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해스님이 항일운동을 위해 불교계 비밀결사 조직 '만당'을 결성한 사천 다솔사 안심료.

사천 다솔사… ‘만당’ 근거지
일제강점기에 항일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됐던 사찰들이 있다. 그 가운데 사천 다솔사는 항일운동유적지로 손꼽히는 사찰 가운데 하나다. 만해 한용운 스님이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항일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됐던 사찰들이 있다. 그 가운데 사천 다솔사는 항일운동유적지로 손꼽히는 사찰 가운데 하나다. 만해 한용운 스님이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다솔사는 소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나무 숲이 장관을 이룬다. 사찰로 들어서는 길에서부터 자연의 힐링이 시작되는 사찰이기도 하다. 신라 지증왕 때 영악사로 창건돼 도선국사가 다솔사로 이름을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해온다.

다솔사 안심료는 만해스님의 거처였다. 스님은 이곳에서 항일투쟁을 위해 불교계 비밀결사조직인 만당을 조직·운영했다. 장장 12년간 스님은 안심료에 머물렀다.

다솔사에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다. 적멸보궁 앞에는 파괴돼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탑이 있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나온 탑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 이 탑에서 나온 불사리 108과를 응진전 탱화 뒤에 숨겼다는 아픈 이야기가 전한다.

안심료 옆에는 만해스님이 회갑이던 1939년, 김범부, 김법린, 최범술, 허백련 등과 함께 심었다는 황금 편백나무 세 그루가 남아있다. 여전히 푸른 편백나뭇잎이 만해스님의 기백을 보여주는 듯 당당하다.

서울에는 만해스님이 말년을 보낸 심우장이 있다. 1933년 심우장에 오기 전까지 한용운의 독립운동 활동에 비해 독립운동 사실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하지만 1944년 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배일적 태도를 보였고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건물이 조선총독부를 바라보지 않게 북향으로 지은 곳이 심우장이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정통불교를 말살하고 왜색불교를 심으려는 일본에 대항해 세웠던 (재)선학원 중앙선원 역시 만해스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남한산성로에 위치한 만해기념관에서는 만해스님을 기리는 다양한 전시와 스님이 남긴 유물을 만날 수 있다.

백용성조사 유적지…대중불교운동 앞장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불교계 대표로 참여해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한 백용성 조사를 기리는 백용성조사 유적지는 전북 장수에 있다. 대중불교운동과 민족계몽운동에 일생을 바치신 백용성조사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곳이다.

▲ 강화 전등사.

강화 전등사…대규모 반일집회 강화의병전투지
강화진위대장 출신으로 강화도민의 신망이 높던 이동휘는 1907년 7월 전등사에서 김동수와 허성경 등의 기독교인을 비롯해 해산군인 400여 명을 모아 합성친목회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반일집회를 열어 일반 군중을 고무시켰다.

강화진위대장 출신으로 강화도민의 신망이 높던 이동휘는 1907년 7월 전등사에서 김동수와 허성경 등의 기독교인을 비롯해 해산군인 400여 명을 모아 합성친목회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반일집회를 열어 일반 군중을 고무시켰다.

또한 이능권은 부내면 국정리 출신으로 시위대 장교였는데 군대해산 후 낙향해 주민들을 모아 대동창의단을 조직했다.

친일파ㆍ밀정 등을 처단하고, 강화 전역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던 중 1908년 10월 하순 용산에서 출동한 일본군과 정족산 전등사에서 일주일에 걸쳐 전투를 벌였다. 1908년 의병의 항전이 이어지자 일본군은 같은 해 10월 용산주둔 일본군 6사단 예하의 13연대 70여 명의 정규 병력을 강화로 투입했다. 10월30~31일 양일 간 일본군의 공세가 거셌지만 전등사의 이능권부대는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격퇴해 승리했다.

전등사는 국난 극복의 호국도량으로 유명하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고 양헌수 장군은 전등사 사부대중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함대를 물리쳤다. 전등사 대웅전 내부 기둥과 벽화에는 병인양요 당시 부처님의 가피로 승전을 기원하고자 하는 군인들의 염원이 낙서로 남아있다.

양평 사나사…의병 근거지라는 이유로 불타
1907년 10월 27일 의병이 일본군 재경성 제51연대와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당시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라는 이유로 사찰을 모두 불태우는 아픔을 겪었다. 그후 꾸준히 재건을 거쳐 지그의 가람이 만들어졌다.

고성 옥천사…경남 애국지사들의 거점
변상태, 이주현 등 일제시기 경남지역 애국지사들의 주요 거점이 된 사찰이 바로 옥천사다. 옥천사 신화수스님은 김상옥 등과 함께 혁신단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신공보'를 발행, 배포하는 등 독립정신을 고취하는데 앞장섰다.

한봉진스님은 1919년 무렵 대한독립단에 가입해 상해임시정부 지령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윤영백과 함께 옥천사를 거점으로 활동했다.

삼척 삼화사…의병 근거지로 집중 포화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지었다고 전하는 삼화사는 1905년 의병이 이곳을 근거지로 활약했다. 1907년 일본군의 공격으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중건했다. 임진왜란 때는 관군과 의병들이 삼화사의 병참지원을 받으면서 두타산성에 들어가 결사항전으로 왜군과 싸운 사실도 이 지방에서는 큰 자랑거리다.

대흥사 흥국사 등 임란 등에 의승군 거병
일제강점기는 아니지만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에도 의승군의 활약은 뛰어났다. 범어사, 흥국사, 대흥사, 화방사, 건봉사, 안국사 등에서 서산대사, 사명대사, 기허대사 등 의승군이 활약했다.

-강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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