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마음에 의지하여 두 개의 문이 열린다. -대승기신론

1. 자유와 평등은 함께하지 못하는가?

자본주의는 자유를 누리는 대신 평등은 희생할 수밖에 없다고 하며, 공산주의는 평등을 실현하는 대신 부자유를 감수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전자는 자유를 선택한 대가로 빈부격차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후자에서는 경제적 평등을 구현하는 대신 자유가 제한됩니다. 그렇다면 자유와 평등은 동시에 구현될 수 없는 것일까요?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자유롭지 못한 평등은 있을 수가 없고, 불평등한 자유 또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유롭지 못한 평등이란 감옥에 똑같이 수감된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는 죄수이고 누구는 간수인가요? 그 자체가 이미 불평등입니다. 불평등한 자유 또한 거짓입니다. 못 가진 자는 가진 자에게 예속되기 마련입니다. 따지고 보면, 월급을 받는 대가로 월급을 주는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해야만 하는 노사관계는 현대판 노예제도인지도 모릅니다. 너무 심한 비유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돈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자유는 평등의 반대급부가 아니라 가난의 대가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섯 되 쌀을 위해 허리를 굽힐 수는 없다.”며 벼슬자리 팽개치고 낙향한 사람은 도연명(陶淵明)이었습니다. 그는 자유를 얻는 대신 평생을 가난 속에 살아야만 했습니다. 초(楚)나라 왕이 장자(莊子)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재상에 앉히고자 많은 예물과 함께 사자를 보냈습니다. 사자에게 장자는 말합니다.

“천금이라면 큰돈이고 경상(卿相)이라면 높은 지위이지요. 그대는 큰 제사에 희생으로 바치는 소를 보지 못했소? 수년간 맛난 음식을 먹이고 아름답게 수놓은 비단 옷을 두르고 있다가 태묘에 끌려갑니다. 이때에 그가 비록 어린 돼지가 되고 싶어한들 가당치나 하겠소? 그대는 돌아가시오. 나는 정녕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스스로 즐거워할지언정 나라를 소유한 권력자에게 재갈이 물리는 짓을 하고 싶지 않소이다.”

부귀영화는 그만큼의 재갈을 물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고 재벌이신 분은 입만 열면 “위험하다! 불안하다!”를 되풀이 합니다. 그 분은 엄청난 재산을 쌓아놓고 매일을 불안 속에 사는 것 같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돈이 너무 많으면 내가 돈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되어 그 돈을 관리하고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결코 자유로운 인생이라고 하지 못할 겁니다.

자유는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가져온다고 자유시장주의자들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시장은 자유경쟁을 통해 효율성을 높이는 체제인데, 경쟁의 결과로 승패가 갈라지고, 이에 따른 빈부차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야말로 허구이며 거짓입니다. 먼저 경쟁의 결과가 정당하려면 경쟁자체가 공정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힘센 레슬링 선수와 어린 아이를 함께 링 위에 올려놓고 자유롭게 싸우라고 한다면 이 경쟁을 공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체급이 같은 선수들끼리 싸우도록 한다면 그 자체가 자유시장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경쟁이 아닙니다. 그래서 케인즈는 말합니다. 저들 자유시장주의자들이 말하는 공정한 자유시장이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야말로 거짓이고 허위입니다. 불평등한 자유란 허구입니다.

2. 지배체제와 지배이념

그들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인간들은 누구든 다 유혹해요.
…(중략)…
그대는 얼른 그 옆을 지나가되, 꿀처럼 달콤한 밀랍을 이겨서
전우들의 귀에다 발라주세요.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말예요. 그러나 그대 자신은 원한다면 듣도록 하세요.
그대는 돛대를 고정하는 나무통에 똑바로 선 채 전우들로 하여금
날랜 배 안에 그대의 손발을 묶게 하되, 돛대에다 밧줄의
끄트머리들을 매게 하세요. 그러면 그대는 즐기면서 세이렌 자매의
목소리를 듣게 될 거예요.
―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이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 이미 언급한 시입니다. M. 호르크하이머와 Th.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이 시로 문명사회의 성립을 설명하였습니다. 세이렌의 유혹을 극복하는 과정은 문명화의 알레고리입니다. 인간이 자연의 위협을 극복하며 문명을 건설하는 과정은 곧 대장과 병사, 노동하지 않는 자와 노동하는 자로 분리되는 과정입니다. 이런 분리를 통하여 지배와 피지배관계가 만들어집니다. 맹자(孟子)는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는 허행(許行)을 비판하며, 정신을 쓰는 자는 사람을 다스리고 힘을 쓰는 자는 다스림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영역은 서로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지배체제가 완성되는 과정이 곧 사회화의 과정이며 이 과정을 통해 문명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진시황릉 같은 고대문명의 거대한 무덤들은 이런 문명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물입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만 사람의 희생이 정당화되는 권력구조가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편 세이렌의 노래는 오직 오디세우스 한 명만이 듣습니다. 세이렌의 노래가 자연의 신비를 의미한다고 할 때, 이 우주의 비밀은 오직 대장 한 명에게만 알려지는 것입니다. 지배체제의 최고 정점에 있는 분, 즉 왕만이 하늘의 명령을 받을 수 있고, 교황만이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왕이나 교황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얻어 듣는 것뿐입니다. 신의 뜻은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서구 기독교의 전통적인 해석대로라면 하늘나라는 오직 예수와 그의 후계자인 교황을 통해서만 갈 수 있습니다. 가톨릭의 지배체제하에서 이런 불평등구조는 정당화됩니다. 동양도 다르지 않습니다. 천자(天子)는 천명(天命)을 받은 자로 하늘을 대신하여 그 뜻을 집행하는 단 한 사람입니다.

