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짐승의 무리, 인간의 무리

먹구름이 하늘을 덮은 지 오래되었다. 재앙은 곳곳에서 일어났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신하가 임금을 살해했다. “찬란했던 인간계가 이렇게 사라져야 한단 말인가?” 공자(孔子)는 울분을 참기 힘들었다. 그는 망루에 올라가 징을 쳤다. 징~~ 징~~ 징소리에는 부도덕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그럼에도 어찌하지 못하는 좌절이 실려 있었다.

공자는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분연히 떨쳐 있어났다.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제후가 있다면……. 그렇다면 이 인간계를 지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공자의 뜻을 알아주는 제후는 없었다. 하다못해 대부라도, 아니 가능성만 있다면 누구라도 공자는 만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패권에만 관심이 있을 뿐 공자가 꿈꾸는 세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 장저와 걸닉.
찬란한 문명. 이를 건설한 위대한 인간들의 세계. “빛나고 빛나도다! 이 문화여!”1) 인간들이 만들어 낸 이 문명세계를 공자는 그토록 사랑했다. 그는 이 문명세계를 지킬 수만 있다면 목숨과도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길이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점점 암울해져 가고, 절대 권력을 향한 욕망은 커져만 갔다. 그 도도한 물결이 이미 천하를 덮었다.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 밭을 갈고 있었다. 마침 공자(孔子)가 지나가다 자로를 시켜 나루터 가는 길을 물어보게 하였다. 길을 묻는 자로에게 장저가 되물었다. “저기 수레고삐를 쥔 사람은 누구인가?” 자로가 공구(孔丘, 공자의 이름)라고 대답하자, 장저가 말한다.

“그는 이미 알고 있네.”

자로는 다시 걸닉(桀溺)에게 물었다. 걸닉이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되묻자, 자로는 중유(仲由, 자로의 자)임을 밝혔다. 걸닉은 자로가 공자의 제자임을 확인하고 말한다.

“도도히 흐르는 물줄기가 이미 천하를 덮고 있는데, 누가 그 흐름을 바꿀 수 있겠는가? 그대는 저 사람을 피해 다니는 선비를 따르느니 세상을 피해 사는 선비를 따르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두 사람은 하던 일을 계속하며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 자로는 나루터가 어딘지 알아내지 못한 채 공자에게 돌아와 보고하였다. 공자는 얼굴이 상기되었다.

“새나 짐승과 함께 무리지어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의 무리가 아니면 누구와 함께 하겠느냐? 천하에 도(道)가 있다면 내가 바꾸려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짐승의 무리가 아닌 사람의 무리, 자연계가 아닌 인간계가 공자가 지키고자 했던 세계였다. 위대하며 존엄한 인간이 만든 찬란한 문명세계. 그 세계를 지키고자 공자는 불철주야, 상갓집 개 신세를 감내하며 천하를 주유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막다른 길에 접어든 듯 것만 같았다. 나루터는 도통 보이지 않았다.

2. 인간계의 시작, 죽은 자를 보내는 예(禮)

따지고 보면 나루터는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맹자(孟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 옛날 상고시대에는 장례라는 게 없었다. 부모가 죽으면 시체를 시체구덩이에 버렸던 것이다. 하루는 시체 구덩이를 지나가는데, 부모 시신을 여우와 살쾡이가 파먹고, 남은 시신에 파리와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순간 이 사람은 이마에 땀이 흐르며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었으니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것은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속내가 얼굴에 드러난 것이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삼태기와 들것을 챙겨 시신에 흙을 덮어 주었다. 흙을 덮는 행위가 진실로 옳은 것이라면 효자와 어진 사람이 그 부모를 흙으로 덮는 데에 반드시 도리가 있을 것이다.”

맹자에 의한다면 애초에 시신을 그냥 갖다 버렸는데, 며칠 후 우연히 훼손된 시신을 목도하고,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흙 한 삼태기 퍼다 덮어준 데서부터 장례(葬禮)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별의 슬픔은 동물들도 느낀다. 죽은 어미 곁을 떠나지 못하는 새끼 곰, 죽은 새끼를 며칠이고 엎고 다니는 어미 침팬지……. 동물들 또한 이별이 슬프고, 죽음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그럴 것이다. 그래서 소는 죽음을 앞두고 눈물을 흘리고, 개는 식음을 전폐하기도 하는 것 아닐까. 작은 새도 새끼를 잃으면 시끄럽게 지저귀는데…….

신(神)에겐 장례가 없다. 영원히 죽지 않는 신들에게 무슨 장례가 있겠는가? 장례야말로 인간만의 고유한 것이다. 그러니 자연계에서 인간계로 넘어가는 나루터 어귀에 흙 한 삼태기 퍼 나르던 어떤 사내가 있었던 것이다.

