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미학 가운데서도 정토미학 특별히 강조
81세 고령에도 불구 언제나 학문연구 몰두

나는 영문학과 불교문화 두 가지 전공을 했다. 불교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홍윤식 교수님이었다. 그분 덕에 불교문화재를 공부했고, 문학과 불교와의 접목도 가능했다.

동국대학교 전산원에서 교수로 근무할 때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선생님이 원광대학에 재직하시다가 동국대학교로 부임해온 무렵이다. 동국대학교 부총장을 지내신 허천택 선생님에게 선생님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기에 어떤 분인지 만나 뵙고 싶었다. 허 선생님은 산청의 초등학교 선배이자 대학시절 자취와 하숙을 함께 하고, 국악고등학교 교사로 함께 근무하는 등 우리 선생님과 인연이 깊으셨다. 허 선생님 덕분에 선생님과의 귀한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지난 4월23일 동방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연구소가 주최한 제3회 학술대회 '우리 그림과 미학의 만남'에서 기조강연을 하고 있는 홍윤식 교수.

동국대학교에서 근무할 당시 맺은 인연이 지중했던 것인지, 1994년 일산 신도시로 이사 갔는데 선생님과 이웃에 살게 됐다. 나는 302동, 선생님은 305동으로 가까웠던 탓에 매주 서너 차례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사모님께서 해주시는 밥을 먹고, 사찰 참배도 다니며 선생님과 나는 한층 더 가까워졌다. 우리 애들은 선생님을 ‘305동 교수님’으로 불렀을 정도다.

아이들이 중고생일 때 사춘기여서 그런지 힘들게 굴 때가 많았다. 그럴 때 선생님은 늘 다독여주셨다. 심지어 사모님과 함께 부부 동반 저녁 식사를 하다가 부부싸움을 한 적이 있다. 선생님은 언짢아하시기는커녕 “이런 다툼도 보약이니 잘 위하고 살라”고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셨다. 사실 내가 어려울 때 사모님 몰래 물질적인 도움도 주셨다. 아직도 사모님은 모르신다.

1997년 선생님을 모시고 인도에 성지순례를 갔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를 하며 부처님의 위대한 사상을 이해하는 계기가 됐고, 선생님과는 한층 더 가까워졌다.

사모님은 우리 가족을 참 아끼셨다. 집사람이나 나를 수시로 불러 무언가 챙겨주시고 베풀어주셨다. 유난히 춥고 눈도 많이 내린 겨울의 어느 날. 선생님 댁에 들렸는데 사모님께서 방에 들어가셔서 외투 두벌을 꺼내오셨다. 선생님께서 몇 번 입지 않으셨는데 맞으면 입으라고 건네주셨다. 입어보니 딱 맞았다. 값나가는 외투를 받아와 겨울을 참 따뜻하게 보냈다. 사모님의 마음은 이렇게 어머니 같다. 그래서 난 사모님을 관세음보살로 생각한다. 선생님의 체취를 느끼며 외투를 입고 출근해 동료 교수에게 자랑까지 했다. 그 교수는 우리 사제지간의 깊은 정을 부러워했고, 난 정말 뿌듯했다.

내가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는 사모님께서 절 방석을 선물로 주셨다. 하심을 많이 하고 신심을 더욱 키우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집안에 소박하게 만든 불단 앞에서 그 방석을 높고 매일 백팔 배를 했다. 몇 년 만에 헤어졌지만 사모님의 마음은 오롯이 남아 나를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사모님은 동국대 교수불자회 순례법회를 갈 때 집사람을 꼭 동행하도록 하셨다. 집사람의 신심이 돈독해지고 같이 신행생활을 더 깊게 할 수 있게 된 건 모두 사모님 덕분이다. 당시 정각원장이자 교수불자회 지도법사였던 법산스님과의 인연도 다 사모님 덕분에 맺을 수 있었다.

회고해보니 선생님은 나에게 영원한 정신적 멘토이자 보현보살이요, 사모님은 나에게 영원한 관세음보살이라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진다.

선생님이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장으로 박물관장으로 재직하실 때 나에게 문화재 공부를 하라고 권하셨다. 그게 시작이었다. 문화재 전공을 하게 됐고 선생님의 배려로 100%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선생님은 어느 누구도 기획하지 않았던 ‘고려불화전’을 기획하고 무사히 회향하셨다. 일본사찰에서 보유하고 있던 국보급 고려불화를 대여해오는 일은 국가가 나서도 쉽지 않았을 일이었다. 선생님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 나에게는 큰 복록이 아닐까 싶다.

1998년 국제포교사 3기 품수를 받고 활동하면서 국제포교사회가 만들어졌고, 나는 회장을 역임하면서 <문화재를 활용한 국제포교방안>이라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불교 토양서 자란 나는 영문학을 하면서도 불교문학에 더 마음을 뺏기곤 했다. 선생님과 인연 맺은 계기로 더 불교에 빠져들었다.