이런 지배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념이 다듬어지고 사상이 체계화됩니다. 이런 이념이나 사상을 지배이념이라고 한다면 지배이념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제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지배체제에 순응하고 복종하도록 하여야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연명이나 장자가 누린 자유란 무엇인가요?

3. 방외지사

자상호(子桑戶)와 맹자반(孟子反)과 자금장(子琴張) 세 사람은 드넓은 세계에서 자유롭게 놀던 막역한 친구들입니다. 그러다가 자상호가 죽었는데 장사를 치르지 않자 공자가 자공을 시켜 장례를 도와주도록 하였습니다. 자공이 가보니 한 사람은 곡을 만들고, 한 사람은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자공이 종종걸음으로 그들 앞에 나아가 묻기를, “시신을 앞에 놓고 노래하는 것이 예입니까?”라고 하자,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으며 “이 사람이 어찌 예를 알겠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공이 돌아와 공자에게 이런 사실을 아뢰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저들은 방외(方外)의 사람들이니라. 나는 방내(方內)의 사람이니, 예법(禮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예법의 안과 밖은 서로 관여하지 않는데 내가 괜히 너를 보냈다. 저들은 조물자와 벗이 되어 천지 사이에서 노는 사람들이다. 저들에게 생은 쓸데없이 붙어 있는 사마귀요, 죽음은 종기가 터지는 것에 불과하다.……그러니 어찌 번거롭게 세속의 예를 갖추어 사람들의 이목에 띄려 하겠느냐.”

예법은 유교적 질서체계의 근간입니다. 동양사회는 유교적 예법과 그 이념으로 유지되는 사회입니다. 이 질서에서 예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행세할 수 없습니다. 예법에 밝고 유교적 이념에 투철한 사람이 관료로 선발되어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부귀영화 또한 이 체제에 순응하며 기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유교적 예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부모가 돌아가셨으면 마땅히 삼년상을 치러야 하고, 친구가 죽으면 슬픔으로 애도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노래하며 춤을 춥니다. 이들을 유교적 가치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방외지사(方外之士)라고 합니다.

하늘이 허균(許筠)이란 한 괴물을 세상에 내셨는데……균의 일생은 모든 악이 구비되었으며, 인륜의 도덕을 어지럽혔고 행실을 더럽혔습니다. 이는 사람의 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상중에도 기생을 끼고 놀아서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허경진 지음, 《허균평전》, 돌베개

허균은 어머니 상중에 기생하고 놀아나며 애까지 낳습니다. 이런 행위는 유교적 예법질서에 크게 위배되는 것이기에 당연히 많은 비난을 받게 됩니다. 이런 비난에 대해 허균은 이렇게 말합니다.

남녀 간의 정욕은 하늘이 주신 것이요, 인륜과 기강을 분별하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이 성인보다 높으니, 나는 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내려주신 본성을 감히 어길 수는 없다. 위의 책

성인의 예법을 지키기보다는 본능에 충실하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허균이 참으로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내려준 본성을 어길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면, 그는 방외지사로 살아야 합니다. 그랬다면 그는 온전히 주어진 삶을 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허균은 방내에 있으면서 방외지사로 살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욕심입니다. 누군들 부귀영화를 누리며 자유롭게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는 것은 방내에서 방외의 삶을 살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김시습은 방내와 방외를 오갔습니다. 그는 승려가 되어서도 유교의 절의를 지켰고, 유교적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방외의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더 슬픈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경계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만, 다만 분명한 건 지배체제에 순응함으로써 얻게 되는 달콤한 인생에 뜻을 두지 않았기에 율곡선생의 평가대로 “기휘(忌諱)를 범하고 공경대신(公卿大臣)에게 모욕을 주어도”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어쩌면 유교든 도교든, 그리고 불교든 자유자재, 막힐 게 없었던 매우 큰 방외지사였는지도 모릅니다.