문명은 그렇게 시작된다. 먹고 살만하니까 무덤을 만들고 치장하기 시작한 게 아니다. 얼핏 경제력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장례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삼태기나 들것이 있고, 가래나 호미 같은 기구가 생긴 이후의 일일 수도 있다.

경제와 문명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잉여생산이 문명의 에너지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운전대를 잡고 차를 모는 것은 인간의 의식임이 분명하다. 과연 맹자의 통찰력은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산 자를 기르고 죽은 자를 보내는 데 유감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왕도(王道)의 시작이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 중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일으키는 것보다 더 강렬한 건 없다. 더구나 비참한 죽음이라면……. 처자식이 굶어 죽어 가는데도 어찌하지 못하고, 그렇게 죽은 시신을 봉분 하나 살 돈이 없어 한 줌 재로 산에 뿌리고 돌아와야 한다면……. 인간의 존엄성이 추락하는 건 한순간의 일이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이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들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이렇게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었고, 시신들을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채 개와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것에 대한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노래하며 시작한다. 여기에서 개와 새들이 파먹도록 시신을 방치하는 행위는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용서할 수 없는 행위가 된다. 그 정도로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컸다는 말이지만, 어찌되었든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촉발한 행위는 지극히 야만적인 것으로 용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먼 동쪽 중국의 순자(荀子)도 “산 자를 기르는데 예의(禮儀)를 지키지 않음을 야만이라 하고, 죽은 자를 보내는 데 예법(禮法)에 맞지 않음을 척박하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3. 죽음, 인간을 존엄하게 하는 이유

▲ 칼레의 시민. 로댕 作.
1347년, 백년전쟁이 한창이던 때,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칼레는 영국군에 대항하며 1년 가까이 버티다가 결국 항복하게 된다. 관용을 요청받은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조건으로 지도층 인사 6명의 목숨을 요구한다. 이에 당시 칼레에서 가장 부유했던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를 위시하여 여섯 명이 목에 밧줄을 걸고 교수대 앞에 나선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은 이 사건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누군들 죽음이 두렵지 않을까. 누구라도 죽음을 싫어하고 삶을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는 것이다. 죽음을 미워하고 삶을 사랑하는 건 자연법칙이다. 이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세계가 자연계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법칙을 뛰어넘었다. 죽음의 두려움을 딛고 기꺼이 죽음을 향해 걸어감으로써 자연법칙의 지배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자, 떠날 때가 되었네. 각자의 길을 가는 거지. 나는 죽는 길로, 자네들은 사는 길로. 어느 길이 더 나을지 대체 누가 알겠나.”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에 동료와 제자들에게 한 말이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소크라테스는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였다. 탈옥해서 삶을 연장하라는 친구의 권유를 거부하며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살아 있음으로 해서 얻을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없게 된 상황에서 삶에 집착하고 매달린다면 나 자신이 보기에 내 꼴이 너무 우습게 될 것 아니겠는가?” 소크라테스는 죽음으로 삶을 완성한다. 그가 만약 친구의 권유대로 탈옥하여 삶을 연장하였다면 지금의 소크라테스는 없을 것이다. 그의 모든 언행은 거짓이 되고 말테니까. 예수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다. 본래 기독교의 영생은 이런 의미이다. 아킬레우스가 전장에서 죽음으로써 영원한 명성을 얻은 것과 같은 것이다.

죽음은 삶을 풍요롭게 하고 완성시킨다. 삶의 유한성, 곧 필멸의 존재임을 인간은 알기에 순간순간의 삶이 소중해지는 것이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아마데우는 동맥류라는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다. 언제 머릿속 핏줄이 터져 죽을지 모르는 삶이다. 늘 죽음을 가까이 하는 삶이기에 아마데우는 매 순간순간 살아있음을 느끼며 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데우의 말처럼, 우리가 신처럼 영원히 산다면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일들이 그렇게 중요할 것도 없다. 일상은 얼마나 지루하고 인생은 얼마나 재미없을까. 그래서 아마데우는 말한다, 누구도 영생을 원치 않을 것이라고. 인간이 영원히 살지 못하는 필멸의 존재라는 사실은 오히려 축복이라고.

“오직 죽음만이 매 순간에 아름다움과 공포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것입니다.”

죽음이 가져온 아름다움과 공포를 예술로 문화로 승화시킨 게 인간의 문명이다. 장례는 단순한 통과의례가 아니다. 죽음이 삶의 완성임을 깨달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귀한 의식이다. 죽음에 직면하여 죽음을 통해 삶을 완성시킴으로써 인간은 자연계에 머물지 않고 인간계라는 그들만의 찬란한 세계를 만들 수 있었다. 진정 죽음은 인간이 존엄할 수 있는 이유이다.

주) ----------
1) 《논어》 <八佾>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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