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있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면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요즘의 내가 그렇습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많이 낯섭니다. 누군가를 지독하게 미워하는 모습, 나 자신을 파괴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걸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 미움이 정당하냐고 물어본다면 그것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내 미움은 뜬금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합당한 이유도 없고, 이성적이지도 않습니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감정이기에 많이 당혹스럽고 부끄럽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조차도 모르는 그 무엇을 갖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올 여름 가장 기대작이었던 <해무>는 개인의 이러한 의외성을 표현한 영화입니다. 인간의 숨겨져 있던 폭력성, 욕망 등을 표현하면서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봉준호 감독이 제작한 첫 영화로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를 썼던 심성보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극단 연우무대의 창립 30주년 기념작 ‘해무’를 각색한 영화 ‘해무’는 2001년 있었던 제7태창호 사건을 모티브로 했습니다. 제7태창호 사건은 중국인 49명, 조선족 11명이 태창호에 숨어 전라남도 여수로 밀입국을 시도하다가 질식사하자 선장과 선원들이 사망한 26명을 바다에 버려버린 사건입니다.

영화<해무>의 주인공은 6명의 선원과 1명의 밀항자입니다. 선장인 철주는 한 때는 룸싸롱에서 하룻밤에 기백만원을 날릴 정도로 잘나가던 뱃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부의 감척사업으로 폐선 위기에 몰린 전진호에 기대 연명하는 처지입니다. 무능한 남편을 무시하면서 아내는 대놓고 바람을 피우고, 선주와 그 아내는 선장인 철주와 전진호를 골칫거리 취급하고, 그에게는 밥줄을 대고 있는 5명의 선원이 있고, 참으로 난감한 처지입니다.

이곳을 고치면 저곳이 고장 나는 낡은 배지만 선장 철주가 기댈 곳은 오직 이 배뿐입니다. 이 배마저 사라지면 존재를 어디서 지탱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그는 배와 더불어 살아왔고, 배는 그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철주의 배에 대한 집착은 결국 자기존재에 대한 집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갑판장인 호영 또한 선장과 별로 다르지가 않습니다. 선장이 배에 집착한다면 호영은 선장의 명령에 집중하는 인물입니다. 갑판장이 선장의 명령을 따르는 존재라고 봤을 때, 즉 호영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반면에 기관장인 완호는 가장 특별한 존재입니다. 영화에서는 완호를 은둔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빚쟁이들에게 쫓겨 전진호의 기관실에 숨어삽니다. 선원들 사이에서는 분명 존재하지만 바깥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비심 많고, 양심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다른 선원들이 보이는 존재인데 반해 숨겨진 존재인 완호가 이런 인물이라는 것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감정인 자비심과 양심은 너무나 은밀하게 숨어있어 오직 자신만이 그것을 인지하고 있을 뿐 다른 사람에게는 잘 들러나지 않는 감정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완호는 가장 나약한 존재기도 합니다. 배에서 사건이 터졌을 때 뱃사람 중에서 가장 먼저 죽습니다. 자비심과 양심은 가장 깊은 곳에 숨어있으면서 또한 가장 약한 감정이라는 의미로 읽혔습니다. 인간을 일반적으로 욕망의 존재라고 하는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을 표현한 욕망의 반대지점에 이 감정이 있는데, 욕망이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상황이 되면 양심은 쉽게 사라질 정도로 미약한 감정인 것입니다. 영화는 인간의 가장 약한 감정인 이 자비심과 양심을 완호라는 심약한 남자를 통해 잘 형상화했다고 봅니다.

나머지 인물들은 욕망을 의미합니다. 롤러수 경구는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이고, 선원 창욱은 여자에 미쳐있고, 막내 선원 동식은 아직 순수한 감정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또한 창욱의 그 욕망과 다르지 않습니다. 창욱의 욕망이 노골적인 것이라면 동식의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단어와 포장지가 다를 뿐 본질은 닮은꼴인 것입니다.

그런데 6명의 선원은 사실은 한 사람이라고 보는 게 옳습니다. 완호의 자비심과 나머지 인물들의 욕망은 모두 한 사람이 갖고 있는 감정인 것입니다. 이런 다양한 감정과 욕망, 그리고 본능, 의무감 등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각각의 인물을 나열해서 보여준 것이지 사실은 한 사람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선원들 개개인의 캐릭터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면서 ‘인간은 과연 어떠한 존재인가’ 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본론을 말하면, 영화에서 얻은 답은 인간은 다양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 같은 것은 쉽게 포기할 수 있지만 또한 사랑이라는 포장지를 둘러싼 욕망 때문에 굉장히 파괴적이고 잔혹해질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양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선장인 철주와 막내선원 동식입니다.

