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호 감독의 영화 '유리'(한국, 1996)의 명성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었습니다. 영화배우 박신양씨의 첫 출연작으로 그가 알몸 열연을 보여줬고, 그 열성에 대한 보답으로 그해 청룡영화제와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상을 받았던 영화로, 당시 꽤 화제가 됐던 작품입니다.

그때로부터 20년이나 지난 지금 '유리'를 보려고 찾았지만 여의치가 않더군요. 열심히 수소문하다 상암동에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에 비디오테이프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진지한 종교영화라는 생각을 하면서 기대를 좀 하고 갔습니다.

회원가입을 하고 비디오테이프를 받아서 자리를 찾아서 앉았습니다. 하필 자리가 데스크 바로 앞으로 출입구에서는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더군요. 자리 배정에 불만을 갖게 되리라고는 그때까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데 비디오테이프를 꽂는 순간부터 난 영화에 몰입하기 보다는 주변 사람을 신경 써야 했어요. 영화가 기대 이상으로 야했거든요. 도대체가 이 영화는 구도영화를 표방한 포르노인가 할 정도로 그런 장면이 많았습니다. 거기다 선문답 같은 대사는 머리를 더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징과 파격으로 일관한 영화는 정말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했습니다.

'유리'(한국, 1996)는 박상륭 씨의 '죽음의 한 연구'를 원작으로 했습니다. 전문 글쟁이도 도저히 해석하기 어렵다고, 넘을 수 없는 벽을 대하는 것 같은 답답함을 안겨준다는 지식인 소설의 전형인 이 소설을 영화로 옮겼으니 영화라고 해서 대뜸 이해가 되기를 기대했던 것은 내 무지의 소치였습니다. 이 영화는 원래가 이렇게 이해가 안 되는 게 정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가 간음과 살인의 피비린내와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로 어지러웠던 것은 그만큼 ‘나’를 이루었던 무의식의 어두운 면이 형상화됐기 때문이었습니다. 내내 욕하면서 보았던 야한 장면이나 살인 장면은, 영화에서는 꼭 필요했던 장면이었던 것이지요.

그래도 부족한 실력이나마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나름 노력을 기울여봤습니다. 물론 나의 해석이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과 주역, 그리고 선불교, 심지어 신화자료집인 '황금가지' 까지, 이런 다양한 사상을 버무린 작가의 경지에 이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나름 불교영화를 오랫동안 공들여 봐왔으니 하나가 통하면 모두 통한다는 문구에 기대어 나름 해석에 도전해봤습니다. 서사를 기초로 해서 영화가 전하는 바를 알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라는 수도승이 있습니다. 그는 창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정체성에 결여를 느끼기에 충분한 조건이지요. 그래서 그는 수도승이 됐고, 33살에 스승의 명령으로 유리라는 곳으로 떠납니다. 유리는 황량한 들판이 끝없이 펼쳐진 곳으로 판타지적 공간입니다.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사람 밖에 없습니다. 풀도 나무도 없으며 늪 또한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메마른 땅일 뿐입니다.

영화 '바그다드 카페'에서 독일 여자가 길을 잃었던 메마른 먼지가 피어오르던 사막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 이 사막을 유토피아로 탈바꿈시켰는데, '유리'의 ‘나’는 정반대의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삭막한 사막에 도착한 그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옷을 벗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가 있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린다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앞에서 야한 장면에서 내가 불편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걸 보고 있는 내 모습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를 걱정했던 것이고, 이는 이성적 영역에 머물고 있는 내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리에서 ‘나’가 옷을 벗었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의 사막은 죽음의 세계를 표현했습니다. '티벳 사자의 서'를 보면, 육체를 떠난 후 다시 환생할 때까지 49일 동안 중음신으로서 다양한 체험을 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육체는 소멸했지만 영혼은 아직 그럴 때가 안 됐기 때문에 정처 없이 떠돌면서 공포와 불안, 절망 등을 겪는데 영화 '유리'는 죽음의 세계를 통해 한 영혼이 완전히 소멸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유리에 도착한 ‘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옷을 벗어던진 일이고, 그 앞에 한 비구니가 나타납니다. 그녀는 이곳에서 수행자들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자로 수도부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그녀와 더불어 파계를 합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유리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벗고 여자와 관계를 갖는다, 로 정리될 것 같습니다. 이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옷을 벗는다는 것은, 이성의 통제에서 벗어난다로 해석할 수 있겠고, 여자와 간음한다, 는 동물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은 여전히 남아있다, 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육체와 무관하게 인간의 무의식은 욕망의 통제를 받고 있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주인공이 유리를 떠난다는 것은 결국 이 욕망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면에서 유리라는 공간은 새로운 세계를 준비하는 공간이기에 의미는 다르지만 '바그다드 카페'의 사막처럼 희망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유리’ 라는 세계에 당도한 ‘나’에게 주어진 과업은 이렇게 무의식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제거해서 완전히 텅 비우는 것입니다. 윤회의 씨앗을 아뢰야식이라고 하는데, 유리에서 ‘나’가 할 일은 이 아뢰야식의 개조인 것이지요.

