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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원(中原), 인문(人文)이 피어나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2014년 11월 04일 (화) 17:08:55 김문갑 meastree@naver.com
   
▲ 요임금(좌)과 순임금(우). 요순시대는 중국인들이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 여긴다. 이때에 왕위 계승은 세습이 아닌 선양이었다.

천하가 모두 중원(中元)의 사슴을 쫒았다. 마침내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물리치고 사슴을 품에 넣었다. 중원의 사슴이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나온 말로, 천자(天子)의 자리를 의미한다.

중원이란 오늘날 중국 하남성(河南省)을 중심으로 산동성(山東省) 서쪽, 섬서성(陝西省) 동쪽에 걸쳐 펼쳐지는 비교적 너른 평원지대를 가리킨다. 황하(黃河) 중ㆍ하류 지역으로 중국문명의 중심지이다. 이른바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여기에서 발흥했고,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문화(三代文化)가 여기에서 꽃피었으며, 진한(秦漢)과 당송(唐宋)이 이곳을 무대로 역사를 만들었다.

지도를 펼쳐보면 이곳엔 회수(淮水), 한수(漢水), 낙수(落水) 등의 황하지류가 마치 핏줄처럼 곳곳으로 퍼져있다. 흔히 경위(涇渭)를 따진다고 하는 경위도 이곳으로 흘러들어가는 경수(涇水)와 위수(渭水)를 가리키는 말이다. 경수는 황하의 황톳물을 싣고 내려오기 때문에 언제나 흐리고 위수는 감숙성(甘肅省) 남동쪽에서 발원하다 보니 물이 맑다. 맑은 위수가 내려가다가 흐린 경수와 합해지다 보니 그 맑고 흐림이 너무도 분명해서 경위를 밝힌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중원은 이런 황하의 지류들이 핏줄처럼 흩어져서 농사에 필요한 토양과 물을 공급해 주는 곳이다. 당연히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하였다. 농경이 유목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정착생활이다. 초기에는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공동체와 이런 가족공동체가 여럿 모인 부족공동체의 형태로 농경이 이루어졌다. 이들 공동체는 가족의 어른, 부족의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위계질서를 이루며 하나의 운명공동체를 결성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족연맹체를 결성함으로써 더 큰 도전에 대응하는 것이다. 유목민들의 약탈전쟁을 방어한다든가, 혹은 대규모 관개수로를 건설하는 등등의 일들은 한두 씨족이나 부족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성을 쌓고 수로를 내는 일들이 규모가 커지면서 만리장성의 축조나 대운하건설로 이어지는 것이다. 거대한 조직은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 거대 조직의 우두머리를 왕(王), 혹은 천자(天子)라고 불렀다. 이들 왕이 있는 곳은 자연스럽게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가 되어 도시로 발달하였다. 그 고대도시들이 장안(長安)이며, 낙양(洛陽)이며, 개봉(開封) 등이다.

이런 지리적 특징이 중국 고유의 질서와 철학을 만들어 낸다. 국가(國家)도 그 중의 하나이다. 고대 중국에서 국가는 국(國)과 가(家)의 합성어이다. 가(家)란 본래 씨족(氏族)을 의미한다. 황제(黃帝)를 헌원씨(軒轅氏)라 하고 희성(姬姓)이라고 하는데, 헌원씨란 황제가 태어난 곳이 언덕으로 된 곳이란 의미이며, 희성은 희씨 가문의 자식이란 뜻이다. 즉 처음에 씨는 출신지역을 성은 혈통을 의미하였는데, 시간이 지나며 모두 씨로 흡수되었던 것이다. 이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전환되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성(姓) 자에 있는 계집 여(女) 변이 혈통이 모계를 따랐음을 추정케 해준다. 그러던 것이 부계사회로 전환하며 씨에 흡수되는 것이다. 백성(百姓)이란 말도 본래는 모든 씨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후에 절대왕권이 성립되며 피지배층을 나타내는 말이 된 것이다.

황제는 먼저 희씨 가문의 족장, 즉 가(家)의 장(長)이면서 희씨 가문을 중심으로 다른 여러 사람들이 모여 이룬 부족의 부족장, 즉 국(國)의 우두머리였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부족연맹체의 최고우두머리가 되면 천자(天子)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다. 이게 《대학》에서 말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원래 이런 의미이다. ‘천자(天子) – 제후(諸侯) - 대부(大夫)’로 이어지는 고대 중국의 위계질서는 이렇게 씨족집단에서부터 출발하였던 것이다.

중원에 임금이 없으면 어찌 중원이라 하겠는가

공자께서 “오랑캐 나라에 군왕이 있는 것이, 중국에 임금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子曰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라고 하셨다. 《논어》

이 구절은 《논어》에 나오는데, 해석도 다양하고 의미도 매우 달라서 정확한 뜻을 확정짓기가 곤란하다. 여기에서는 그 세세한 내용을 다 밝힐 필요도 없고, 다만 몇 가지 시사점만 생각해 본다.

