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한 20년 전쯤의 일이다. 대구 시내 중심가 나갔다가 우연찮게 목판본 《금강경》을 구했다. 전체가 2책(冊)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내 주머니 사정으로는 상당한 거액을 지불했다. 한지에 목판본 글자가 꿈틀대듯이 새겨진 것이 맘에 들어, 눈 딱 감고 샀었다. 굵게 새겨진 경문(經文) 옆으로 오가(五家)라 일컬어지는 쟁쟁한 선사들의 해석이 곁들여 있는 판본이었다.

한동안 옆에 두고 서툰 한문 실력으로 조금씩 살펴봤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오래된 한지와 짙은 먹물 향기가 배어나왔다. 책의 맨 뒤편 간기(刊記)에는 강희(康熙) 18년 기미년(己未年)이라고 적혀있었다. 서기로는 1679년이니 임진왜란 이후 100년쯤 뒤에 만들어진 것이다. 판각한 곳은 울산군(蔚山郡) 운흥사(雲興寺)로 되어 있었다.

책의 정확한 명칭은 《금강경오가해설의》다. 당시 내 깜냥으로는 너무 어려운 책이었다. 더듬거리며 살펴보는 중에 가슴을 친 말귀는 ‘여’(如)라는 한 글자였다. 《금강경》 전체가 이 한글자로 조여들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가로 칭해지는 다섯 사람의 대가들은 간명하면서도 심오하게 이 한 글자의 의미를 짚어나가고 있었다.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면 늘 ‘여’(如) 한 글자가 다시 떠오른다. 언제부턴가 쓰이고 있는 Buddha’s Birthday라는 정체불명의 외래어 때문이다. 이것과 연관해서 크리스마스(Christmas)도 생각난다. 둘 다 성인이 세상에 온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날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크리스마스(christmas)라는 단어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Christ와 미사를 뜻하는 mas가 합쳐진 말이다. 크리스마스의 정확한 뜻은 예수의 탄생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미사(Christ’s Mass) 즉 ‘그리스도를 기리는 날’ 정도가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크리스마스라는 것은 없었다. 성서(聖書)상의 근거는 없는 것이다.

12월25일 역시 예수의 생일이 아니라고 한다. 지중해 전 지역에서 로마인들이 신봉했던 불멸의 태양신(太陽神)인 미트라(Mitras)의 생일이란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의 생일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지 말라는 신(神)이 뜻이 반영된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기념일이라는 것들은 대개 의례(rite)의 성격이 강하다. 사실(fact)를 재확인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식목일에만 나무를 심으라는 법이 없고, 개천절에 정말 처음 하늘이 열린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날을 정해 성인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을 두고 굳이 따질 일은 못된다.

하지만, 기념이 자칫 종교적 의미를 훼손해서는 안될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반대하는 이들이 지적하는 지점은, 12월 25일은 예수의 생일이 아니라는 사실(fact)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인의 ‘탄생’을 기념하는 일이 자칫 종교적 의미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위가 오히려 반 예수적인 행동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선설(禪說)]

여우가 말했다.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도 전생을 더듬어 올라가면, 가섭불(迦葉佛) 때만 해도 어엿한 승려로서 제자들을 지도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한 학인(學人)이 '크게 수행해 철저히 깨달은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저는 '불락인과(不落因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탓에,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제가 여우의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부디 한마디만 해 주십시오.

여우가 길게 설명한 뒤에 선사에게 물었다.
-스님, 크게 수행해서 철저히 깨달은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불매인과(不昧因果)

그 순간에 크게 깨달은 여우가 절하면서 말했다.
-덕분에 여우의 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시신은 뒷산에 있을 것이니, 죽은 승려를 보내는 절차로 장사지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날 선사는 제자들을 이끌고 뒷산에 올랐다. 바위 밑에서 여우가 한 마리 죽어있었다.

백장야호(百丈野狐)라는 유명한 공안이다. 《무문관(無門關)》이라는 책에서 볼 수 있다. 인과란 곧 생사(生死)다. 생사를 잘못 보면 인과를 잘못 보는 것이다. 선(禪)에서는 늘 생사대사(生死大事)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살고 죽는 게 큰일일 수밖에 없다는 그냥 그런 심정을 토로한 것은 아니다.

생사대사라는 말에는, 생사의 문제를 잘못 보면 모든 것을 망친다는 절박함이 있다. 오죽하면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는다고 했을까. 석가탄신일도 탄신이니 생사와 관련된 문제다. 따라서 무작정 기념할 것이 아니라, 생사문제를 이해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수행자다.

《금강경》 가운데 여래(如來)를 설명한 구절이 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如來)가 온다거나 간다거나 앉는다거나 눕는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란 어디로부터 오는 바도 없고 또한 어디로 가는 바도 없기 때문에 여래라 부른 것이기 때문이다.”

《금강경》에서는 분명 여래를 두고 온다거나 간다고 말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오고감이라는 말은 여래라는 말과는 양립할 수 없다. 함께 있으면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여래가 왔다거나 태어났다는 말은, ‘네모난 동그라미’ 혹은 ‘유리로 만든 쇠붙이’처럼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이런 표현을 두고 논리학에서는 형용 모순(Oxymoron)이라고 부른다.

Buddha’s Birthday라는 정체불명의 외래어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말귀는 너무 가혹하다. 생일(birthday)이라는 영어표현은 너무 확정적이어서 다르게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석가탄신일을 굳이 영어로 표현해야 한다면 Buddha’s day 정도로만 해도 무난했을 것이다. 1년에 하루정도 부처의 날을 정해 기념한다는 데 문제될 것이 없다. Birthday라는 표현은 나가도 좀 너무 나갔다.

‘여’(如)라는 한 글자는 너무 절실해서 오히려 까마득하다. 하지만 이 한 글자의 아득함에 대한 사무침을 놓치게 되면, 부처는 영원히 우리 곁에 오지 않을 것이다.

-박재현(동명대학교 불교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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