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고룡산 주봉에서 갈라진 5가닥의 줄기 중 한 곳의 정상에 앉아 있는 고룡사(주지 자인 스님)이다. 한국불교계에서 정화의 돌풍이 거세게 불 쯤, 분규를 피해 만행 길에 올랐던 한 비구 스님(성월 스님)이 고룡산 자락에 인법당을 세우고 홍포의 터전을 마련한 것이 지금의 ‘고룡사’를 있게 했다.

자인 스님(고룡사 주지)의 말을 빌리자면, 고룡사 터는 성월 스님이 오기 전부터 지역 주민들이 집안에 우환이 생길 때마다 치성을 드렸던 기도처였다고 한다. 대웅전 뒤편의 일명 ‘정승바위’가 바로 그 기도처였고, 그 아래로(지금의 고룡사 경내) 갈대가 무성했다고 한다.

고령산의 신령한 기운은 토정 이정암과 얽힌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다. 아산 현감으로 재직한 적이 있는 토정 이정암이 말년에 세간을 떠나 움집을 짓고 청빈한 도인의 길을 걸었던 곳이 고룡산(산내 음바위골로 알려졌다)이다.

그렇다면 고룡사는 ‘청정한 곳에 청정한 스님이 마련한 도량’인 셈이다. 창건 당시 성월 스님은 고룡사를 찾아오는 불자의 수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기도’만을 올리며, 불자들의 ‘고(苦)’를 품었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치유를 바라는 이들도 있었고, 보살이 되기를 서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성월 스님과 자인 스님의 인연은 ‘우연과 찰라’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수덕사 견성암에서 공부한 자인 스님이 큰 뜻을 품고 명산과 명찰을 좇던 중 우연히 고룡산 인근에 몇일 머물다 성월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성월 스님은 고령에 건강도 안 좋았는데, 정진력 갖춘 젊은 스님(자인 스님)을 만나자, ‘고령사에 머물 것’을 간곡히 권유하며 그 인연의 고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 때가 1990년대 초반. 고령사 인법당이 법당(10평 규모)으로 바뀌고, 토지가 매입되고, 종각이 세워지고, 석탑이 중수되는 등 경내의 변화며 재단법인 선학원에 절 등록한 것도 그 때이다.

그러나 고룡사의 변화에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게 있었다.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성월 스님이 주불로 조성한 이 부처님은 토불(土佛)이다. 오탁 중생이라도 그윽함으로 바라보는 듯한 고룡사 부처님의 상호는 ‘누가 언제 어떻게’ 조성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신심(信心) 두텁고 솜씨 빼어난 장인의 재주를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은 금으로 장엄되어 토불의 참 모습이 가려져 있지 않나’ 하는 아쉬움을 품고서 법당을 나섰다. 법당 앞으로 깎아진 듯한 비탈진 산길이 보인다. 고룡사까지 오르기 위해 그 산길을 올랐다는 생각에 현기증이 일어난다.

그 순간 ‘기도하겠다’는 일념(一念)으로 고룡사를 찾을 기도객의 간절한 신심(信心)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름 모를 국도를 경계선으로 넓은 평야가 보인다. 대단한 광경이다. ‘만약 이런 곳에 더욱 격을 갖춘 절이 앉아 있다면’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고룡사에는 아직까지 불사다운 불사가 없었습니다. 만약 불사를 여법하게 회향할 수 있다면 더 많은 불자들이 부처님의 기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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