 이유가 없다. 장자와도 같은 사람들에게 두 겹 세 겹 관곽(棺槨)에 시신을 넣고 다시 거대한 봉분으로 덮는 장례는 가장 쓸데없는 짓일 터이다.

자상호(子桑戶), 맹자반(孟子反), 자금장(子琴張), 이 세 사람은 막역한 친구들로 자유롭게 놀며 지냈다. 그러다가 자상호가 먼저 죽었는데. 남은 친구들이 장사를 치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공자(孔子)가 자공(子貢)을 시켜 장례를 도와주도록 하였다. 자공이 가보니 한 사람은 곡을 만들고, 한 사람은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하는 것이다. 자공이, “시신을 앞에 놓고 노래하는 것이 예입니까?”라고 하자,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으며, “이 사람이 어찌 예를 알겠는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자공이 돌아와 공자에게 이런 사실을 아뢰었다. 공자가 말하였다.

“저들은 방외(方外)의 사람들이니라. 나는 방내(方內)의 사람이니, 예법(禮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예법의 안과 밖은 서로 관여하지 않는데 내가 괜히 너를 보냈다."라고 하였다.3)

방외지사(方外之士)란 예법의 틀 밖에서 노는 사람을 의미한다. 장례를 비롯한 모든 통과의례는 다 예법이다. 방외지사들은 이런 예법을 무시한다. 이들은 예법을 비틀고 조롱한다. 왜 그럴까? 시선을 돌려 예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사는 사람들, 즉 방내지사(方內之士)를 바라보자.

증자(曾子)가 병이 들어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제자들을 불러 말했다.

“나의 손과 발을 보아라. 《시경》에 ‘전전긍긍(戰戰兢兢), 깊은 연못을 대하는 듯, 얇은 얼음을 건너는 듯’이라고 하였는데, 이제야 나는 그 막중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구나.” 4)

증자가 손발을 열어 보인 이유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게 보존된 몸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유교에서 내 몸은 부생모육지은(父生母育之恩), 아버님은 낳으시고 어머님은 기르신 은혜가 집결된 곳이다. 따라서 내 몸을 잘 보존하는 것은 효(孝)의 첫째이다. 효자 증자는 몸에 혹 상처라도 생길까봐 마치 깊은 물을 건너고 얇은 얼음판을 걷듯 전전긍긍하며 평생을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죽음은 증자에게서 일생의 과업으로부터 해방이기도 하다. 《논어》에는 다음과 같은 증자의 말이 전한다.

“선비란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仁)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으니 무겁지 않은가? 또한 죽은 다음에야 끝나니 멀지 않은가?”5)

삶이라는 먼 길을 그토록 무거운 짐을 지고 마치 깊은 강을 건너고 얇은 얼음 위를 걷듯, 그렇게 조심하며 살아야 하는 게 방내지사의 삶이다. 자칫 한 발자국 잘못 디딜까봐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하는 게 이들의 삶이다.

영화 《다크나이트》에 브루스 웨인이 스스로 배트맨임을 밝히기로 결심하는 장면에서의 일이다. 이 밤이 새면 배트맨은 어쩌면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거나, 아니면 모든 악당들의 표적이 되어 죽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랑하는 여인 레이첼과 보내는 마지막 밤일지도 모른다. 그 밤에 우리의 영웅 배트맨은 레이첼과 가벼운 키스를 나누고 작별한다.

이게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사는 인생이다. 행여 조금이라도 잘못될까봐, 내가 잘못되거나, 사랑하는 여인이 혹 다치기라도 할까봐,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스스로의 욕망을 억제하고 행동을 단속하는 것이다. 예법은 욕망을 억제하고 행동을 규제하는 기준이다. 방내지사는 이런 예법을 지키며 예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 안에서 존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2. 소크라테스의 죽음, 에피쿠로스의 삶 

다비드가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기 직전의 소크라테스를 그린 것이다. 죽음을 앞에 두고 소크라테스는 매우 당당하다. 이 당당함은 70세 노인을 어떤 젊은이보다도 더 젊게 그린 다비드의 농간(?)이 많이 작용해서겠지만,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이란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해방이다.”6)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앞에 두고 그의 벗들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파이돈》에 나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에게서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음은 영원한 세계로 가는 문이다. 육체 속에 갇혀 있던 영혼이 드디어 해방되어 영원히 변치 않는 저 세계로 가는 게 죽음이다. 그러므로 죽음이야 말로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목적이다.

