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젊은 엄마 블로그를 방문했습니다. 5살짜리와 더 어린 아들을 둔 엄마인데, 도서관을 방문했다가 푸대접 받은 사연을 적어놓았더군요. 보통은 이런 경우 글 쓴 사람의 감정에 동조되는데 이번에는 글을 읽을수록 그녀가 이해 안 됐습니다. 자신이 잘못했는데도 다른 사람 잘못으로 상황을 이해하는 사고체계가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두 아들을 데리고 도서관에 갔는데 애들이 도서관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다녔던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직원이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얼마 후 아이들은 또 뛰어다녔고, 이번에는 엄마인 글쓴이에게 다가와서 아이를 조용히 시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불평은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왜 애들이 뛰어다니면서 놀 수 있는 도서관은 없냐면서 자신의 아이에게 조용히 하라고 지적한 도서관 직원이 정말 얄밉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도서관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5년 전에는 분명 이런 식으로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뛰어다니는 아이를 봤다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는데도 아무 조치 않는 부모를 이해할 수 없어 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식의 감정과 기분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이게 인간 사회의 규칙이니까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인데 갑자기 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요? 과연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엄마가 된다는 것이 이렇게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일까요? 생각 체계를 송두리째 바꿔버릴 정도로.

봉준호 감독의 <마더>(한국, 2009)를 보고나서 이 젊은 엄마를 얼마간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엄마’라는 이름표를 달면서 여자들은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오던 자아는, 몸뚱이를 중심으로 한 ‘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생기면서 자신의 몸뚱이 보다 자식이 먼저가 되는 것입니다.

<마더>의 엄마는 다 큰 아들이 도로에서 개하고 장난하는 것을 아슬아슬한 시선으로 지켜봅니다. 이어 뺑소니차가 아들 도준을 치면서 지나갔고, 엄마는 비명을 지르면서 달려갔습니다. 아들 얼굴을 어루만지는데 피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엄마의 관심 같은 거 귀찮다는 듯 친구와 가버리고 엄마는 여전히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도준의 얼굴에 묻어있던 피는 엄마 손가락에서 나온 피였습니다. 약초를 자르다가 절단기에 자기 손가락을 베었던 것인데, 엄마는 자식 걱정 때문에 자기 손가락 아픈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이 상황을 보더라도 엄마의 자아는 자신의 몸뚱이보다도 자식이 먼저였습니다.

엄마라는 존재는 이렇게 자신을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마더>에서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은 사뭇 삐딱합니다. 자기 엄마가 아닌 친구 엄마를 바라보는 쪽으로 모성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친구 엄마라는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엄마’ 라는 존재는 자기 자식 밖에 모르는 좀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앞에서 도서관 젊은 엄마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었습니다. 도서관이 자기 아이들 놀이터가 되기를 바라는 그 엄마는 분명 세상이 자기 자식을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자아의 중심이 자식에게로 옮겨간 엄마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적어도 자아가 자기 몸뚱이에 머물 때는 어른으로서의 참을성과 분별심을 가질 수 있지만 자아가 아이에게로 옮겨가면, 아이들의 극단적인 자기중심성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세상의 중심이 자식에게로 옮겨가면서 엄마들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지옥의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준비가 돼 있습니다. 심지어 <마더>의 엄마는 자식을 위해 살인까지 저지릅니다. 도대체 자식이 무엇이기에?

엄마에게서 자식은 타인이 아니었습니다. <마더>에서 엄마는 어렸을 때 사는 게 어려워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엄마는 바카스에 약을 타서 5살짜리 아들에게 먼저 먹였습니다. 그런데 성장한 아들은 이걸 기억해내고 엄마에게 따졌습니다. “엄마가 나를 죽이려고 했지?” 그러자 엄마는 “너는 곧 나인데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 게 당연하다”고 대답합니다.

이렇게 엄마는 자식과 자신을 동일체로 보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미뤄봐서는 엄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애의 한 변형인 것입니다. 자기 몸을 애지중지 해서 맛있는 거 먹이고, 좋은 데 재우고, 혹시라도 병들까봐 노심초사하는 것의 연장선에 엄마의 자식 사랑이 있는 것이지요. 영화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모정’이라고 추앙받고 있는 감정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자기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집착적 사랑에 대한 윤리적 판단과 더불어 인간 삶의 부조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위해 거름의 악취를 풍길 수밖에 없는 엄마들의 슬픈 운명은 오프닝과 엔딩의 춤 장면을 통해서 표현되는데, 절망과 광기, 슬픔과 불안, 등등의 감정이 표출된 춤사위는, 결코 행복하지 못한 엄마 자리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마더>의 마더는 군 단위의 도시에서 약간 모자란 아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설정이 좋았습니다. 28살이나 된 아들이 정상이었다면 엄마의 이런 모성애는 불가능하니까요. 사춘기만 돼도 다른 인격체로서 엄마로부터 분리가 일어나는데 도준이라는 애는 좀 덜 떨어졌기 때문에 여전히 엄마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자식이고, 엄마는 다 큰 아들이 밖에서 친구와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애기 엄마들의 노심초사를 보입니다. 혹시 아들이 나쁜 친구를 사귀지는 않을까, 교통사고라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 아들을 염려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은 살인사건에 휘말립니다. 그 동네서 여고생이 죽었는데 사건 현장에서 도준의 이름이 적힌 골프공이 나왔고, 아들은 영락없는 살인자가 됐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물방개 한 마리도 죽일 수 없는 여리고 착한 아들이 사람을 죽였을 리 없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직접 범인을 찾아 나섭니다.

