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에서 함께 살펴보실 부분》

(沙門曰) 然彼有法有即非有 唯是一心體無分別 作是觀者 能令妄念不流 故名為止 所言觀者 雖知本不生今不滅 而以心性緣起不無虛妄世用 猶如幻夢非有而有 故名為觀

지난 호에서 살펴본 문장(然彼有法有即非有 唯是一心體無分別)의 긴밀한 의미를 이어 풀이하기로 한다. 이어지는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난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들음[聽]은 문혜이고, 가림[擇要]은 사혜(思慧)이고, 행함[行]은 수혜(修慧)다. 이로써 3혜가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우리들도 이를 본보기 삼아 훌륭한 솜씨로 잘 듣고 헤아려 행해야 한다.

생각마다 망상이 흐르고 요동[流動]하여, 우리는 정지하여 쉼[停息]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지관이라 하였을 때, 망상이 흐르면서 요동하는 것을 정지시키는 것이 바로 ‘지’공부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망상과 망념의 유동을 정지시키지 못한다. 우리가 망상을 가지고 일체제법이 내 마음 밖에 있는 줄 알고, 제법을 따라 가면서 내 마음이 전변(轉變)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일어나면 법도 같이 일어난다. 내 마음이 소멸하면 법도 함께 소멸한다. ‘지’를 하려면 반드시 ‘관’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일체의 모든 법이 오직 일심(一心)이다. 즉 내 마음 ‘진여일심(眞如一心)’일 뿐이다. 이를 안다면 우리가 제법을 보더라도 분별심이 생기는 일이 없을 것이다.

● 然彼有法有即非有 唯是一心體無分別

“마땅히 저 모든 법은 허망한 인연을 따라 나타난 허깨비다. 있다 해도 실재가 아니다. 오직 ‘진여일심’일 뿐이며 여기에는 분별이 없다.”

현상제법에 대한 분별(分別)을 끊고 ‘공(空)’으로 깨달아 들어간다면, ‘있다’ 혹은 ‘있지 않다’ 등의 상대적인 어구를 말할 필요조차 본래 없다. ‘있다’ 해도 실제로 있지 않고, ‘없다’ 해도 실제로 없지 않다.

일심(一心)이 ‘제법(諸法)’의 본체(本體)이니, 이 일심의 본체자리에 ‘있다’거나 ‘없다’거나 따질 분별이 없다. 분별이 없다는 말은 결국 ‘제법’이 ‘공(空)’이니 ‘유(有)’니 하는 분별의 판단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별개의 분별이 없다.

‘제법’을 일으킨 마음의 자체[心體]는 상대적 의존관계가 단절된다. 즉 절대무외(絶待無外)인 까닭에 우주전체가 내 마음 ‘진여일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중론》에서 “역시 이를 중도라 말한다[亦名爲中道].”라고 하였다.(* 주 - 혹은 “亦是中道義”) 이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해당된다.

정리하면, ‘색(色)’이 바로 ‘공(空)’이고, ‘공’이 바로 ‘색’이어서, ‘색’과 ‘공’이 두 모습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식이변분별지’에 해당되며, 유무(有無)가 둘이 아닌 중도(中道)인 ‘중도제일의제 관법’이 된다. 이를 줄여 ‘중도제일의관’이라 칭하는 것이다.

지난 호에서 함께 살펴본 앞서의 두 구절과 아울러, 세 문장의 긴밀한 관계를 잘 헤아려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 作是觀者 能令妄念不流 故名為止

‘제법’은 결국 내 마음 따라 일어난다고 앞서 언급하였다. 《중론》의 게송과 연관하여 지금까지 살펴본 구절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내 마음 밖에 법이 따로 없다.

본문에서 ‘이와 같이 여실하게 관찰하게 되면, 망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망상을 일으키지 않으면 스스로 흘러가지도 요동치지도 않는다[作是觀者 能令妄念不流].’고 하였다.

망상이 흐르지 않으면 바로 그 자리가 분명 쉬는 자리다. 이러한 까닭에 이러한 수행관법을 가리켜 망상을 정지하는 ‘지’수행이라 부른다[故名為止]. 이러한 종류의 수행법은 단순히 6진(六塵)의 경계를 쫓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공부와 합치한다.

● 所言觀者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점에 또한 마음이 이끌린다. 단지 ‘지’ 수행만을 닦는다면, ‘불생불멸’이라는 점에 마음이 이끌려, 우리 심체의 현실적인 작용은 자칫 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아무 생각과 감각이 없어 살아있는 바가 아니다.

