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7). 우리 귀에 익숙한 시인이다. 1960년대, 우리 국어 책에 나온 그의 시를 읽었을 터다. 그의 초기 시집에 나온 <가을 날>이란 시가 떠오른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마지막 단맛을 스미게 하소서...”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이 시는 가을날에 깊게 배여 있는 자연의 정서를 환기시키기도 하거니와 여운처럼 번져가는 영적 아우라 같은 것도 느끼게 해준다. 첫줄에 ‘주여..“하는 말 때문이었을까.

청소년 시절 이후 나는 줄곧 그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해왔다. 한데 요즘 나온 그의 시 전집을 일견 하고 나는 그가 ‘세속적 기독교’에 대해 외려 반감 같은 것을 갖고 있음을 알았다. 그가 시에서 자주 차용하는 ‘천사’란 말도 그렇다. 그의 천사는 기독 세계관에서 말하는 하늘의 천사가 아니다. 그의 천사는 시인의 내부에서 창조된 이름이고, 침묵 속에서 대화가 가능한 어떤 영체에 가까운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한편 그는 <붓다>란 제목의 시도 썼다. 우리의 심지나 자성을 엿보게 하는, 그런 매력을 풍기는 작품이다. 그가 조각가 로댕의 정원에 있는 붓다 상을 본 것이 이 시의 동기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엿듣고 있는 듯하다. 고요를 : 먼 곳을.../우리는 멈추어 서보지만 그 소리 들리지 않는다./그는 별이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른 큰 별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오, 그는 일체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눈길 주기를 기다리는 걸까? 그럴 필요를 그가 느낄까?/우리가 여기서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해도/그는 침잠한 채 짐승처럼 게으름을 피우리라.// 그 까닭은 우리를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것이/그의 안에서 수백만 년 전부터 돌고 있기 때문이다./그는 우리가 겪는 일 따위는 잊어버리고/우리 인간을 멀리하는 법을 알고 있다.”(전문)

이 시와 관련해서 릴케가 한 말이란다. “나는 갈수록 점점 더 (그리고 행복하게도)과일의 핵과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과일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제 주변에 정리해 놓고서 스스로의 힘으로 작업의 어둠 속에 있습니다. 나는 갈수록 그렇게 사는 것이 나의 유일한 출구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는 내 주변의 떫은 것들을 달콤한 것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이 달콤함은 내가 영원히 사랑하는 신에게 빚진 것입니다.”

깊은 자기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그는 붓다를 인간 붓다로 보는 동시에 붓다나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는, “수백만 년 전부터 돌고 있는” 신성한 ‘중심’을 착파(着把)하여 이것을 그의 노래로 아름답게 드러냈던 것이다. 침묵 속에서 정연하게 대상 삼매에 젖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시가 나올 수 있겠는가. 그는 대상(과일)을 집중 탐구하는 가운데 홀연 “주변의 떫은 것들을 달콤한 것으로” 바꿀 수 있는 힘 같은 것을 명명백백하게 느끼기도 했던 것이리라.

요즘 우리는 각종 매체를 통해 경전 강독을 적지 않게 경험한다. 하나 듣다 보면 ‘판에 박힌 듯한’ 단어들의 나열들이 많다. 쓰인 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 ‘말씀들’이야 다 옳은 ‘말씀들’이다.
그러나 한 말씀하여 당대에 큰 영향을 끼친 옛 스님들은 그 표현 양식이 매우 창의적이었다. 본보기로서 깊이 참고를 해야 할 일이다. 의당 창의성이란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 뒷받침이 돼야 가능하다. 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되듯. 자신이 찾아낸 새로운 언어로 마음 밭을 일궈야 한다. 그래야 산 법문이 된다. 물론 사람의 근기에 따라 방편이 자유자재하면 더욱 좋겠다.

릴케 시를 음미해 본 것은 다름 아니다. 이 시인은 빛을 안으로 돌려 스스로를 깊이 탐구한 가운데 얻은 소식을 진솔하게,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음이다. 문학적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한 뜻이 아니다. 제 마음을 경전과 ‘동일시’하여, 그냥 앵무새처럼 ‘전통적인 해설’만을 한다면, 귀가 어두운 이들에게는 죽은 법문이 될 우려가 있다. 불교가 그 외연을 넓히려 한다면, 어느 수행자든 간에 스스로 자신의 체험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일이 가미돼야 할 것이다. 만일 죽은 법문 뒤에 숨어 말과 행동을 다르게 하며 산다면, 그것은 분명 중생을 속이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승철/시인ㆍ정신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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