먼저 제하(諸夏)란 글자 그대로 여러 하족(夏族)이라는 말이다. 즉 중원에 살고 있는 여러 씨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이 왕을 중심으로 위계질서를 갖추고 있는 게 제하에 왕이 있는 것이다. 이런 위계질서야말로 제하와 이적(夷狄), 즉 중원과 오랑캐를 나누는 기준이었던 것이다. 이 구절은 이런 위계질서가 와해된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주역》에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어버이를 죽인다.”라는 말로 극심한 혼란상을 그리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군신, 부자 관계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중국의 군신관계는 본래 각 부족이 연합하면서 특정 부족장을 리더로 선출하면 나머지 부족장들은 자연적으로 신하가 되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신하였던 부족장이 힘이 강해지면 가존의 리더를 몰아내고 자신이 새로운 리더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황제도 이런 식으로 염제를 몰아내고 천자가 된 것이다. 또한 자식이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도 오늘날의 가정폭력 같은 게 아니다. 중국 고대에서 부자관계란 곧 군신관계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왕의 아들이 여럿이면 그들에게 각각 식읍을 떼어 주며 독립시키는데, 이는 곧 하나의 제후국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부자관계가 군신관계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식이 어버이를 죽인다는 말과 신하가 임금을 죽인다는 말은 권력구조에서는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즉 매우 거친 권력교체임을 나타내는 것일 뿐, 권력교체란 측면에서만 보면 순조로운 권력이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원문화의 특징은 이런 지리적 환경적 기반 위에 형성된다. 그 위에 경제적 토대가 만들어지고, 그 위에 다시 정치적ㆍ사상적 질서 체제가 만들어진다. 그들의 환경적 요인은 쌀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문화에 적합하였고, 농경을 위해 정착에 알맞은 체제를 발달시켰다. 이른바 농업혁명은 모계사회를 급속히 부계사회로 전환시켰으며, 가부장적 가족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런 씨족이 최소 요소가 되어 같은 구조를 갖는 부족사회, 나아가 천하질서를 형성하게 된다.

즉 씨족이 모여 부족이 되고, 부족이 모여 커다란 운명공동체를 만든다. 씨족장은 대부가 되고, 부족장은 제후가 되고, 부족연맹의 리더는 천자가 되어 천하의 위계질서를 형성하였다. 이 모든 게 중원이 갖고 있던 지리와 환경에서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었던 질서이다.

군자는 차이를 포용하며 조화를 이룰 줄 아는 사람이다

군자(君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小人)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 《논어》

먼저 여기에서 말하는 군자와 소인은 모두 씨족장급 이상 되는 지배계급이다. 군자가 장차 왕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면, 소인은 결코 지도자는 될 수 없는 귀족 나부랭이에 불과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화이부동은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조화를 이룬다는 말이고, 동이불화는 서로간의 차이를 포용하지 못하면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화이부동이란 여러 씨족가문이나 나라의 각기 다른 전통과 풍습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어차피 서로가 귀족이고, 서로가 천자의 자격을 갖고 있는 것이기에 이런 상호존중은 당연한 것이었다.

요(堯)임금이 자신의 왕위를 물려줄 사람을 정하여야 했다. 그래서 여러 부족장들을 모아 놓고 누가 적합한지를 묻자 이구동성으로 순(舜)을 추천하였다. 이에 요임금이 순을 불러 이것저것 시켜보고는 최종적으로 후계자로 낙점한다. 자신의 두 딸도 순에게 시집보내고..... 이처럼 혈족이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선양(禪讓)이라고 한다. 중국 고대에는 선양이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연맹의 리더, 즉 천자는 부족장들이 돌아가며 맡거나, 적어도 모든 부족장의 동의를 얻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양을 통해 왕위에 오른 지도자는 자신을 밀어주고 믿어준 귀족들을 존중하며 그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런데 이런 포용력이 부족한 지도자는 다른 족장들을 존중할 줄 모르며 자기를 따르는 부족만 좋아하고 비판적인 부족을 배제하기 시작하면, 그 체제는 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화이부동의 정신은 이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적 당위였다. 그리고 그 정신은 고대의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군현제로 전환되고서도 여전히 남아서 중국문화를 살찌우는 자양이 되었다. 인도에서 태어난 불교가 오히려 중국에 들어가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도 나와 다른 것을 존중할 줄 아는 화이부동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그들의 문화를 거부하지 않는 이상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그들 중원문화를 더 키워나갔다. 선비족이 중원에 들어가서 당(唐)대 문화를 꽃피웠고, 몽고족이 중원을 차지하고서는 원(元)대 문화를 만들었다. 청(淸)나라를 세운 이들은 만주족이었고.........우리는 이들 모두를 중국문화로 부르지 중국이 아니라고 하지 않는다. 그 엄청난 흡수력과 포용력은 이미 고대의 중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위대한 인간의 문화, 인문(人文)