이는 마치 죽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지’ 공부를 하면, 반드시 제법의 이치를 관찰하여 실천하는 ‘관’을 병행해야 한다.

● 雖知本不生今不滅

본문에서 ‘비록 본래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현재 소멸하지도 않음을 알아야 하며 관찰해야 한다[雖知本不生今不滅].’고 했다. 여기서의 ‘수(雖)’는 대략적인 지향점을 밝힌 것이어서 《대승지관법문》의 다음 문장에서는 뜻을 이어나간다.

● 而以心性緣起不無虛妄世用

망상은 언제든지 일어난다. 마치 물에는 원래 파도가 없지만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어나는 것과 같다. 이른 바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의 인연에 따라 10법계(十法界)가 조성된다. 이 말의 뜻을 명확히 알기 위해 ‘심성연기(心性緣起)’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문장의 ‘심성연기’란 ‘나의 심성이 인연을 따라 제법으로 일어났다’는 뜻이다. 사실 내가 어떠한 망상을 일으키는 바에 따라, 마음은 본래의 일심(一心) 자리를 고집스럽게 지키지 못한다.

가령 내 본성이 염법으로 번뇌를 따르면, 6도 윤회의 세계가 벌어진다. 반대로 내 본성이 청정한 정법의 인연으로 출세간 4성법을 형성하면 불법계(佛法界)가 형성된다. 다시 말해 세간이든 출세간이든 전부 심성연기다. 우주만유(宇宙萬有)가 전부 내 마음 인연을 따라 일어나며, 인연을 따라 우리 본성은 바로 일어난다.
그런데 세상에는 감응하는 작용이 있다. 그러한 작용이 있다하더라도 모름지기 그것이 허망한 내 분별의 모습임을 명료하게 알아야 한다. 세상의 작용을 내 마음 허망분별의 인연임을 명확히 모른다면, 이를 가리켜 불가에서는 범부(凡夫)라 한다.

제법이 바로 자신의 허망 분별한 모습인데 이를 모른다면, 항상 생사의 세계를 유랑하면서 괴로운 생사윤회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우리 부처님께서는 늘 말씀하셨다.

현실적으로 제법의 작용이 내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설혹 자신의 허망한 분별 인연의 모습임을 안다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그치면 안 된다. 없다고 여긴 나머지 ‘저것이 있다 해도 실제로 세상에 작용하는 것은 없다’는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편공(偏空)에 치우친 것이다. 지극히 경계해야할 모습이다. 편공에 치우치게 되면, ‘없다’는 것만 알고 거기에 치우친다. 없는 자리에서 다시 현실적으로 지혜를 일으켜 관찰이 일어나지 않는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안 되는 것이다.

이렇듯 ‘공’만 알고 거기에 치우친 이들을 가리켜 소위 2승의 범부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염려하셨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한 ‘허망세용(虛妄世用)’ 이 네 글자를 주목해야 한다. 이어지는 문장인 ‘유여환몽비유이유(猶如幻夢非有而有)’에서 볼 수 있듯이, 허망한 세상의 작용을 정면으로 밝힌 것이기 때문이다.

● 猶如幻夢非有而有

‘유여환몽(猶如幻夢)’은 ‘제법이라는 것은 마치 허깨비와 같고 꿈과도 같다.’는 뜻이며, “非有而有”는 ‘실제로 있지 않은 것이 허깨비로 있다.’는 의미다. 여기서 ‘환(幻)’이란 ‘가(假)’의 뜻이다. ‘몽(夢)’이란 꿈이라는 뜻으로서 그 범위는 극도로 광대하다.

‘몽’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자. 우리가 잘 때 꾸는 꿈은 원래의 꿈이다. 그런데 우리가 깨어 있을 때도 역시 꿈속에서 살고 있다. 예컨대 6도 범부들의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을 그 일례로 들 수 있다.

다음, ‘환’을 설명하기 위해 연극을 보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경우를 비유로 들어보겠다.

연극을 보거나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 눈앞의 대상이 분명 거짓이란 것을 안다. 이렇듯 알면서도 우리는 인연을 따라 그 일을 행한다. 그러나 비록 그러한 일을 현재 행할지라도 그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닌 가짜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영명 연수(永明延壽, 904~975)대사는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여 우리의 주목을 끈다.

“거울에 비친 마군에게 항복 받아, 꿈속에서 불사(佛事)를 크게 지어, 허깨비와 같은 중생을 광대하게 제도하여, 모두 함께 적멸한 보리를 증득한다[降伏鏡像魔軍 大作夢中佛事 廣度如化含識 同證寂滅菩提].”