엄마는 감옥에 갇힌 아들을 찾아가 관자놀이를 지압하면서 뭔가를 생각해내라고 종용합니다. 그날 밤의 일을 정확하게 기억해내면 감옥에서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아들에게 관자놀이를 눌러 기억을 끄집어내라고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마더의 기대와는 다르게 돌아갔습니다. 엄마의 뜻에 따라 도준은 교도소에서 열심히 관자놀이를 눌러 기억들을 하나씩 끄집어냈습니다. 마침내 어떤 노인의 얼굴을 기억해냈고, 마더는 노인을 만났습니다. 노인이 범인이라는 가정을 하고 단서를 찾기 위해 고물상을 하는 노인 집으로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우연히 노인은 사건 현장이 보이는 건물에 있었고, 사건의 전말을 지켜봤다고 했습니다. 도준이 여고생 뒤를 졸졸 따라갔는데 여고생이 “바보야”라고 했고, ‘바보’라는 말에 과민한 도준은 여고생을 향해 돌을 던졌고, 돌은 여고생의 머리에 맞았고, 소녀가 죽자 도준이 시체를 옥상으로 끌고 가 빨래 널듯이 걸쳐놓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마더는 도준은 절대로 범인이 아니라고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노인의 입을 통해 들은 얘기는 자기 아들이 범인임이 틀림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마더는 아니라고 소리 지르면서 도준은 곧 풀려날 것이라고 했고, 노인은 범인이 틀림없다면서 경찰한테 진실을 알려줘야겠다면서 전화기를 들었고, 마더는 순간 망치를 내리쳐 노인을 죽였습니다. 아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에 무의식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밖으로 나온 마더는 얼빠진 모습으로 무작정 산을 올라갑니다. 갈대밭이 우거진 산의 모습은 영화 오프닝에 나왔던 모습입니다. 오프닝에서는 난데없이 마더가 갈대밭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무표정에 가깝지만 조금 미쳐있는 것도 같고 절망에 빠진 모습 같기도 하고, 슬퍼도 보이는 그런 다중적인 느낌이었는데, 이 춤 장면은 바로 누군가를 죽이고 나왔을 때의 감정과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이 춤 장면은, 철저하게 파괴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마더는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 지경에 이른 것일까요? 마더는 그저 자기 삶을 소모하면서 자식 뒤치다꺼리를 했을 뿐입니다. 야매로 침을 꽂고, 중국산 약초를 국산이라고 속여 팔고, 그렇게 번 돈으로 도준에게 고기를 먹이고, 도준 술값을 대고, 약까지 해 먹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도준을 위해 살인까지 저질렀습니다. 마더의 잘못이라면 자식을 사랑한 죄밖에는 없는데, 벌은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이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마더>의 죄인들 또한 면죄부를 받습니다. 현실의 부조리함을 표현하고자 하는 감독의 전략이겠지요. 마더의 노인 살인은 완전범죄로 끝났고, 도준 또한 더 멍청하면서 거기다 엄마까지 없는 종팔이라는 애가 대신 죄를 뒤집어썼고, 마더와 도준은 일상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아무 죄도 짓지 않은 그때처럼 그들은 밥을 먹고, 물을 나눠 마십니다.

모든 것이 은폐되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평화로워졌지만 불안과 긴장감이 영화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도준이 건네준 침통을 받아들고 마더는 패닉 상태에 빠지고, 효도관광 버스에서는 떨리는 손으로 허벅지에 침을 꽂은 후 사람들에 섞여 미친 듯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더가 비록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결코 전과 같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모습들입니다. 마더가 죄의식에 갇혀 있음을 읽을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자식을 향해 질주해오던 마더가 자신을 되돌아보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도준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힌 종팔이라는 아이를 만난 마더는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참회의 눈물이었습니다. 절대자 앞에서 죄 많은 인간이 참회의 눈물을 보이는 것처럼 자식에 대한 집착으로 알게 모르게 많은 죄를 지어온 마더는 종팔이라는 순수하고 깨끗한 영혼 앞에서 진심을 보여줍니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마더가 자신으로 돌아온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더는 다시 도준 엄마로 돌아갑니다. 종팔에 대한 미안함, 죄의식 이런 거를 잊기 위해 침을 꽂고 춤을 추고, 그러면서 아들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엄마의 삶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마더를 보여주면서 영화는 막을 내리는데, 참 찜찜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세상 모든 엄마들의 운명은 이렇게 가혹한 것인가, 하는 생각에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