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4일, 아산 보문선원에서 열린 석주당 정일대종사 열반 10주기 추모재 및 법어집 봉정식에 다녀왔다. 송운스님이 참석자들에게 건넨 《석주대종사법어집》에는 석주 큰스님의 행장이 이렇게 정리되어 있었다.

“1961년 선학원 이사장, 1977년 조계종 초대 포교원장, 1971년, 1978년, 1984년 조계종 총무원장을 3차례 역임하시는 등 종단행정을 두루 맡으셨습니다. 또한 역경과 교육사업에 남다른 원력을 가지고 1989년부터 동국역경사업진흥회 이사장, 1970년 청소년 교화연합회 총재, 1980년 중앙승가대학교 초대학장 등을 역임하셨습니다. 1994년 조계종 개혁회의 의장을 거쳐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을 맡으셨습니다. 1997년 사회복지시설 안양원을 설립해 운영하셨습니다. 1961년 동국역경원의 전신인 법보원을 설립하여 역경불사에 활력을 불어넣으셨습니다. 1964년 동국역경원 설립 이후에는 운허스님과 함께 한글대장경 편찬사업에 착수, 37년만인 2002년 318권의 한글대장경을 완간하셨습니다.”

석주 큰스님은 조계종 총무원장 등 행정 분야뿐만 아니라 불교개혁, 불교정화, 포교, 교육, 역경, 복지 등 각 분야에 있어서 독보적인 분이셨다. 한 스님의 이력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활동력과 헌신성을 보여주신 것이다.

기왕 내친 김에 2009년 발행된 《석주 큰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 문집, 그리운 석주 큰스님》도 꺼내 들었다. 이 책에서 당시 총무원장 지관스님은 “큰스님은 내가 평소에 가장 존경했던 스님으로 정신적 의지가 되었다. 스님께서는 포교사와 군승들이 포교를 위해 묵필(墨筆)을 부탁드리면 90노구임에도 모두 써주시어 포교활동을 도와주셨다”라며 포교에 대한 열정을 소개하였고, 당시 종회의장 보선스님은 “한분의 성인이 남긴 향기는 사바세계의 중생들의 빛이다. 석주 큰스님께서는 우리 시대 중생들에게 빛과 소금을 남긴 성인이며 부처였다.”고 찬탄했다. 봉선사 조실 월운스님은 “그 어른의 숱한 어록과 행장과 저술 등은 오늘 우리들의 것만이 아니라 후대에 전해주어야 할 소중한 정신적 유산”이라고 정의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했던 스님들은 석주 큰스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선학원 이사장 법진스님은 “스님께서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역경과 포교, 교육 불사에도 헌신하셨다. 그러나 소임이 다했다고 생각하시면 조용히 그 자리를 물러나셨다.”며 나아가고 물러남을 아시는 지혜를 칭송하여 눈길을 끌었고, 원로의원 성우스님은 “내가 불교TV를 맡아 운영하면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을 때 스님께서는 작품 50점을 들고 전시회에 나오셔서 신도들에게 하나하나 친절히 설명해 주시곤 그걸 팔아 돈을 대주셨다. 저에게 불교TV를 살려 만중생에게 법음을 펴도록 하라고 당부하셨다.”며 대중 포교를 위해 일신의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으신 일화를 들려주었다.

원로의원 인환스님은 추모법어를 통해 “내가 동국대 선학과 교수로 있을 때 석주스님께서 중앙승가대 학장을 맡아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해와 김포학사 이전 직전까지 그 임무를 수행했다.”며 도제교육을 위해서라면 후배에게 아쉬운 소리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열의를 보이셨던 점을 상기시켰다.
이렇듯 많은 스님들이 한결같이 찬사를 아끼지 않은 석주 큰스님! 이날 행사에 총무원장 자승스님과 종회의장 성문스님은 화환을 각각 하나씩 보내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학원과 한 뿌리 한 몸임을 강조하는 종단대표인 자승 총무원장은 응당 참석하여 큰스님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어야 했다. 만일 그게 여의치 않았다면 최소한 부실장 중 한 명이라도 보냈어야 했다. 총무원장을 세 번이나 역임하시고 개혁회의 의장을 지내신 분에 대한 종단 수뇌부의 예의가 어째 이런지 모르겠다. 선학원 소속의 사찰에서 행사를 한다는 이유로 불교신문에 광고까지 받지 못하게 했으니 어련할까마는.

 한북스님/본지편집인, 대구보성선원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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