영화의 초반부에서 수도부와 더불어 애욕을 확인한 ‘나’가 다음으로 만난 이는 유리에서 유일하게 물이 고여 있는 샘을 차지한 ‘존자’라는 뚱뚱한 남자와 존자를 떠받드는 애꾸눈 중이었습니다. 존자는 자칭 깨달았다면서 으스대고, 그 추종자는 밑도 끝도 없는 신뢰와 믿음을 보여주는 광신도에 가까웠습니다. ‘나’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살인에 죄의식을 느끼면서 괴로워하다가 마을 촌장을 만났습니다. 촌장은 그에게 스승을 만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면서 해골을 주었는데, ‘나’는 또 이유 없이 이 촌장도 죽였습니다.

존자와 애꾸눈 중, 그리고 마을 촌장 또한 ‘나’의 무의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존자는 ‘오직 나만이’에 해당하는 아집을 의미하고, 애꾸눈 중은 눈이 하나뿐이니까 무엇을 제대로 못 본다는 의미에서 편견을 의미합니다. 이 둘을 죽였다는 것은, 아집과 편견을 극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촌장을 죽이고, 자신이 그 촌장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촌장은 ‘나’에게 앞길을 제시했으며, 또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스승을 죽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잘라냈다는 의미고, 강을 건넌 후 배를 없앴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수단이 아니라 본질에 접근했다는 차원에서 ‘나’는 어느새 무의식을 극복하고 상당한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이 ‘촛불승’에 대한 해석이었습니다. 비대한 몸집에 매니큐어를 한 긴 손톱과 귀고리, 그리고 트렌스젠더 같은 목소리와 기괴한 말투 등 그는 굉장히 특이한 캐릭터였습니다. 외모뿐만 아니라 간음과 질투심, 권태 등 부정적인 면을 많이 갖고 있는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그가 ‘유리’ 라는 세계의 판관이었습니다. 염라대왕인 것이지요.

그는 ‘나’에 대해서 무한한 질투심을 느꼈습니다. ‘나’가 새로운 방법으로 황무지와 같은 유리라는 공간에서 자신을 완성해가는 데 반해 자신은 여전히 음울한 세계에 갇혀 있는 것에서 열등감을 느꼈고, 어쨌든 그는 ‘나’에게 촌장 살해혐의를 적용해서 사형이라는 형을 집행합니다.

‘촛불승’ 이라는 캐릭터의 등장은 죽음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비록 재판관이라는 염라대왕의 자리에 있지만 그는 그날이 그날인 권태로운 삶을 사는데 반해 ‘나’는 마음의 찌꺼기를 스스로 해결하면서 죽음을 완성해 가는데, 이 과정에 대한 찬사이자 긍정을 표현하는데 촛불승이 일조했다고 보여 집니다.

촛불승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은 ‘나’는 스스로 혀를 자르고, 또 타의에 의해 눈알을 잃은 상태로 죽음을 맞습니다. 눈은 인간 습득능력의 80프로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또한 욕망을 일으키게 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혀는, 10선 중 4개가 말과 관련한 것일 정도로 우리가 죄를 짓는데 또한 큰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므로, ‘나’가 다음 세계에서는 욕망과 악업을 어느 정도 극복한 경지로 탄생하게 됨을 의미한다고 해석학 수 있습니다. 유리라는 세계에서의 수행을 통해서 그는 한 층 업그레이드된 의식을 갖게 됐고, 보다 나은 고지에서 환생을 준비하게 된 것입니다.

'유리'는 지금까지 본 불교영화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표현방식은 파격적이었으며 또한 창의적이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그게 윤회의 씨앗인 무의식을 표현하는 데는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을 구도의 한 과정으로 인식하는 것도 좋은 생각 같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에 해당하는 죽음은 결코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여전히 비밀에 싸여 있는데, 누구는 극락을 꿈꾸며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대부분 사람은 두렵게 여기는데, 이 영화에서는 학습의 장으로 죽음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이런 해석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영화를 해석하면서 처음 영화를 볼 때의 불만은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상암동까지는 꽤 멀지만 한 번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김은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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