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止觀法門>
○ 外人曰 余解昧識微聞斯未能即悟 願以方便更為開示

<지관법문>
○ 외인이 말하였다.
“저는 견해가 어둡고 견식이 희미하여 이 지관법문을 총체적으로 앞에서 들었더라도 바로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방편으로 다시 이 지관법문을 열어 주소서.”

<지관강해(止觀講解)>

● 外人曰
먼저 ‘외인(外人)’이라 한 이유를 살펴보아야겠다. 앞에서 대사는 지관법문을 총체적으로 요약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질문자는 도저히 그 설명을 알아듣지 못하니 여전히 ‘외인’이라 칭한 것이다.


자성 청정한 마음을 밝히고 체득하여 문을 얻어 깨달아 들어가면, 이제 ‘내인(內人)’이라 부를 수 있다. 천태 원교(圓敎) 법문의 명자위(名字位)는 이치를 올바로 알기 때문에 ‘내인’이라 칭한다. 그 문을 얻지 못한 이는 전부 ‘외인’에 해당된다. 정리하면 언제든지 내 마음이 자성청성심이라는 근본을 알고 깨달아 들어가야 비로소 ‘내인’이 된다.

● 余解昧識微聞斯未能即悟
‘해매(解昧)’는 견해가 없다는 말이다. 즉 자신의 지혜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식미(識微)’란 식견이 한미(寒微)하다는 말로, 자신의 견해가 천박하고 얕다는 의미다. 질문자는 문답에만 얽매여 있어 아직 확연하게 알아듣지 못한 상태다. 또한 귀로 듣기는 들었어도 내증(內證)의 마음에서는 지관법문의 이치를 받아들이고 깨닫기가 가히 쉽지 않은 상태다.

위의 문장에서 ‘사(斯)’라고 하였다. 앞에서 대사께서 지관을 총체적으로 설명해 준 것을 한마디로 가리킨 것이다. 이어 나오는 ‘즉(即)은 ‘바로 그 자리에서’라고 풀이할 수 있는데, 문장을 살펴보면 질문자가 바로 그 자리에서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한 알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 願以方便更為開示
그러므로 질문자는 ‘원하옵건대 대사께서는 다시 훌륭한 솜씨의 선교방편으로 저의 심지를 열어서, 지관수행의 길을 제시하여 주옵소서(願以方便更為開示).’라고 간절히 청한 것이다.

<止觀法門>
○ 沙門曰 然更當為汝廣作分別 亦令未聞尋之取悟也 就廣分別止觀門中作五番建立 一明止觀依止 二明止觀境界 三明止觀體狀 四明止觀斷得 五明止觀作用 就第一依止中復作三門分別 一明何所依止 二明何故依止 三明以何依止 (1)

初明何所依止者 謂依止一心以修止觀也 就中復有三種差別 一出眾名 二釋名義 三辨體狀 初出眾名者 此心即是自性清淨心 又名真如 亦名佛性 復名法身 又稱如來藏 亦號法界 復名法性 如是等名無量無邊 故言眾名 (次辨釋名義) (2)

<지관법문>
○ 사문께서 말씀하셨다.

(1) “그렇기도 하겠다. 다시 그대를 위해 자세히 분별하고 설명하니, 아직 지관법문을 듣지 못한 사람도 여기에 응하여 이 지관법문을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하겠다. 자세히 지관을 분별하는 문장을 다섯으로 나누어서 논리를 건립할 것이다.

첫째는 무엇을 의지해서 닦느냐이다. 두 번째는 지관의 경계가 어떠한 것이지, 셋째는 지관 자체의 상태, 넷째는 지관 수행을 하여 번뇌를 끊고 증득하는 문제를 밝힌 것이다. 다섯째는 이타행을 행하는 지관작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지관이 의지하는 가운데 다시 세 문장으로 분별하니, 첫째는 도대체 어느 곳에 의지해야 하면, 두 번째는 무엇 때문에 의지해야 하는지, 세 번째는 무엇으로 의지해야 하는 지를 밝힌 것이다.

