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새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누구?
인화력·리더쉽 겸비, ‘외강내유(外强內柔)’ 형
정치력 돋보이지만 수행 경력 부족은 약점
2009-10-22 서현욱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제33대 총무원장으로 선출된 자승(慈乘) 스님은 종단의 대표적 사판(행정승)으로 꼽힌다. 1954년 4월 강원도 춘천태생으로 올해 56세이다. 스님은 1972년 10월 해인사에서 지관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74년 4월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은사는 제30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월암 정대 스님이다. 동화사 선원 안거를 시작으로 봉암사 선원 등에서도 정진했다.
조계종의 종무행정을 책임지는 총무원장이 되기까지 자승 스님은 종단의 주요 교역직을 하나씩 밟아왔다. 1986년 총무원 교무국장으로 출발, 규정국장을 지냈고, 94년 종단개혁 이전인 1992년 10대 중앙종회의원으로 종단 중앙무대에 본격적인 발을 내딛었다.
94년 종단개혁과정에서 승적정정 문제로 징계를 받았으나 1996년 11대 중앙종회에 재입성, 종회 사무처장을 지내며 조계종 입법기구의 일원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2, 13, 14대 중앙종회의원을 지냈고, 14대 중앙종회에서는 전반기 의장으로 조계종의 ‘국회’인 중앙종회를 이끌었다. 특히 스님은 중앙종회 의장 시절 ‘신뢰와 소통의 리더쉽’으로 종회 내 각 종책모임의 이견과 총무원과의 종무를 조정하는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고, 이 과정에서 주변에서 상당한 신임을 쌓은 것으로 평가된다.
자승 스님은 종단 내에서 수행과 포교 등 역할이 미진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오랜 기간의 숙고 끝에 총무원장직에 도전했다. 이 과정에서 스님의 행보는 ‘정중동(靜中動)’이었다는 것이 주변의 설명이다. 다양한 종무행정직을 수행하면서 조용하면서도 꼭 필요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고 있다.
은사 월암 정대 스님이 설립한 은정불교문화진흥원의 2대 이사장을 맡아 인재양성에 관심을 쏟았다. 특히 제33대 총무원장 선거를 한 달 여 앞두고 개최한 ‘제1회 불교교리경시대회’는 지금까지 누구도 시행하지 않았던 새로운 포교방법을 선보여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교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자신을 종단내외에 각인시켰다. 또 13대 중앙종회의원 시절 종책모임인 ‘화엄회’를 구성, 종단발전을 위한 종책 제시와 국제교류활동에도 나선 점도 눈에 띤다.
화엄회는 중앙종회 의원 외에도 종책 개발과 실천에 관심 있는 스님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이면서 중앙과 지역을 모두 아우르는 하드웨어를 구축했고, 2권의 종책 자료집과, 3회의 종책 포럼을 열면서 소프트웨어도 확장해 왔다. 이중 2006년 발간한 종책자료집 《미래불교를 준비한다》는 전국 250여 지자체의 종교 인구 통계를 모아 지역 및 계층포교에 관심을 촉발시키기도 했다.
베트남 고엽제 피해자 지원과 캄보디아, 미얀마 등 동남아 국가의 저소득계층에게 한국불교의 보살심과 사회성을 전하면서 포교 이력을 확장시켜왔다. 국제포교 사업은 독자적 사업에 머무르지 않고, 로터스 월드와 지구촌공생회 등 교계 국제불교 단체 지원으로 확장했다. 독자적으로 모든 것을 책임지기 보다는 함께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판단에서이다.
