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상품이 아니라 기호를 소비한다.
-장 보드리야르


1. 감옥

예전에는 사형수를 공개적으로 처형하였습니다. 광장이나 시장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가능한 더 많은 고통을 더 오랫동안 겪게 하면서 죽였습니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는 프랑스의 루이15세를 시해하려다 실패한 사형수를 광장에 끌고 와서 얼마나 끔찍하게 고문하다 죽이는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런 신체형은 구체제―앙시엠 레짐―하에서 왕권을 유지하는 주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전제군주제가 서양보다 더 오래 지속된 동양에서는 지난 세기까지도 이런 공개된 사형집행이 이루어졌습니다. 청말(淸末)에 이틀에 걸쳐 산 채로 능지처참하는 기록물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절대군주제가 저물어 가던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이런 공개적인 고문과 처형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됩니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아지게 되면서 공개된 처형이나 잔인한 고문은 점차 사라지고 보다 인도주의적인 방법이 모색됩니다. 그리하여 범죄자에게는 죄에 상응하는 기간 동안의 강제노역형이 합리적인 수단으로 선택됩니다. 이때부터 감옥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제 죄수들은 감옥에 상당히 긴 기간 동안 격리된 채 강제노역에 동원됩니다. 이전의 감옥은 사형이든 태형이든 형이 결정되어 집행되기까지 잠시 머물던 곳이었습니다. 죄수들에게 형이 집행되고 나면 바로 가족들에게 인도되니 감옥은 대기소 정도였던 셈이지요. 그랬던 감옥이 이제는 많은 죄수들을 상당기간 동안 격리 수용하며 먹이고 재우고 노역에 종사하게 하고 교화까지 시켜야 하는 복합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과학과 산업이 발달하고 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중요한 지배세력으로 등장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합니다. 노동이 중요한 사회적 가치로 여겨지면서 일어난 변화입니다. 영화 《퀼스》는 이런 변혁의 시대를 살던 한 음란서생의 이야기입니다.

▲ 영화 '퀼스'의 포스터.
1789년 바스티유감옥이 피습되며 불붙은 프랑스 대혁명은 극심한 혼란과 많은 희생자를 낳았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행하던 약 10달 동안에만 30만 명이 체포되고 4만여 명이 처형됩니다. 허구한 날 단두대에는 목이 잘리며 파리에서만 1천700여 명의 피가 광장에 뿌려집니다. 이런 극심한 혼란을 평정한 사람이 나폴레옹입니다. 1799년 나폴레옹은 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며 “혁명은 끝났다.”고 선언하고, 5년 후인 1804년 드디어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사드 후작(The Marquis de Sade, 제프리 러쉬 분)은 변태적인 섹스와 도착적인 소설로 악명을 날립니다. 젊어서는 감옥을 드나들다가 인생의 후반부는 정신병원에서 보냅니다.

17세기에 접어들며 유럽 각지에는 종합병원이란 이름의 감금시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곳에 광인은 물론 부랑자나 걸인 등의 사회적 일탈자들을 수용하여 엄격한 규율 하에 강제노동을 시켰던 것입니다. 이들 수용자들은 쇠사슬에 묶인 채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며 강제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이들의 열악한 환경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프랑스대혁명의 와중인 1793년 인도주의적 의료개혁가였던 피넬(Pinel)이 비세트르 병원에서 광인들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풀어주며 이들에게 의술을 시행하게 됩니다. 영화에서 샤렝턴 정신병원장인 쿨미어 신부(Abbe Coulmier, 조아킨 피닉스 분)는 바로 이런 인도주의적인 의료개혁가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반면에 고문의사로 부임하는 로이 꼴라 박사(Dr.Royer-Collard, 마이클 케인 분)는 고문과 가혹한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예전 방식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인물입니다.

