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문자품(文字品)과 지금의 조유품(鳥喩品) 그리고 다음의 월유품(月喩品)은 여래의 진실한 응현을 비유로 밝히는 내용이다. 문자품은 반자교 만자교의 문자를 들어 세속의 무상함과 여래의 영원함을 들었고, 뒤에서는 달이 나타나고 지는 것을 들어 여래의 진실한 응현을 나타내고, 여기서는 가린제(迦隣提)와 원앙(鴛鴦)새를 들어 열반의 진실한 제행을 밝히고 있다. 다만 문자품에서는 세간의 가르침과 《열반경》 여래진실의 가르침을 반자 만자로 비유하였고, 여기서는 제법의 행에 입각하여 세간행과 여래행의 두 가지를 들어 열반의 진의를 밝히고 있다.

이 경에서 들고 있는 가린제(迦隣提)는 사라가린제(sārasa kāraṇḍa 娑羅, 娑羅迦隣提)라고도 하여 이설이 있다. 원래 사라는 쌍(雙)이라는 뜻이고, 가제는 새[鳥]를 가리킨다고도 한다. 혹은 사라는 견고함 혹은 새의 한 쪽[一隻]을 나타내고 린제는 다른 한 쪽[一隻]을, 또는 사라가 일척(一隻) 린제가 다시 일척을 나타낸다고도 한다. 그밖에 린제를 천학(天鶴) 안학사리(雁鶴舍利)라고도 번역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인용한 사라가린제는 원앙과 같이 항상 암수 한 쌍이 함께 날아다니고 함께 쉬며 서로 떨어지지 않고 동행한다는 뜻에서 우리가 세간에 분별해 보고 있는 생사와 열반을 동행으로 보는 열반의 경계를 밝히고 있다.

앞의 문자품에서는 세속의 교설과 열반의 교설에서 상(常)과 무상(無常), 아(我)와 무아(無我) 등을 설하였다. 이제 이 조유품에서는 이러한 교설에 입각하여 열반의 네 가지 덕을 세속의 행과 여래행으로 설명한다. 곧 가린제나 원앙이 암수가 항상 동행하듯이 일체법이 영원하다는 것과 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이 서로 여의지 않으며, 세상의 생사고와 열반의 락에 있어서도 서로 여의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생사는 무상하고 불과(佛果)는 영원하다고 취해 본다면 불과와 생사는 서로 다른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곧 세간에서는 생사를 무상하다고 관하고 열반이 영원함을 알지 못하고, 열반을 영원하다고 관하고 생사가 무상함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여래는 일행(一行)이 일체행이므로 생사 중에 상과 무상이 있음을 관하고, 불과 중에 또한 상과 무상이 있음을 관한다는 것이다. 마치 가린제라는 새가 날아 여행할 때에 아래만을 보는데 그치면 생사만을 보게 되고 위쪽을 보는데 그치면 열반 만을 보게 되니, 쌍으로 보지 않으면 가린제의 올바른 여행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경문은 세 가지 관점에서 무상과 상, 무아와 아를 고찰하고 있다.
첫째, 생사의 입장에 나아가 무상과 상을 밝히고,
둘째 열반의 입장에서 무아와 아를 밝히며,
셋째, 쌍으로 생사열반에 나아가 고(苦) 락(樂)을 밝힌다.