진리란 영원불변한 것이다. 어제까지 진리였다가 오늘은 아니라고 한다면 그걸 진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 마주하는 모든 존재는 다 변한다. 끊임없이 변화 유전하는 세계는 참된 세계가 아니다. 참된 세계는 저 세계이다. 오직 영혼으로만 알 수 있고, 오직 영혼만이 도달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유한한 육신으로부터 영혼이 해방되는 게 죽음이라면, 죽음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생각은 고스란히 플라톤에게 전해졌고, 플라톤 철학은 또한 서구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많은 사람들이 신을 위해 기꺼이 순교자의 길을 걷는 이유는 영원한 저 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후예들에게 죽음은 지극한 즐거움이다. 그들은 소풍을 떠나는 어린아이마냥 들뜬 행복감으로 죽음을 기다린다. 죽음은 삶의 목적이자 이유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믿음에 익숙해져라. 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은 감각에 있는데, 죽으면 감각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되면, 가사성(可死性)도 즐겁게 된다. 이것은 그러한 앎이 우리에게 무한한 시간의 삶을 보태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불멸에 대한 갈망을 제거시켜 주기 때문이다. ……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7)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 에피쿠로스(Epikuros)가 한 말이다. 그는 유물론자로, 데모크리토스(Democritos)의 원자론을 계승하였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원자가 모여 생겼다가, 원자가 흩어지면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의 삶과 죽음도 원자가 모였다 흩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좋은 삶이란 사는 동안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누릴 수 있는 쾌락을 최대한 누리다가 가능한 고통 없이 죽는 게 가장 좋은 삶이다.

현명하게 살게나, 포도주를 줄이고 먼 미래의 욕심을 가까운 내일의 희망으로 바꾸게나.
지금 우리가 말하는 동안에도, 질투하는 시간은 이미 흘러갔을 것이라네.
오늘을 붙잡게, 미래에 최소한의 기대를 걸면서8)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붙잡아라!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자주 한 말이다. 흔히 이 순간을 즐기라는 의미로 이해되는 이 시구는 쾌락을 추구하며 살라는 말이 아니다. 영화에서 키팅 선생이 의도한 것처럼 전통과 규율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지향하라는 의미이다.

죽음 이후에 영원한 세계가 펼쳐진다면, 현재의 삶은 죽음을 향한 여정에 불과하다. 현세적 삶이란 오직 죽음 이후의 세계를 준비하고 그 세계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인간이 존엄할 수 있는 이유도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불멸성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죽음 이후의 영원불멸하는 세계가 없다면……, 정말로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면…….

사회체제는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범이 있고 사상이 있다. 사상은 규범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하느님을 믿으며 열심히 산 사람들은 죽어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에 부활한다는 사상은 기독교 계율을 정당화하는 근거이다. 같은 논리로 서구의 합리주의나 동양의 유교는 그 체제의 규범을 정당화하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다른 존엄하며 위대한 존재임을 부각시킨다. 신의 형상을 한 인간, 이성을 소유한 존재, 도덕적 주체 등등의 말들은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 증거는 죽으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에 어떤 사람들은 의심을 품었다. 죽으면 알 수 있다고? 죽어 봐야 알 수 있는 그 무엇을 위해 현재의 삶을 희생하라고? 죽고 난 후에 아무것도 없다면…….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죽음 이후에 어떤 세계가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들에 의한다면 저들은 죽음 이후를 말하며 자유를 억압하고 욕망을 통제하려한다. 이들은 체제가 제공하는 존엄성, 혹은 불멸성을 거짓 아니면 독단으로 이해하였다. 인간이 존엄한 존재가 되기 위해 욕망과 자유를 억압하여야 한다면, 차라리 존엄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자 한 것이다. 그러니 죽어 그냥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된들 무엇이 문제가 되랴. 인연이 되어 생명을 얻었다가 때가 되면 가는 게 인생이니, 사는 동안 즐겁게 살면 되는 것이다. 호라티우스와 도연명(陶淵明)이 만나면 이런 시가 만들어지겠다.

카르페 디엠! 오늘을 마음껏 즐기자. 내일은 내 알 바 아니지.

주) ----------
1) 《장자(莊子)》 〈열어구(列禦寇)〉
2) 위의 책, 〈지락(至樂)〉
3) 위의 책, 〈대종사(大宗師)〉
4) 《논어(論語)》, 〈태백(泰伯)〉
5) 위의 책
6) 플라톤, 전현상 옮김, 《파이돈》
7) 에피쿠로스, 오유석 옮김, 《쾌락》 중 〈메노이케오스에게 보내는 편지〉
8) 호라티우스, 〈송가〉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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