쿨미어 신부의 처방은 사드의 머릿속에 있는 사악한 것들을 종이위에 뱉어냄으로써 치료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입니다. 사드후작이 마음껏 변태적인 소설을 쓸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단 그 소설이 사드가 머물고 있는 병실을 나가서는 안 된다는 전제하에 말이지요. 하지만 병원에서 일하는 처녀 마들렌(Madeleine, 케이트 윈슬렛 분)을 통해 사드의 소설은 밖으로 유출됩니다.

처음에 쿨미어 신부와 사드는 이성적으로 대화합니다. 사드로부터 복종하겠다는 약속도 받고요. 하지만 사드가 연출한 연극이 로이 콜라 박사를 심하게 비꼬면서 모든 필기도구가 압수되는 징벌을 받습니다. 그러자 사드는 포도주를 잉크 삼고, 닭뼈를 퀼스―퀼스는 깃털 펜을 가리키는 말이다― 삼아 이불보에 소설을 씁니다. 이 일이 발각되자 모든 세간이 압수됩니다. 다시 사드는 손가락 끝에 상처를 내어 자신의 피로 옷에 소설을 쓰고, 그 징벌로 알몸 신세가 됩니다. 이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된 사드는 정신병자들을 통해 말로 전달하며 마들렌으로 하여금 받아쓰게 합니다. 그 와중에 화재가 발생하고 마들렌은 살해됩니다. 이 일로 사드는 혀가 뽑힌 채 쇠사슬에 묶여 지하 감방에 갇힙니다. 이곳에서 사드는 자신의 배설물을 이용하여 벽에 소설을 쓰고 죽어갑니다. 죽음을 앞에 둔 사드에게 쿨미어 신부는 마지막 종부성사(終傅聖事)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사드는 십자가를 삼키며 거부합니다. 그렇게 저항하며 사드는 죽습니다.

일찍이 쿨미에 신부가 사드에게 말했습니다. 복종하라고. 복종하고 좋은 말을 쓰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사드는 끝내 복종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온갖 음란한 단어들로 도배하며 죽어 갑니다.

2. 정신병원

유럽의 17・8세기를 이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가 활동하던 시대. 어쩌면 인류 역사상 인간이 가장 존엄했던 시기가 이 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제1원리에서 인간은 오직 목적으로만 대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령(定言命令)까지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었습니다. 이런 인간의 위대함은 이성에 의해 뒷받침 됩니다. 사유할 줄 아는 존재, 이성의 소유자이기에 인간은 주체가 되어 우주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시대에 이성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체제를 수호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중세 때 신앙이 맡았던 기능을 근대가 열리면 이성이 대신하였던 것입니다. 중세에 신을 부정하거나 신앙이 충분치 못하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가차 없는 저주와 폭력이 수반되었던 것처럼, 근대에는 비이성적이라고 판단되면 사회로부터의 격리와 강제노역에 처해졌습니다. 바로 이 비이성적이라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시설이 곧 정신병원이었던 것입니다. 근대의 정신병원은 중세의 나환자촌과 그 기능과 역할이 같습니다. 중세의 나환자촌이 사람들의 신앙심을 북돋고 신의 권위를 더욱 높여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듯이, 근대의 정신병원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성적인 사고와 합리적 행위를 하게끔 유도하는 중요한 기제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근대 이성은 자연이 아닌 인위적인 규율이 됩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행위하여야만하기 때문에 이성적인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성은 이제 인간의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라 체제를 유지하고 질서를 확립해 가는 규범이 됩니다.

새롭게 구성되고 치장된 정신병동은 광인을 치료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기실 특정한 도덕적 가치들을 야만적인 강제나 육체적인 징벌로써가 아니고 ‘인도주의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더욱 강화시키고 능률적으로 내면화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피넬과 튜크는 정신병동을 건설함으로써 광기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포를, 광인 자신의 숨막히는 죄책감·책임감으로 대치시켰다. 바꿔 말하면 정신병동은 광인이 갖는 죄의식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조직한 것이다.
윤평중, 《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