자승 스님의 본사는 용주사이다. 용주사 말사주지로서의 역할도 두루 거쳤다. 1982년 영월암 주지를 시작으로, 망경암, 대덕사, 삼막사, 연주암 주지 등의 소임을 살았다. 특히 연주암 주지 당시 터진 외환위기 시절, 하루에 5,000여명의 등산객에게 무료 비빔밥을 공양하며, 실의에 찬 대중들을 위로했다. 경제적으로 사중에 큰 부담이었지만 실직한 등산객들에게 비빔밥 공양을 멈출 수 없었고, 그 대상은 차별하지 않았다. 지금도 주말이면 2,000여명의 사람들이 공양한다. 연주암은 산중사찰이지만 도심과 괴리된 사찰은 아니다. 자승 스님은 이때 ‘복지불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97년 과천종합사회복지관을 직접 운영했고, 과천 시민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지역신문 〈과천21〉 발행했다.
자승 스님과 뗄 수 없는 일이 ‘은정불교문화진흥원’이다. 은사 월암 정대 스님이 속가 어머니의 유산을 인재불사를 위해 희사해 설립한 ‘은정불교문화진흥원’을 은사 열반 후 스님이 이어 받았다. 자승 스님은 은사의 유지를 이으면서도, 불교학자 지원을 통한 불교학 발전이라는 새로운 인재불사 방안에 눈을 돌렸다. 박사학위논문 가운데 일반에 보급되지 않는 우수한 논문을 모아 책으로 발간한다. 이 책이 〈은정학술총서〉이다. 또 장학재단의 대상을 교계 언론사, 신행단체 종사자의 자녀들에게까지 확대했다.
자승 스님의 총무원장 당선과정에서 돋보인 것은 ‘정치력’이다. 세 과시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입법기구인 중앙종회의 4개 종책모임의 지지를 등에 업었고, 20개 교구본사 주지들이 후보추대식에 참석하는 압도적인 지지 속에 일찌감치 총무원장 당선이 점쳐졌다. 이는 선거를 준비하면서 밟은 과정만은 아니라는 게 주변의 해석이다.
총무원 총무부장 당시 열린 32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당선되지 못한 정련 스님을 부산까지 찾아가 위로했다. 당시에는 피아 구분이 없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정련 스님이 동국대 이사장이 되면서 소원했던 종단관계를 개선하는 데 단초가 되었다는 게 주변 분석이다.
30대 총무원장을 지낸 월암 정대 스님의 상좌인 점만 봐도 짐작이 될 듯하다.
자승 스님은 은사인 월암 정대 스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걸로 보인다. 조계종 사회부장 2회, 재무부장 4회, 총무부장 3회, 8선의 중앙종회의원과 종회의장, 총무원장, 동국대 이사장 등을 역임한 이사 무애의 당대 최고의 사판승을 시봉하면서 종단내외의 인맥과 역학관계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을 것이며, 이번 선거에서 이 같은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는 게 주변의 시각이다.
자승 스님의 평소 스타일은 ‘투박’하다. 주변의 평은 ‘외강내유(外强內柔)’형이다. 투박함 가운데 자상함이 있다는 것이다. 은사 정대 스님을 닮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보통 은정불교문화진흥원이 위치한 ‘은정빌딩’ 4층의 2평 정도의 방을 요사로 쓴다. 은사 월암 스님의 진영이 모셔진 방 옆에 마련된 요사의 미닫이문을 열면 눈에 띄는 게 석주 스님이 쓴 ‘인중유화(忍中有和; 참는 가운데 화합이 있다)’ 액자다. 성격을 반증하는 듯하다.
자승 스님이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96년 11대 중앙종회 사무처장에 피선됐을 때다. 언변이 뛰어나진 않지만 의장단의 의중과 의원 스님들의 큰 목소리를 어눌한 듯 하면서 힘 실린 웃음으로 심부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자승 스님은 출가 때부터 지금까지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 한 가지 있다. 사미승 시절 사진 1장을 항상 몸에 지닌다.
자승 스님의 좌우명은 지눌 스님이 말한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선다’는 말이다.
스님은 평소 “우리가 사는 현실이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현실을 버리고 살 수는 없다. 발을 땅에 붙이지 않고 허공에 살 수 없듯이 인간의 행복은 바로 삶의 현장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해 왔다.
서현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