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100일이 훌쩍 지났습니다. 우리 자신의 부도덕과 무능이 어느 정도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날들입니다. 대통령은 국가개조라는 말까지 해 가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굳게 했습니다만, 이 땅에는 허위와 무기력이 팽배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로 요양원 화재참사, 모 병장의 총기난사, 군대내의 인격살해, 그리고 오늘 아침 들려오는 참혹한 한 어린 여학생의 죽음 등등…… 내일 아침엔 또 어떤 참사가, 어떤 비참한 사건이 우리들의 가슴을 짓누를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정코자 하여도 불안과 공포가 밀려옵니다. 이런 때 종교지도자의 한 마디 금구(金口)는 메마른 땅에 단비처럼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될 터인데, 중생의 마음은 찢어지고 새까맣게 타들어 가도 금구는 들려오지 않습니다.

지난 4월 25일.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팔레스타인을 방문하였습니다. 역대의 교황들이 한결같이 이스라엘을 먼저 방문할 때, 교황은 팔레스타인 우선 방문을 결정하였고, 육로로는 불가능한 상황을 고려하여 헬기를 이용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킵니다.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교황은 미사장소로 향하던 중 차를 세웁니다. 차에서 내린 교황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봉쇄하기 위해 세운 장벽까지 걸어가 장벽에 손과 이마를 대고 기도했습니다. 그 손은 에이즈 환자를 어루만지던 손이고, 그 이마는 가장 낮은 곳을 향해 숙이던 이마입니다. 이 평화의 메시지는 가깝게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에 편향적인 미국을 향하고, 멀리는 전 세계에 퍼져나갔습니다.

6월 21일, 교황은 이탈리아의 남부, 칼라브리아를 방문하였습니다. 이곳은 은드란게타란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의 은거지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교황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은드란게타는 악을 숭배하며 공동선을 경멸하는 집단입니다. 이와 같은 악은 퇴치되어야 하고, 그들은 추방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이미 파문되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바티칸과 마피아간의 검은 커넥션을 고려할 때 이 발언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바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대부3》에는 마피아와 부패한 정치인, 그리고 타락한 주교에 의해 교회를 개혁하려는 신임 교황이 독살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영화는 상당부분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실제로 마피아와의 단절은 바티칸엔 상당한 금전적 손해를 의미합니다. 이런 여러 요인들을 고려할 때, 마피아를 악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파문한 교황의 행위는 정말로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며 교황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건 이 세상의 모든 악을 끊고, 모든 선을 행함에 교회가 앞장서겠다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생각해 보면 부처님께서 일찍이 《아함경》을 통해 설하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고, 모든 악을 짓지 말라.[諸善奉行 諸惡莫作]”는 가르침 바로 그것입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복 십계명을 말합니다. “가족과 식사할 때는 TV를 꺼라.” “일요일만큼은 아이들과 지내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해라.” 등등…… 무엇 하나 일상에서 벗어난 게 없습니다.

옛날 조사들은 “차나 한 잔 하시게.”라고 하였지요. 밥 먹고 차 한 잔 마시는 일상이 그대로 부처의 세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작은 선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고, 작은 악이라고 하여 가벼이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며 아이들 말에 귀 기울여 주는 것부터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는 시작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 말씀을 가장 잘 실천하고 계신 분은 지금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닌가요? 이런 생각으로 우리 불교계를 돌아보면…… 글쎄요?

시절은 하수상한데 우리 큰스님들은 어디에 계신지. 세월호의 비극 이후에 연이어 터지는 참혹한 사건들로 이 땅엔 불안과 공포가 짓누르고 있건만, 우리 큰스님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는지, 벌써 해탈하셨기에 빈껍데기 같은 육신만 이 땅에 남겨놓고 계신 건지……

지금 제 책상 위에는 교황의 말씀을 담은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습니다. 《세상의 매듭을 푸는 교황 프란치스코》. 책장을 펼치니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가끔 저는 사람들에게 “거지에게 동냥을 주어 봤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그들이 “네.”라고 대답하면, 저는 다음으로 “동냥을 줄 때 그 사람의 눈을 바라봤나요. 아니면 그들의 손이라도 잡아 주었나요?”라고 묻습니다. “아니요, 저는 동전을 그냥 던져 줍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를 만지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를 만지지 않았다면 그를 만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유니세프에 매달 돈 몇 푼 나가게 해 놓고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라고 말이지요. 나를 반성하게 하는 교황. 이런 분이야말로 진정한 영적 지도자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이끌어줄 종교지도자를 불교계에서 바라는 건 어려운 일일까요? 가뭄에 단비를 기다리듯 진정 큰스님을 목말라 하는 이가 어찌 나 한 사람뿐이겠습니까만, 들리는 소리는 금구와는 거리가 한참 먼 얘기들뿐입니다. 유일하게 대승불교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에, 이 땅의 불교 지도자라면 곧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의 반열에 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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