철주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마누라의 바람을 눈감아줄 정도로 포용력 있는 인물이고, 또한 선원들에게 책임감을 갖고 따뜻하게 대하는 인물입니다. 욕심 없고 평범하게만 보였던 사람인데 배에서 불의의 사고가 났을 때 보여준 모습은 사뭇 뜻밖이었습니다.

더 이상 물고기를 잡을 수 없는 배는 중국에서 밀항자를 실어 나르는 일을 했는데 운이 나쁘게 감시선을 만나자 어창에 밀항자를 다 밀어 넣었고, 오래된 배의 냉각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프레온가스가 어창으로 흘러들어갔고, 순식간에 어창에 갇혀있던 밀항자 26명은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장은 그 사람들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꾸며 자기 배를 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선원들에게 물고기 떼가 뜯어먹게 시체에 칼질을 해서 바다에 던져버리라고 명령합니다. 다른 선원들은 선장의 명령을 잘 따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과 함께 배가 살아남는 방법은 이 길밖에는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이들은 선장의 명령을 묵묵히 따릅니다.

그런데 기관장 완호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헛소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죽은 밀항자와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이 사건을 경찰에 신고하겠다고도 합니다. 이때 선장은 완호를 죽이기로 합니다. 시체를 바다에 던진 이유처럼 자신의 배를 지키기 위해서는 완호가 헛소리를 하지 말아야 하기에 그는 순진한 뱃사람에서 돌연 살인자로 돌변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그의 광기는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앞에서 완호를 양심과 자비심으로 표현했었는데 이런 감정들을 죽여 버리자 그는 무서운 살인귀로 돌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장이 완호를 죽이는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막내선원 동식과 밀항자 중 한 사람인 홍매라는 여자입니다. 동식은 홍매를 보고 첫눈에 반했고, 그래서 기관실에 몰래 숨겨주고 있었는데 마침 다른 밀항자들이 다 죽은 마당에 홍매가 살아있다는 것은 다른 선원들에게는 절대로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었습니다.

그런데 배를 지키기 위해 선장이 완호를 죽이고 폭군이 된 것처럼 동식도 비슷한 반응을 보입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동식 또한 양심과 자비심을 버립니다. 그는 갑판장을 죽이고, 희준과 경구를 죽이려 하고, 마침내 선장까지 죽입니다. 홍매라는 욕망이 끼어든 순간 동식은 순진하고 착하고 인정 많던 사람에서 잔인한 살인자로 돌변하는 것이었습니다.

배와 홍매라는 차이가 있지만 동식과 선장은 놀라울 정도로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은 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욕망이라는 것이 끼어들었을 때 인간은 이렇게 돌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고, 이것이 인간의 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영화의 제목이 ‘해무’인데 바다안개라는 뜻입니다. 바다안개가 덮친 바다처럼 분간을 할 수 없는 게 인간인 것이지요. 단정적으로 정리할 수 없는 게 인간이지요. 희준과 경구처럼 완전히 욕망에 들뜬 인물일 수도 있고, 완호처럼 양심과 자비심의 지배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철주와 동식은 이러한 두 가지 감정을 적당하게 조율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균형을 잃고 무너지게 된 인물들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무가 덮치기 전의 철주와 동식처럼 적당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욕망이라는 그물이 쳐지면 그들은 언제든 괴물로 돌변할 준비가 돼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괴물로 만든 욕망은 도대체 인간에게 무엇을 줄까요? 배에 집착했던 철주는 배와 함께 바다로 침몰했고, 홍매를 지키기 위해 동료들을 다 죽였던 동식은 홍매와 함께 육지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홍매는 동식을 매정하게 떠납니다. 욕망은 결국 자신을 배신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공사판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던 동식은 중국 음식점에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홍매의 뒷모습을 발견하지만 그들은 모르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헤어집니다. 그가 자신의 목숨을 던지고 동료들을 다 죽이면서 지킨 홍매라는 존재는 이렇게 허무한 것이었습니다.

<해무>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도 쉽게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짙은 바다안개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혼란스럽고 축축한 기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봐서는 안 될 인간의 내밀한 곳을 본 것 마냥 불편했습니다.

-김은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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