첫째는 생사의 입장에서 고 무상 무아의 세 가지 법을 다섯 가지 비유(새싹의 비유, 암라수의 비유, 금광의 비유, 호마의 비유, 바다로 돌아감의 비유)를 들어 밝힌다. 먼저 새싹의 비유이다. 벼 삼 보리 콩 조 등이 싹트고 자랄 때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자라나므로 무상(無常)하다고 하거니와 열매가 익어 사람이 사용할 때는 모두에게 이익되게 하므로 항상[常]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새싹으로부터 성장할 때는 생사 중의 무상함을 나타내고, 익어 열매를 맺었을 때는 생사 중의 항상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생사의 항상함과 여래의 항상함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반열반경에서는 인간이나 천상이 비록 번뇌가 있더라도 번뇌가 없는 것과 같아서 모두 불성이 있는 줄을 분명히 알아서 항상하다고 한다는 것이다. 어찌 생사 중에 상과 무상이 갖추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둘째, 암마라나무가 꽃이 필 때는 무상(無常)하지만 열매가 익어서 이익됨이 많으면 항상[常]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셋째, 금광에서 금의 광석을 녹일 때에는 무상하다고 하겠고 녹아서 순금이 되면 이로움이 많아서 항상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넷째, 호마가 기름을 짜기 전에는 무상하다고 하지만 짜서 기름이 되면 이익됨이 많아서 항상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다섯째, 모든 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이 모든 경전의 선정삼매를 닦으면 모두 대승열반경으로 돌아간다. 이와 같이 중생의 입장에서 보면 일체법이 무상하고 상하며, 무아(無我)이고 아(我)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둘째, 열반의 입장에서 무아를 밝힌다. 만일 무상천(無想天)이 무상하다고 하지만 만일 무상하다면 수명이 없게 되고 수명이 없다면 어떻게 오온 육입 십팔계가 있겠는가. 마치 나무의 신이 나무에 의지하거나 줄기에 의지하거나 잎에 의지한다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없다고 말할 수 없듯이 무상천의 수명도 그와 같다고 한다. 여래는 근심 슬픔 번뇌가 없지만 중생에게 대자비심을 일으키어 근심 슬픔을 나타내어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이다. 마치 허공에는 집이나 티끌이 머물러 있을 수 없지만 만일 집이 허공으로 인하여 머물지 않을 수 없다. 이때 범부들은 집이 허공에 머물러 있다고 하지만 허공은 실로 머물데가 없는 것이다. 여래의 근심과 슬픔도 마찬가지이다. 여래가 만일 근심 슬픔이 없다면 어떻게 중생을 평등하게 보기를 라훌라와 같이 한다고 말하며, 만일 근심 슬픔이 있다면 어떻게 슬픔이 허공과 같다고 말하겠는가. 여래는 대열반에 들어 근심 슬픔이 없어서 아(我)이고, 영원[常]하지만 중생을 위하여 근심과 슬픔을 보이니 무아이고 무상인 도리를 보인다. 그러므로 여래는 열반에 들지 않고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여래의 입장을 걸림 없고 위없는 지혜라고 한다.

셋째, 생사열반에 나아가 고락을 밝힌다. 부처님은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여 바른 법에 머물게 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할 일을 마치면 스스로 대열반에 들게 된다는 것이다. 곧 여래는 생사의 고락을 알아서 병이 무상에 있으면 반드시 상(常)의 약을 쓰고, 병이 상에 있으면 반드시 무상의 약을 쓰니 결정적인 상도 아니고 무상의 병도 아니다. 또한 여래는 항상 열반에 있는 것이 아니요 중생의 고락에 따라 상과 무상을 보이니 중생이 고에 빠져 있을 때는 무상의 교화를 펴고 중생이 교화되었으면 대열반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비유로 설명하면 가린제와 원앙은 여름에 물이 불어나자 높은 고원으로 새끼를 옮겨 기르며, 그런 뒤에는 자신도 편안히 노닌다고 한다. 곧 새끼는 중생이고 어미새는 부처이니, 생사의 세계에서 중생의 병이 무상병이면 상의 약을 써서 제도하므로 이때는 상이 고원이 되고, 중생의 병이 상이면 무상의 약을 써서 제도하므로 이때는 무상이 고원이 된다. 곧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 법이며 상과 무상이 구족하여 서로 여의지 않는 법으로 제도한다는 것이다. 여래도 마찬가지로 생사열반의 두 인과(因果)를 나란히 하여 서로 여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기운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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