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念)은 불교적 관점에서 2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산스끄리뜨 스므리띠(smr.ti)의 역어로서 이고, 둘은 산스끄리뜨 끄샤나(ks.an.a)의 역어로서 이다. 이 둘은 하나로 엮을 수 없는 별개의 의미인데도 한역경전에서 동일하게 염(念)이란 글자로 사용되기 때문에 초입자에게 큰 혼란을 주고 있다.

(1)분명하게 기억하고 유지하며 잃어 버리지 않게 함의 원인

S:smr.ti          P:sati          T:dran pa         E:mindfulness; recollection.

한자 ‘念’이 갖는 의미는 ‘생각하다’, ‘외우다’, ‘읊다’ 등인데, 이것에 의거해 한역경전을 볼 때도 염(念)을 일반적 의미인 ‘생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컨대 8정도 가운데 하나인 정념(正念)을 ‘바른 생각’으로 풀이하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은 염(念)의 본래의미를 드러내기에는 너무나 빈약하며, 심지어 오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그 의미를 좇아 국내 소장학자들은 ‘마음챙김’, ‘알아차림’, ‘수동적 주의집중’, ‘마음지킴’ 따위로 번역해 사용하기도 하며, 한편으론 술어 자체의 다의성을 담보하기 위해 빨리어인 ‘사띠’ 그대로 음사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입장들은 사띠라는 용어를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 어렵다는 것을 반증한 것이기도 하다.

직전 찰나의 대상까지도 포함한다

사전 상에 나타난 사띠(sati)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기억하다’란 의미를 기본으로 갖는 어근 √smr.에 근거한 ‘기억’, ‘회상’ 따위다. 둘째는 보다 심화된 마음작용의 측면에서 ‘현재에 대한 주의집중’, ‘주의깊음’ 따위다. 이러한 의미에 기반해 《성유식론》5권(T31-28b18)에서는 “이전에 익힌 대상에 대해 마음으로 명확하게 기억하고 잃어버리지 않게 함”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전에 익힌 대상’이 의미하는 바는 몇 년 전의 일도, 며칠 전의 일도, 몇 분 전의 일도 모두 포함하지만 보다 중요한 의미는 바로 직전 찰나의 대상까지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직전에 사라져버린 바로 앞 찰나의 대상에 대해 명확하게 기억[記]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 찰나에서 명확하게 유지[持]하며, 또 그렇게 잡아쥐고 있음으로써 다가올 찰나에 있어선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원인[不忘失因]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단순히 ‘생각’이란 말로 풀이할 수 없는 이유이며, 불교가 아주 정치(精緻)한 가르침임을 나타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를 갖는 사띠는 한역에서 일반적으로 염(念)이란 한 글자로 사용되지만, 문맥에 따라 억념(憶念), 지념(持念), 수의(守意) 따위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수행적 측면에서 사띠는 들뜸에 빠지거나 게으름에 빠지는 것을 바로잡아 보호해주며, 고수(苦受)와 낙수(樂受)를 알아차려 최적의 상태를 얻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샤마타수행과 위빠샤나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띠는 8정도의 7번째, 5근과 5력의 3번째, 7각지의 1번째 구성요소로 자리하는 것이며, 특히 4념처란 수행법으로 더욱 확고해진 것이다.

(2)일념(一念)은 ‘한 생각’ 아닌 ‘1찰나’

S:ks.an.a         P:khan.a            T:skad cig           E:instant; a moment           Cs:叉拏


念(염)은 사띠의 의역어임과 동시에, 시간적 최소단위인 찰나(刹那)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찰나는 산스끄리뜨 ‘끄샤나(ks.an.a)’의 음사어이며, 경우에 따라 염경(念頃), 수유(須臾)로 의역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한역경전에선 ‘찰나’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 의미의 이해에 별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하는 점은 문맥의 조어 상황에 따라 한 글자인 염(念)을 사용하는 경우이다. 이 염(念)을 ‘찰나’가 아닌 ‘생각’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화엄일승법계도》을 보면,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時無量劫)’란 글귀가 있다. 여기서 어떤 이들은 ‘일념(一念)’을 ‘한 생각’으로 풀이해 이해한다. 이 글귀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연장선이다. 곧, 다(多)인 가장 긴 시간단위 겁(劫)과 일(一)인 가장 짧은 시간단위 찰나(刹那)의 관계로써 설명하는 것인데, 겁은 그대로 ‘겁’이라 하고, 찰나를 의미하는 염(念)은 ‘생각’으로 말하고 있다. 언뜻 봐도 앞뒤가 맞지 않은 풀이이다.

이외도 염념부주(念念不住), 염념무상(念念無常), 염념상속(念念相續) 등도 예외가 아니다. ‘생각생각’이란 말보다 ‘찰나찰나’로 보면 이해가 보다 수월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경론에 따라선 이 염(念)이 갖는 시간을 1찰나, 혹은 60찰나, 혹은 90찰나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설명의 차이일 뿐 그 본의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찰나의 요지는 일체 행(行)의 무상성

《대비바사론》136권(T27-701b8)의 설명에 따르면, 하루 24시간은 6백48만 찰나이며, 이를 현대적 표현으로 환산하면 1찰나는 1/75초가 된다. 하지만 《대비바사론》에서 찰나의 정확한 양은 알아들을 만한 유정(有情)이 없고 꼭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굳이 말하지 않는다고 설명한 것처럼, 찰나의 양 자체가 긴요한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 시간은 대상에 의지해 건립된 것이기 때문이다.[依法而立]

결국, ‘찰나’라는 말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일체 만법의 순간적 생멸(生滅), 곧 무상성(無常性)이며, 이로 인해 탐ㆍ진ㆍ치(貪瞋癡)에서 벗어남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비유로써 찰나의 양을 설명할 뿐 그 정확한 양에 대해선 명시하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김영석/불교저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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