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산에서 학교까지 전철로 출근한다. 출근 시간이 다소 여유로워 앉아서 갈 수 있는 데다 갈아타지 않아도 되는 이점까지 있어 웬만해선 전철을 이용한다. 퇴근해 집에 올 때도 환승역이 연달아 세 군데나 되어 자리에 앉을 기회가 많다. 이십 년 가깝게 전철로 출퇴근하면서도 별 불편을 못 느끼는 것도 복이라 생각하고 늘 감사히 여긴다.


전철 안 풍경이 달라진 것은 스마트폰이 일상화되면서부터일 것이다.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출퇴근 시간의 승객들은 역 플랫폼에 놓여 있는 무료신문을 가져다 읽었다. 그리고 그들이 선반에 놓고 내린 신문을 수거하는 이들이 따로 있어 열차 내부는 항상 깨끗했다. 이른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추느라 간신히 끼니나 때우고 나왔을 직장인들은 열차 안에서 무료 신문을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알 수 있었고, 그들이 읽고 버린 신문을 폐휴지로 수거해 파는 이들에겐 유용한 용돈벌이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하철역에서 무료신문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이른 시간에 간혹 몇 종의 신문이 놓여 있는 걸 볼 수 있지만, 종수나 부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지하철 승객들은 이제 신문 대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하거나 게임을 하며 목적지로 향한다. 전철 좌석은 일곱 명이 앉을 수 있게 설계되어 있는데, 출퇴근 시간의 승객들 대여섯 명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한두 명은 부족한 잠을 보충한다. 갑작스레 책을 보는 승객이 늘어나면 대학의 시험 시즌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이후 현대인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본다. 그들은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뿐만 아니라 길을 걸으면서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심지어 운전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스마트폰 화면을 힐끔 거린다.

스마트폰은 단순한 전화기가 아니다. 그것은 작지만 놀라운 성능을 지닌 컴퓨터로, 그것을 통해 우리의 일상적 삶의 많은 부분이 처리된다. 스마트폰으로 뉴스나 지식 등을 검색하는 경우는 드물고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나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한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보고 있지만, 신문이나 책을 볼 때와 달리 깊이 사고하지는 않는 것 같다.

서구 르네상스 이전에는 청각이 가장 중요한 감각으로 인정받았으나, 활판인쇄술과 광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시각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20세기 영상기술과 문화의 놀라운 발전에 따라 시각은 모든 감각에 우선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현대는 가히 시각문화의 시대라 할 만하다. 실제로 현대사회는 무진장한 볼거리의 홍수와 범람에 익사할지 모른다는 농담이 들릴 정도로 엄청난 영상이 매일같이 양산된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아름답고 충격적이고 감동적이기까지 해서 관객들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끈다. 사람들은 그 강력한 이미지에 현혹되어 그저 화면을 바라볼 뿐,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보고 안다는 것은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것을 뜻한다. ‘견성(見性)’이란, 단순히 자신의 성품을 본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알아 깨닫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보다[見•觀]’란 단어 속에는 시각활동 외에 정신활동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현대인은 ‘스마트폰 보기’ 매력에 빠져 생각하기를 잊은 것 같아 걱정스럽다. 사물의 영상(映像)에 현혹되어 파멸에 빠진 예화는 옛이야기에 숱하게 전해 내려온다.

잠시도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대인은 달마가 굳이 벽을 바라보고[壁觀] 참선에 든 이유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잖아도 번잡한 출퇴근 시간에 현란하고 요사스러운 환영에 정신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잠시 눈감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게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더 좋을 것이다.

나는 요즘 전철 안에서 가급적 스마트폰을 손에 쥐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손은 불시에 스마트폰을 잡는다. 어느 새 나도 스마트폰에 중독되었나 깜짝 놀라 서둘러 손을 빼며 눈을 감는다. 전철 안은 스마트폰과 열애에 빠진 승객들로 조용하기만 하다.

-동국대 문창과 교수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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