작은 소망이 있다면 가는 데마다 불교신행단체를 만드는 게 원이다. 1978년 용인에서 불교학생회를 창립해 지도교사를 4년 했던 것을 시작으로 동국대에 와서는 전산원에 반야회를 만들어 15~16년을 이끌었다. 선생님은 늘 오셔서 격려를 해주신다. 나의 작은 포교활동에 선생님이 큰 힘이 되고 있다. 내가 불교포교운동에 나름대로 진력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과 사모님의 보이지 않는 큰 배려와 보살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생님은 불교의례와 문화재에 관심이 많으시고 많은 업적을 만들어내셨다. 특히 불교문화예술에 대한 미학적 입장으로 바라보는 걸 좋아하신다. 덕분에 나도 불교문화예술을 미학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선생님은 내게 불교미학학회를 만들어 이끌어보라고 조언을 해주신다. 아직 결성을 하진 못했지만 15명 정도가 모여 의견 교류를 하면서 연말 즈음 불교미학학회 발족을 준비하고 있다. 선생님을 고문으로 모시고 많은 걸 배울 참이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참 신기한 부분이 있다. 우선 선생님과 나는 생일이 같다. 출신도 산골 출신이라 공통점이 있다. 선생님의 고향은 지리산 자락 산청이고, 나는 김천 수도산 자락에서 자랐다. 선생님께서는 늘 “나이차는 20년 나지만 같은 문화환경에서 자랐다”고 말씀하시며 그래서 더 동질감이 느껴진다고 하신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나의 유소년 시절은 워낙 문명의 혜택이 더뎠던 산골인지라 순수한 성장환경이 선생님 시절과 그리 다를 바 없다는 것에 공감한다.

요즘도 일주일에 한두 번 선생님을 만나는데, 선생님은 “제자를 사랑하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신다. “학문하되 인기 있는 학문 말고 ‘덕’이 있는 학문을 하라”는 말씀도 강조하시는 편이다. “늘 하심하면서 살라”는 말씀 또한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손해 본 듯 하게 살다보면 언젠가 회향돼서 돌아올 거다”는 말씀 또한 가슴에 고이 담고 있다.

곁에서 지켜본 선생님과 사모님은 보현보살과 관세음보살 같은 분이다.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내 영원한 지주이시다. 넓고 자비로운 모습을 지니신 분이다.

선생님이 삼회향 놀이, 영산재 연구를 할 때 옵저버로 동참해 선생님의 연구를 도왔다. 선생님의 기존의 범패를 발굴하셔서 이것이 영산재로 격상되는데 일조하셨다. 봉원사에서 10회에 걸쳐 영산재 세미나를 개최할 때도 늘 참가하셨다.

2007년 어느 날 문광부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의 불교문화를 알고 영어가 되는 사람을 찾는데 마침 내가 선택이 된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문화의 집 상상축제’서 아르와르 에스베르 ‘세계 문화의 집’ 관장 겸 예술감독이 내한했는데 불교문화를 안내해줄 통역자 역할을 했다.

에스베르 감독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다니며 각 나라의 독특한 문화를 소개하는 작업을 준비 중이었다. 이미 일본과 중국 답사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우리나라를 찾은 것이다. 일주일 동안 한국의 불교문화를 소개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영산재를 보고 싶어 했다. 6월6일, 영산재 시연이 있는 날이어서 하루 종일 공연을 보고 다음날 새벽예불과 발우공양을 경험하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에스베르 감독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일본과 중국에서 문화실태 조사한 것을 모두 제치고 한국 영산재를 파리 상상축제에 초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영산재를 상상축제에 선보이기 위해 1년을 준비했다. 2008년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구해스님을 비롯해 영산재보존회 스님 서른 세분을 모시고 프랑스를 다녀왔다. 12일 동안 파리에서 2번, 리옹에서 1번, 세리랑서 1번의 공연을 마쳤다. 연인원 2천여 명이 영산재를 관람했다. 영국과 독일, 스위스에서도 관람 와서 기립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당시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에 들려 한국 영산재의 의미를 설명하고 기자회견도 열었다. 그리고 1년 후. 2009년 9월 추석을 앞두고 영산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나는 이 일이 영산재 복원에 힘썼던 선생님의 뜻을 이은 거 같아서 감회가 남다르다. 우리의 불교문화가 세계적인 것이 된다는 걸 알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운 기억이다.

‘영산재의 프랑스 공연’ 진행과 홍보에 대한 공로로 봉원사로부터 공로패와 부상을 받은 것도 선생님께서 살펴주신 덕분이었다. 선생님은 영산재의 세계화를 위한 체계적 교육도량의 필요성을 강조하시고 나름의 계획을 구상하고 있다.

영산재 연구 후에도 선생님은 연등축제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이론적 배경을 세워주시고, 수륙재 관련해서는 진관사 삼화사의 수륙재 문화재 지정에도 큰 힘을 보태셨다. 다양한 불교의례 의식 등에 깃든 불교사상과 정신문화적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을 하시 거다. 그 속에서 불교미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 또한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불교예술은 불심의 표현이다. 메타포라든지 장치를 통해 표현되느냐에 따라 부처님에게 다가가는 다양한 방법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 백원기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
선생님은 불교미학 가운데서도 정토의 미학을 많이 말씀하신다. 극락세계의 아름다움 추구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불심이나 불교적 아름다움인 것이라는 설명이다.

요즘은 선생님과 10분 거리에 산다. 출근하면서 선생님 댁에 들려 차 한 잔 마시고 오기도 하고, 지척에서 살고 있는 것이 정말 좋다. 최근 선생님은 81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북유럽을 다녀오셨다. 좀 피곤하시다며 댁에서 칩거 중이시다.

하지만 여전히 연구와 일을 놓지 않으신다. 글을 부탁하면 기꺼이 써주시고, 지난 4월 불교미학 세미나에는 직접 발표까지 해주셨다. 내년에는 ‘불교미학’ 관련해 언론 연재로 시작하실 계획이다.

내 인생 큰 줄기를 결정할 때마다 지혜로운 안목에서 방향을 일러주신 분, 홍윤식 선생님. 앞으로도 선생님과의 인연을 아름답게 이어나가고 싶다.

-백원기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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