정신병원에 수용된 환자들은 자신의 영혼이 병들었음을 인정하여야만 합니다. 정신은 썩었고 영혼은 죄악에 물들어 있습니다. 이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는 길은 충분히 이성적인 인간이 되어 합리적인 사고와 행위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이성은 따지고 보면 당시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규율이며 규범입니다.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정신병원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드는 이런 순응을 거부합니다. 끊임없이 사드에게 요구하는 복종은 질서체제에의 순응이며 규범에의 복종인 것입니다. 이런 요구에 순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오직 죽음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실상 사드의 작품이 문제가 되는 것은, 영화에는 대표적으로 《쥐스틴》이란 작품이 나오는데, 그 음란성보다는 풍자입니다. ‘미덕의 불행’이란 부제가 붙어 있듯, 《쥐스틴》은 착한 여주인공이 겪는 고통 이야기입니다. 쥐스틴은 독실한 신앙인으로 매우 이타적이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채찍과 매, 변태적인 학대뿐입니다. 더구나 쥐스틴을 상대로 변태성욕을 만족시키는 자들은 근엄한 종교인이거나 지식인들입니다. 이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사회적 가치체제나 도덕체제를 비틀어버리는 내용이 당시의 권력구조에 흠집을 낼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결국 당시의 지배이념이나 가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사드가 살아서 정신병원을 나올 일은 없는 것입니다.

3. 냉장고와 자동차, 그 욕망조직의 메카니즘

저의 세 식구 사는 데에 냉장고가 커야 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냉장고가 커 봤자 전기세만 더 나가고 공간만 차지하고 좋을 거 하나 없음을 아내도 잘 알고 있지요. 얼마 전 이사하며 새 냉장고를 샀습니다. 양문형 냉장고 중에서 제일 작은 걸로 샀습니다. 아내의 눈빛이 마음에 걸려 하나 골라보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남의 집에 가선 그 집의 양문형 냉장고를 참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한 번은 초대받아 간 집에 정말이지 엄청 큰 냉장고가 있었습니다. 가격도 되게 비싸고, 얼마나 큰지 위 칸은 의자 위에 올라가도 그 안쪽까지는 손이 닿지 않는다고 합니다. 네 식구 사는 집에 그렇게 큰 냉장고가 정말로 필요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내는 은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용도과잉에 면적만 엄청 차지하는 큰 냉장고를 사람들은 왜 살까요?

현재 우리사회는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특히 산업화된 경제체제에 정보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요. 산업자본주의는 기계화된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내는 체제입니다. 대량생산은 필연이기에 대량소비가 수반되어야만 하는 체제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미 2・3차 산업 위주로 산업구조를 개편하였습니다. 이후는 어떻게 하나요? 좋기로야 전쟁이 대량소비를 불러일으키는 매우 좋은 수단이지만 우리는 그럴만한 역량이 되지 않습니다. 식민지경영은 이미 수익대비 비용이 너무 많은 어리석은 선택이구요. 결국 우리 국민 하나하나가 더 많이 사주고 다 많이 소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제아무리 요구가 많은 여성이라도, 메르세데스-벤츠로 개성적인 취향과 욕망이 만족되지 않는 여성은 없다! 시트와 차체의 색부터 바퀴 그리고 표준적인 또는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편리한 장치에 이르기까지의 부속품 일체가 그녀를 만족시킬 것입니다. 남성도, 차의 기술적 특성 및 성능을 특히 염두에 둔다 하여도, 역시 기꺼이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벤츠를 선택한 당신의 훌륭한 취향에 아내가 넋을 잃는 것을 보고 당신은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이 시대에 자동차는 그저 단순한 탈 것이 아닙니다. 자동차는 하나의 기호(記號, Sign)입니다. 자동차는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성공, 그리고 품격을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사람들이 자동차를 사는 이유는 성능 때문이 아니라 기호가 담고 있는 의미 때문입니다. 냉장고 또한 이런 기호입니다.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사람들은 상품이 아니라 기호를 소비한다.”라고 말합니다. “세탁기(냉장고)는 도구로서 쓰여지는 것과 함께 행복, 위세 등의 요소로서의 역할도 한다. 바로 이 후자의 영역이 소비의 영역”이라고 합니다. 대형 양문형 냉장고가 담고 있는 행복과 위세가 그 안주인으로 하여금 기꺼이 지갑을 열게 하고, 손님들을 초대한 이유입니다.