(2) 첫 번째로 지관이 무엇을 의지해서 닦느냐의 문제다. 그것을 말한다면, 일심(一心)을 의지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것인데, 이 일심을 의지하는 가운데 다시 논리전개에 있어서 3종의 차별이 있다.

첫 번째로는 ‘여러 명칭[眾名]을 드러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여러 명칭의 의미[名義]를 해석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명칭과 그 의미에 해당하는 당체 형상[體狀]을 논변하는 것’이다.

처음의 ‘일심에 대한 여러 명칭을 드러낸다는 것’이란, 이 마음이 곧 자성청정심(自性清淨心)이라는 것이다. 또는 진여(真如)로 부르고, 불성(佛性)이라고도 부르며, 다시 법신(法身)이라 부른다. 또한 여래장(如來藏)이라 호칭하며 또한 법계(法界)라고도 호칭하며 다시 법성(法性)이라고도 부른다. 이와 같이 여러 명칭은 한량없고 가없다. 그 때문에 여러 명칭이라 말하는 것이다.”

<지관강해(止觀講解)>

● 然更當為汝廣作分別
‘연(然)’이란 그 법문의 청함을 허락하겠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말로 번역하면 ‘그대의 말이 맞구나.’ 정도가 된다. 이렇게 호응하여 답을 한 이유는 대승지관을 우선적으로 열어서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개오(開悟) 뒤에 어느 방법이든 처소에 따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한다’ 혹은 ‘깨닫는다’는 것을 흔히 ‘오(悟)’라고 한다. 쉽게 비유를 하면, 이는 마치 눈을 뜨는 것[開目]과 같다. 만약 눈을 감고 있으면 방향을 모른다. 수행한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발을 드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눈으로 제대로 된 방향을 보아야 이를 향해 발로 걸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올바른 이치를 먼저 배워서 익힌 다음 수행을 해야 한다. 가야할 곳을 알아야 눈과 발이 서로를 의지하여 바야흐로 보배가 있는 처소에 당도하여 번뇌를 끊는 시원한 연못인 청량지(淸凉池)에 도달할 수 있다. 번뇌가 일어나면 우리의 머리는 뜨겁다. 그렇지만 번뇌를 끊으면 시원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대사께서 질문자의 청에 대하여 허락하여 ‘다시 그대를 위하여 광대하게 열어 보여주겠다(更當為汝廣作分別).’고 답하신 것이다.

● 亦令未聞尋之取悟也
대사가 말한 이 문장의 의미를 재차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대사는 ‘아직 듣지 못한 사람도 이 지관법문을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도록 하겠다(令未聞尋之取悟也).’고 하였다.

지금 이 설법은 오직 질문자 한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간략하게 설명하여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자세한 담론을 들어 깨닫게 된다. 질문한 사람 이외의 법문을 듣지 못한 나머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자세한 담론을 펼친 것이다. 이는 심법의 요체를 받아들이고[領取法要] 자신의 심체[心地]를 여기서 깨닫게 하는 것[開悟]이다. 대사의 이타자비(利他慈悲) 원력이 심오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며, 심요를 자세하게 제시[曲示心要]하는 까닭인 동시에 <대승지관법문>의 찬술 동기인 것이다.

● 就廣分別止觀門中作五番建立
‘5번건립(五番建立)’은 ‘자세히 지관을 분별하는 문장 가운데 이를 다섯 번으로 나누어 건립할 것이다.(就廣分別止觀門中作五番建立)’는 뜻이다. 총 전체 한권의 책을 다섯 분야로 나누어 차례로 설명할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이어서 과연 지관이 무엇을 의지하고 그 경계가 어떠한지 실질적인 이타행의 작용에 대해 순차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첫째는 지관은 무엇을 의지해서 닦느냐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지관의 경계, 셋째는 지관 자체의 상태, 넷째는 지관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증득, 다섯째는 지관에 의한 이타행 등이다.

