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경》 <범행품>에서는 열반에 들어가는 범행으로 사무량심을 닦도록 하고 있다. 사무량심은 일체 선근의 근본으로 지극한 자애의 과(果)와 공(空)을 도와서 보살지에 이르게 하며, 나아가 아뇩보리를 얻는 청정행이라고 한다.

사무량심은 중생에게 이익없는 일을 덜어버리는 것을 대자(大慈)라 하고, 중생에게 한량없는 이익되는 일을 주려함을 대비(大悲)라 하며, 중생에게 환희심을 내는 것을 대희(大喜)라 하며, 모든 법이 평등하여 둘이 없는 줄을 보면 대사(大捨)라 하고 있다. 대자심을 닦으면 탐욕을 끊어버리고, 대비심으로 성냄을, 희심으로 즐겁지 않음을, 일체를 버리는 사심(捨心)으로 중생모습을 끊어버리는 등 모든 번뇌를 끊어버리므로 모든 선근의 근본이 된다. 이 선근은 첫째 대승의 선본이 되고, 둘째 삼승의 선본이 된다. 대승의 선본이란 일체선의 근본이 되고 육바라밀 특히 보시바라밀의 근본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무량심으로 세간의 사무량심을 얻은 뒤에 아뇩보리에 발심하여 출세간 선정을 얻게 되며 나아가 사무량심으로 육바라밀을 늘어나게 한다.

보살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지 못하면 대자심을 낼 인연이 없고 대자심을 내지 못하면 보시할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니 보시하는 인연으로 중생들로 하여금 편안한 쾌락을 얻게 한다.

사무량심의 보시바라밀은 첫째, 무상심(無相心)을 얻게 하니 보시할 때 속박되지 않고 탐착심을 내지 않으면 아뇩보리로 회향한다. 만일 계행을 깨뜨리고 그 과보를 본다면 편벽되게 닦아서 유상심(有相心)이 되니 보시바라밀을 구족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보시를 행할 때에는 그 마음에 의지함이 없어야 하고 두려움이나 교만을 내지 말며 내지 과보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경에서는 편벽된 보시행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을 때 그 권속들이 그를 편안케하려고 독을 없애기 위하여 의원을 청해다가 화살을 뽑으려하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아직 손을 대지 말라. 이 화살이 어느쪽에서 왔으며, 누가 쏘았으며, 그 화살이 나무인지, 화살은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그 깃은 무슨 새의 깃털로 만들어 진 것인지, 또한 그 독은 만든 것이지 자연으로 생긴 것인지 사람의 독인지 뱀의 독인지 알아야 한다. 이렇게 따지려 들면 이 어리석은 사람은 그런 것은 알지도 못한 채 목숨이 끊어질 것이다. 이와같이 보시를 행하려 하면서 받을 사람이 계행을 가졌는가 과보는 어떠할 것인가.

보살이 이와같이 분별하려 들면 보시바라밀을 구족하지 못하고 아뇩보리를 이루지도 못한다. 여기서 독화살을 맞은 사람과 같은 보살행은 천행(淺行)보살의 보시라 한다.

곧 사무량심 보살은 평등한 자비심으로 중생을 아들처럼 사랑해야 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 부모가 자식을 돌보듯이 하며, 마음이 기쁘기가 아들의 병이 쾌차함을 보는 부모같이 하며, 마음 놓기를 부모가 장성한 아들의 스스로 생활할 수 있음을 보듯이 이와같이 자·비·희·사의 마음으로 보시해야한다는 것이다.

둘째, 널리 서원을 내고 보시를 행한다.

보시를 할 때는 항상 발원하기를 내가 보시하는 인연으로 모든 중생이 큰 지혜의 밥을 얻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대승으로 회향하며, 성문 연각의 밥을 구하지 말며 법희식(法喜食)을 구해지도록 한다. 또한 반야바라밀의 밥을 얻어서 걸림없는 선근을 성취하며, 받는 이를 모두 불쌍히 여기어 복전이 되어지기를 보살은 자애심을 닦으면서 보시하는 것이다. 열반경에서는 보시하는 대상을 중생에게 가장 절실한 밥으로부터 마실 것, 수레, 옷, 꽃과 향, 평상, 주택, 등촉과 촛불에 이르기까지 8중의 보시를 통해서 자애심을 닦고 진실한 선근의 근본을 심어야 생사를 짓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사무량심은 삼승 선근의 근본이 된다는 것이다. 모든 성문 연각 보살과 부처님이 가진 선근에는 자애심이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이 사무량심의 자애심을 닦으면 한량없는 선근을 내니, 곧 부정(不淨)함을 알고, 들숨과 날숨, 무상한 생사, 사념처 칠방편 십이인연 사선근 견도 수도 칠보리분법 팔정도 사선정 팔해탈…신통, 성문의 지혜, 연각의 지혜, 보살의 지혜, 부처님의 지혜의 근본이 됨을 안다.

보살이 이러한 자애심의 사무량심을 닦으면 대열반에 머물러서 무량한 공덕을 성취한다. 자는 가운데 편안하더라도 자는 것이 아니고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이며, 항상 깨어 있더라도 깨어있는 것이 아니며, 천인이 보호하더라도 보호함이 없으니 나쁜 짓을 행하지 않는 까닭이며, 목숨이 마친 뒤 범천에 태어나더라도 태어남이 없으니 자재함을 얻은 까닭이라 한다.

이러한 청정행으로서 사무량심을 닦으면 자·비·희의 셋이 자애심을 도와서 지극히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의 자리에 머무는 과(果)와 원만히 버리는 사심으로는 공(空)을 도와서 초지의 화타(化他)의 과(果)를 얻게 한다.

지극히 아들을 사랑하는 자리란 보살이 자애와 가엾게 여기는 마음과 기쁘게 하는 마음을 닦으면 마치 부모가 아들의 평안함을 보고 마음이 환희하듯, 보살이 중생보기를 외아들과 같이 하는 자리에 머물며, 아들이 어렸을 때 흙이나 똥을 입에 넣는 것을 보고 부모가 걱정이 되어 손으로 끄집어 내듯, 보살도 중생들이 법신에 나가지 못하였을 때 지혜의 손으로 뽑아내고 그로 하여금 생사에 헤매면서 고통받지 않도록 하니 이 자리를 외아들의 지극히 사랑하는 자리라 한다.

또한 이런 보살은 사심(捨心)을 닦아서 공하고 평등한 자리를 머물러 수보리와 같이 한다고 한다. 곧 부모 형제 친척 동무 오음 십팔계 중생 수명 등을 보지 않으니 마치 허공에 부모 형제 수명이 없는 것과 같아서 법을 보는 일도 마음이 평등하기가 허공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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