하나의 질서체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규범(規範)이 작동하여야 한다. 규범이란 사회규범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통제력을 발휘한다. 이런 사회규범에 법, 전통, 종교, 도덕 등이 있다. 종교가 규범이 되는 경우는 기독교가 대표적이다. 중세에서 십계명은 세속적 법 위에 군림하는 더욱 강력한 종교적 율법이었다. 이슬람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명예살인이나, 여성인권문제 등도 결국 종교가 사회규범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중국에는 기독교 같은 종교나, 법이 중요한 규범이 되지 못하였다. 때론, 예컨대 진시황제 시대처럼 법이 강력한 규범으로 작용할 때도 있지만 이 또한 일시적인 사건에 그치고 만다. 중국문화에는 법보다 더 상위의 규범이 있었다.

인(仁)이란 곧 사람다움이니 친한 이를 사랑하는 것이 큰 것이며, 의(義)란 마땅함이니 현명한 자를 존중하는 게 큰 것이다. 친한 이를 친히 하는 데에 상쇄함이 있고, 현명한 이를 존중하는 데에는 등급이 있으니 예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仁者人也 親親爲大 義者冝也 尊賢爲大 親親之殺 尊賢之等 禮所生也] 《중용》

사람 인(人) 자를 일단 사람다움으로 풀었다. 하지만 앞의 소인(小人)에서처럼 이 글자는 본래 지배계급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고대 신분제 사회에서는 지배계급은 예(禮)로 대하였고, 기타 일반 평민들은 형벌로 다스렸다.

조선시대에 사형은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사약을 내리거나 참수하였다. 전자는 신체를 훼손하지 않고 보존시키며 죽게 하는 방법이고 후자는 신체를 훼손시키는 방법이다. 또한 전자는 스스로 죽게 함으로써 명예를 지켜주는 것이라면 후자는 죽임을 당하게 함으로써 치욕을 안겨주는 방식이었다. 이런 차이는 기본적으로 신분적 차이에서 나온다. 즉 전자는 양반 사대부에게 내리는 것이었고, 후자는 평민이하 피지배계급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드물게 양반권문세족임에도 신체 훼손형을 가하는 경우는 그만큼 미워했다는 말이다. 광해군 때 허균에게 내린 능지처참형이나, 연산군이 이미 죽은 김종직에게 내린 부관참시는 그 형을 당한 가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고대의 신분제 사회에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대하는 방식은 이처럼 달랐다.

인(仁)은 의(義)와 함께 유교적 도덕성을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말이다. 인의란 사랑과 정의이다. 중원의 질서가 화이부동으로 드러난다면, 그 밑바탕에는 강력한 도덕의식이 깔려 있어야 했다. 이 질서체제는 지배계급 상호간에 씨족이나 부족의 운명을 걸고 맡길 수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할 수 없다면 이는 곧 씨족간, 혹은 부족간의 불화를 의미하며, 전쟁이 임박해 있음을 나타낸다. 춘추시대가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즉 지배계급간의 강렬한 도덕의식은 역사적 필연이었다. 고대의 중원은 강력한 초월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법이 보다 강한 통제력을 발휘하기까진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하였다. 그런 속에서 지배계급 상호간에 지켜야할 신뢰와 배려 등은 그들 지배층에게 강렬한 도덕의식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런 도덕성이 사회규범으로 나타나게 되는 게 바로 예(禮)였다. 이 시대에 예를 지킨다는 것은 곧 중원의 위계질서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공자가 춘추시대를 예가 무너졌다고 통탄했던 이유도 중원의 질서체제가 붕괴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의 근원으로 강력한 도덕의식은 이처럼 본래 지배계급에게 요구되는 기본 덕목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런 지배계급의 도덕관념이 일반인들 모두의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송대(宋代) 성리학(性理學)에 이르게 되면 이런 경향이 뚜렷하여 인(仁)은 인간의 보편적 도덕원리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유교의 도덕의식은 중원의 질서가 무엇에 근거하여 세워지고 있었는지를 정확히 통찰하였던 데에서 나온다. 공자는 단순한 윤리학자도 도덕군자도 아니다. 더구나 진시황제에 의해 천하가 통일되고 황제중심의 군현제라는 완전히 새로운 질서체제가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봉건시대의 공자가 2천년 중국문화의 위대한 스승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본래 그 문화의 근원을 밝히고 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월적 신도, 강력한 법도 아닌, 도덕이었다. 도덕은 신의 영역도 동물의 영역도 아닌 오직 인간만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중원에는 인간이 중심이 되어 인간을 위한, 인간의 문화, 인문(人文)이 쌓여져 갔다. 그렇게 축적된 토양 위에 한 위대한 인문주의자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바로 공자(孔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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