요컨대 이를 ‘관’수행이라 할 수 있겠다. 즉 이 수행공부는 전체 내 마음에서 지혜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앞서 언급되었던 문장 가운데 ‘수지본불생금불멸(雖知本不生今不滅)’의 구절은 즉시 아무리 생멸의 인연을 따른다 할지라도 본체는 변치 않는다는 수연불변(隨緣不變)에 해당된다.

그것이 아무리 허깨비라 할지라도 심성연기라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정말 없는 것도 아니다. 허망하게 세상으로 작용한다는 의미의 ‘이이심성연기불무허망세용(而以心性緣起不無虛妄世用)’ 구절은 바로 불변수연(不變隨緣)이다.

‘제법’은 ‘환’과 같고 ‘몽’과 같다. 즉 비유이유(非有而有)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있지 않은 것이 허깨비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서의 본문에서 언급된 ‘유여환몽비유이유(猶如幻夢非有而有)’ 구절은 유무 양쪽을 전부 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故名為觀

또한 우리들은 알아야 한다. 이 대승지관법문은 일념에서 동시에 구족된다. ‘지’를 닦고 ‘관’을 닦는다든지, ‘관’을 닦아 도를 증득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다. 극히 단박에 이뤄지는 돈교법문이다.

논리적으로 ‘지’과 ‘관’을 나누어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지’와 ‘관’은 두 모습이 아니다. 가령 모든 법이 허망하다고 ‘관’을 일으키는 순간, 일념에서 동시에 망상이 사라진다. 망상이 사라짐과 모든 법이 허망하다는 ‘관’이 동시에 일념에서 이루어진다.

고요하면서 항상 관조하고 관조하면서 항상 고요하다. 마치 거울이 항상 고요하면서 항상 모든 사물을 비춤과 같다. 고요한 자리와 관조하는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두고 ‘지’와 ‘관’이 둘이 아닌 오묘한 지관이라 한다. 즉 ‘묘지관(妙止觀)’이다. 만일 우리들이 이 오묘한 지관도리에 대해 간략하게나마라도 체득한다면, 그 누리는 바 다함없이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2회에 걸쳐 ‘지’와 ‘관’의 대략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첫 회부터 이번 호까지의 내용은 《대승지관법문》의 서두 부분에서 소개하고 있는 지관의 개요에 해당한다. 차후에 연재될 내용의 파악을 위해 그간 연재한 기사 가운데 요긴한 부분을 함께 되새겨보며 이번 호를 매듭짓기로 하자.

정법(正法)은 대승(大乘)이며 지관(止觀)의 다른 이름이다. 이 가르침은 중생의 이익을 위한 것이며, 쉴 사이 없이 부지런히 닦아야 하며 또한 부단히 전등(傳燈)해야만 한다. 불법(佛法)의 전수는 곧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사람으로부터 백사람에게 전해져야하고, 스승과 제자 혹은 아버지와 아들의 경우처럼, 서로 서로 번갈아가며 전수하고 설법되어야만 한다.

사실 우리 중생들이 일반적으로 있다고 믿는 이 망상의 세계, 다시 말해 모든 안팎의 존재에 해당하는 ‘제법(諸法)’은 ‘자성(自性)’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제법’의 ‘자성’이 없으니, 날 것도 없고 소멸할 것도 없다. 인연에 따라 허망하게 나온 일이 없고, 소멸할 일도 없다. 당연히 허망한 구분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분명 허망하고 실체가 없는 이 인연의 모습은 허깨비와도 같고 꿈과도 같지만, 또한 우리들의 현실 생활에서 위대한 작용을 해내기도 한다.

‘제법’은 심성(心性)이 우리들의 허망한 인연을 따라 일어난 것이다. 오로지 듣고[聽] 가리고[擇要] 행하는[行] 문사수 3혜(三慧)를 닦아 그 실체를 올바로 직시하고 허망한 망념이 외부로 흐르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올바른 지혜로 ‘제법’이 허망하다고 ‘관’을 일으키는 순간, 일념에서 망상이 사라진다. 망상의 그침은 ‘제법’이 허망하다는 관조와 함께, 일념에서 이루어진다. 비유하면 마치 거울이 항상 고요하면서도 늘 모든 사물을 비추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고요한 자리와 관조하는 자리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가리켜 불가(佛家)에서는 ‘지’와 ‘관’이 둘이 아닌 묘지관(妙止觀)이라 한다.(계속)

講 : 송찬우(중앙승가대학교 교수)
集 : 정성우(한국불교선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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