자동차나 냉장고 같은 사물을 기표(記標)로 삼고 거기에 성공이나 행복 등의 의미, 즉 기의(記意)를 더하여 기호가 만들어집니다. 기호는 전적으로 작위적인 것입니다. 현대 자본주의체제는 끊임없이 기호를 생산해 내며 욕망을 조직합니다. 쇼윈도 넘어 화려한 세계는 언제라도 내 것이 될 것만 같습니다. 현대인은 쇼윈도를 거울로 착각한 채 쇼윈도만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4. 파레토의 법칙,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파레토의 법칙이 있습니다. 20:80법칙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전체 결과의 80%는 20%의 원인에서 비롯된다’는 법칙입니다. 예컨대 전체 부의 80%는 20%의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고, 회사 업무의 80%는 20%의 사람이 해내며, 백화점 매출의 80%는 20%의 고객에게서 나온다는 게 흔한 사례로 제시됩니다.

영화 《행복을 찾아서》는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한 흑인의 성공스토리입니다. 아내는 집을 나가고 주인공은 어린 아들과 공공 화장실에서 잠을 자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딘 워터 증권회사에 무보수 인턴사원으로 들어가고, 다시 여기에서 20:1의 경쟁을 뚫고 정식사원이 되고, 마침내는 엄청난 부를 일굽니다. 영화는 시종일관 이 한 사람의 성공신화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경쟁자였던 다른 19명의 인턴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1명의 부자아빠와 19명의 가난한 아빠. 아니 인턴시험에 통과조차 못한 수많은 가난한 아빠들은 이름도 얼굴도 없습니다.

학교에 한 아이의 아빠가 최고급 외제차를 몰고 나타납니다. 그 순간 나머지 모든 아이들의 아빠는 루저가 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들의 아빠들은 가족과의 행복한 삶을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산업사회의 광고전략은 이들을 인생 실패자로 만듭니다. 그래서 앙리 르페브르는 “광고는 테러”라고 한 것입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사회 초년생 앤디는 우연히 패션잡지 런웨이 편집장의 비서로 취직합니다. 출근 첫날 편집장 미란다의 경멸 섞인 시선에 거절했던 하이힐을 꺼내 신습니다.

네가 지미 추(jimmy choo)의 신발을 싣는 순간 너는 영혼을 판 거야.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나오는 대사

대량생산체제가 유지되려면 대량소비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현대사회가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는 체제임에 분명할진대 이 체제를 위해서 우리들은 대량소비를 해주어야만 합니다. 소비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 우리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합니다. 열정을 다하여 노동합니다. 결국 우리들 하나하나는 기계화된 사회가 유지되도록 봉사하기 위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봉사하는 노예가 아닌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 체제를 벗어나 도망갈 만한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체제는 온갖 화려한 상품들로 장식한 감옥이 아닐까요?

우리들 대대수가 원하는 행복한 삶이란 적당한 풍요와 화목한 가족으로 구성됩니다. 이를 위해 오늘도 새벽부터 밤늦도록 열심히 일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열정을 받쳐 일하는 곳은 기계화된 산업사회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기계들로 완벽하게 차단된 감옥에 태어나 정신병원에서 교육받은 산업사회의 노예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이 체제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해결의 열쇠는 시스템이 아니라 우리들의 의식입니다. 그동안의 삶이 노예와 다를 게 없었다는 깨달음이 있어야만 비로소 주체적인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은폐되고 왜곡된 나의 모습을 똑바로 보아야만 ―이게 정견(正見)이 아닐까요― 잃어버린 본래면목을 되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사상이 불교라고 감히 말하겠습니다.

-김문갑(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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