● 一明止觀依止
다섯 번을 건립하는 가운데 먼저 ‘지관이 의지하는 것을 밝힌다(明止觀依止).’고 하였다. 먼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부터 깨닫게 한다. 자성이 비록 번뇌에 오염되었다 하더라도 원래는 청정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수행의 근본을 올바로 확립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 二明止觀境界
그 다음으로 ‘지관경계를 밝힌다(明止觀境界).’고 하였다. 미혹을 상대하여 진성(眞性)을 보이면 진실한 경계가 있고, 미혹한 마음[迷心]으로 망상(妄想)을 일으키면 분별의타경계(分別依他境界)가 있다. ‘의타(依他)’란 상대적으로 의존관계, 즉 인연관계이자 망상관계이다.

● 三明止觀體狀
세 번째는 ‘지관의 체상을 밝힌다(明止觀體狀).’고 하였다. 이는 지관의 경계에 의지하여 수행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 四明止觀斷得
네 번째는 ‘지관수행으로 끊고 얻는다(明止觀斷得).’고 했다. 수행을 따라 수행한 만큼 증득한 것인데, 구체적으로 지(止) 수행을 하여서 견사혹(見思惑)과 진사혹(塵沙惑) 등의 번뇌를 조복 받는다. 여기서 ‘조복(調伏) 받는다’고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완전히 끊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견사혹과 진사혹 등의 번뇌를 조복 받는 지(止) 수행 가운데 번뇌가 본래 없다는 이치를 관(觀) 수행을 통해 겸하는 것이다. 조복 받는 그 자리에서 관(觀) 수행을 겸하여 번뇌를 뿌리 채 끊어버린다.

● 五明止觀作用
마지막으로 ‘작용을 밝힌다(明止觀作用)’고 하였다. ‘작용(作用)’은 증득한 것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바, 이미 오묘한 내 마음의 심체를 증득하였다면, 증득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위대한 작용[大用]’이 일어나게 된다. 이른바 ‘전체기용(全體起用)’으로 내 마음 전체로서 작용을 일으키는 바이니, 안으로 자신을 제도하고 밖으로는 타인을 제도하는 것이다. 자비심을 일으켜 자리이타를 병행하는 것이다.

● 就第一依止中復作三門分別
앞서 다섯 번에 걸친 논변의 건립 가운데 처음이 ‘지관의지(止觀依止)’에 대한 문장이었다. 이 지관이 의지하는 가운데 다시 세 문장으로 나누어 분별할 수 있다. 첫째는 ‘어느 곳에 의지해야 지[何所依止], 두 번째는 ’무엇 때문에 의지해야 하는 지[何故依止], 세 번째는 무엇으로 의지해야하는 지[以何依止]를 밝히는 것이다. 이 세과목 역시 일어나는 차제 순서다.

● 一明何所依止
지관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지관이 의지하는 자체[何所依止]로 삼아야 하는가? 바로 ‘대승자성청정심(大乘自性淸淨心)’을 의지해야만 한다.

● 二明何故依止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지관이 의지[何故依止]해야 하는가? 일심(一心)으로 자성청정심에 의지해야 하는 이유는, 이 자성청정심이 일체법(一切法) 근본(根本)이 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가지와 잎과 꽃과 과일은 뿌리가 없다면 생기지 않는 것과도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리도수(菩提道樹), 즉 깨달음의 나무는 내 마음의 근본이며 여기서 보리의 나무가 자라는 것이다. 근본이 없다면 자라지 않는다. 그러한 까닭에 반드시 자성청정심에 의지해야만 한다.

● 三明以何依止
무엇으로 이 자성청정심을 의지하여 지관을 수행[以何依止]해야 할까?
우리의 제6식심(識心), 다시 말해 제6의식을 가지고 자성청정심을 의지해서 수행을 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든지 여덟 개의 식 가운데서 제6의식을 따라 그 명칭과, 그 명칭에 대한 의미를 알고, 우리의 의식을 통해 대상 경계에 대한 집착을 소멸할 수 있고, 우리의 제6의식을 통해 수행한 만큼 본식 제8 아뢰야식을 청정한 무루정법으로 훈습할 수 있다. 미혹으로 하여금 미혹이 소멸하고, 올바른 이해가 성립하므로 반드시 의식을 가지고 자성청정심에 의지하여 지관을 닦아야 우리의 수행이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講 : 송찬우(중앙승가대학교 교수)
集 : 정성우(한국불교선리연구원)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