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주지 원학스님)는 개산 1220주년을 맞아 24일 오후 3시 봉은사 보우당에서 ‘봉은사와 추사 김정희 특별 강연회’를 가졌다.

봉은사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주석했던 곳으로 그가 죽기 사흘 전에 쓴 ‘판전’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김정희가 생존했던 당시 조선시대는 숭유억불이 심했지만 유학자였던 김정희는 불교에 관심이 많았고 스님과의 교류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날 개회사를 통해 봉은사 주지 원학스님은 “개산대재를 맞이해 봉은사가 한국불교의 희망이 되고 한국불교를 새롭게 바꿔 나가는 원력의 도량으로 자리잡기 기대한다"며 "이를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에 깊은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를 바란다”고 밝혔다. 

봉은사 주지 원학스님이 개산대재 입재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어 특별강연회 1부는 ‘봉은사의 역사와 사격’이란 주제로 김상영 교수(중앙승가대학교)<사진>가 발표했다.

김 교수는 “봉은사(奉恩寺)는 791년(신라 원성왕) 연회국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원래 이름은 견성사(見性寺)였다”며 “1498년 정현왕후의 명으로 봉은사로 이름이 바뀌고 선릉의 능침사찰로 번성했다”고 밝혔다.

이어 “1551년에는 선종을 관장하는 선종 수사찰로 지정되어 조선불교의 실질적 근본 도량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며 “꺼져가던 조선불교의 법맥을 되살려 낸 선종 수사찰로서의 위상을 지녔던 도량이다”고 강조했다.

김상영 교수는 “근·현대 봉은사는 조선 총독부의 사찰령 시행규칙에 따라 서울 경기도 일대의 80여 사암을 관장하는 본사로 지정되었다”며 “서울 인근의 명찰은 대부분 봉은사의 말사에 속해 있었다”고 말했다.

끝으로 “봉은사는 일제강점기에도 선종의 수사찰이었던 조선시대의 위상을 계승하면서 수도권의 80여 사암을 대표하는 본사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중앙승가대 김상영 교수가 '봉은사의 역사와 사격'을 주제로 특강하고 있다.

2부에는 ‘추사 김정희의 꿈, 판전’이라는 주제로 김현권 박사(문화재청, 세종대 겸임교수)가 발표했다.

김 박사는 “추사 김정희의 집안은 불교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며 “추사의 집안은 화암사를 원찰로 두었고 그의 부친 김노경은 해붕(전령)스님과 깊이 교유했다”고 말했다.

또한 “김정희도 33세에 해박한 불교 지식을 종횡무진 구사한 '해인사중건상량문'을 썼으며, 서른살 무렵에 만난 초의선사와는 평생을 교유했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불교, 유교, 도교의 삼교일치를 내세우는 당시의 흐름은 사림과 승가에 녹아들었고 스님들도 유교와 도교 경전의 이해가 필수적이었다”며 “추사 집안과 승가의 교유 속에서 등장하는 혜장과 의순은 정약용을 통해 시문을 익혔고, 해붕(전령)스님은 주자학의 중요한 논쟁거리인 심성론을 불교의 논리 속에서 설명하였다”고 강조했다. 

특강에 앞서 오전 11시에는 역대조사 다례재가 대웅전 앞에서 열렸다. 창건주 연회국사, 중창주 보우대사, 서산대사, 사명대사, 영기율사, 영암대종사, 석주대종사 등 7인의 역대조사 진영을 진영단에 모시고 헌다와 헌화, 권공의식등이 봉행됐다.

-공태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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