오랫동안 불경을 읽어온 것은
내 마음 머물 곳이 없었기 때문일세
이제껏 아내를 내버리지 못했거든
고기를 금하기 더욱 어려웠네
내 분수 벼슬과는 벌써 멀어졌으니
파면장 왔다고 내 어찌 근심할 건가
인생은 또한 천명에 따라 사는 것
돌아가 부처 섬길 꿈이나 꾸리라 위의 책

삼척부사로 내려간 허균(許筠)을 파직시키라는 사헌부의 계가 연이어 올라왔습니다. 선조도 어쩔 수 없이 허락합니다. 삼척에 내려온 지 13일만에 허균은 파면장을 받습니다. 이 시는 파면장을 받아들고 이제부터는 부처를 섬기며 살겠다는 속내를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진작부터 허균은 당시의 지배체제, 즉 성리학적 지배질서에 저항하였습니다. 승복을 입고 부처에게 절을 한다는 비난은 허균을 내내 따라다니던 것이었습니다. 예불 행위는 유교적 가치체제 내에서는 용납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허균이 시에서 밝힌 것처럼 진실로 부처를 섬기며 살겠다면, 이는 방외지사(方外之士)로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는 방내(方內)를 떠나지 않았고, 오히려 권력을 추구하였습니다. 안에서는 방외에서 놀고 싶은 욕망이 가득하고, 밖에서는 방내의 지배권력을 지향하는 모순은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집니다. 당연합니다. 전자는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고 싶은 건데, 후자는 그런 개별적인 자유를 용납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 비판담론, 불교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를 꿈꾸다

이 현상세계에서도 무애자재하시고 세상을 구하시는 대자비하신 분

《대승기신론》 귀경송(歸敬頌) 중의 한 구절입니다. 여기에서 무애자재(無碍自在)란 장애됨이 없이 자유롭다는 말이니 곧 절대자유를 의미합니다. 이 경지가 어떤 경지인지는 설명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차별이 존재한다면 이는 이미 절대자유의 경지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유는 언제나 평등과 함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귀천, 시비, 선악의 차별이 있게 되면 이미 구속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시(是)고 무엇이 비(非)며, 무엇이 선(善)이고 무엇이 악(惡)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비선악은 본래 그러한 게 아닙니다. 특정한 가치체계는 특정한 방내(方內)에서만 통용되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예컨대 삼강오륜이 조선시대에서는 시비선악을 가르는 지배이념이었다면, 현대에서는 이미 그런 지배력이 없습니다.

《대승기신론》에는 평등(平等)이란 말이 참 많이 나옵니다. 진여평등(眞如平等), 본래평등(本來平等), 평등성(平等性), 평등연(平等緣) 등등…… 쓰임새는 매우 다양할지라도 평등이 지향하는 바는 하나입니다. 무차별의 절대자유. 나와 너, 이것과 저것의 구별조차 여윈 일체평등 절대자유의 세계가 불교의 이상경계입니다. 그리고 《기신론》에서는 이 자유와 평등을 일심(一心)이란 한 단어로 수렴합니다.

하나의 마음에 의지하여 두 개의 문이 열린다. 두 문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심진여문이요, 다른 하나는 심생멸문이니 각각 일체법을 총섭한다.

궁극적 진리의 세계인 진여문이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상세계나, 그 모든 것은 다 한마음으로 수렴됩니다. 그리고 이 한마음은 모든 중생에게 똑같이 있습니다. 왕이라고 해서 더 있고, 천민이라 해서 덜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증불감 일체평등(不增不減一切平等)한 것입니다.

서구기독교의 문제는 구원을 모두 신에게 귀속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런 체제에서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주창하며 ‘나는 신앙의 자유로운 군주’임을 주장하지만, 이 또한 ‘섬기는 종’으로써의 자유일 뿐입니다. 여전히 신에 구속됨은 피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성불은 부처에게 예속되는 게 아닙니다. 이는 주체 스스로의 문제입니다. 성불이 절대자유 일체평등의 경지라고 할 때, 그 가능성은 자유를 꿈꾸었던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킵니다. 특히 차별적 질서체제에 저항하거나, 지배이념에 의심을 품었던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불교는 그들의 문제의식을 일깨우고, 현실을 비판하는 가장 중요한 담론이 되었던 것입니다. 중국에 들어와 불교는 가장 중요한 비판담론을 형성하였던 것입니다.

허균이 실제로 지배체제의 권력을 탐했는지, 아니면 정말로 평등사회를 위한 혁명을 도모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가 꿈꾸었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이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차별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사랑의 발로라고 한다면, 그는 이미 보살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문갑(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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