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 때 ‘개미와 베짱이’라는 이솝우화를 읽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개미의 모습이야말로 바람직한 삶의 자세라고 배웠습니다. 미래를 위해서라면 현재의 달콤함에 빠지지 않는 인내력이야말로 인간의 미덕이라고 세뇌 당했습니다. 띵가띵가 놀았던 베짱이가 후회와 통한을 느끼면서 눈보라 속을 걸어가는 모습에서는 ‘꼴좋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타고 나기를 성실하지 못하고 부지런하지 못한 것을. 베짱이는 노래 부르는 것이 좋아서 부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래는 숙명이었고, 결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이 들어가면서 깨달았습니다. 베짱이는 질타의 대상이 아니라 연민의 대상이어야 했습니다.

코엔 형제감독의 음악영화 ‘인사이드 르윈(Inside Llewyn Davis)’(미국, 2013)은 베짱이가 주인공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베짱이의 겨울을 다루고 있습니다. 뉴욕의 살벌한 추위 속을 코트도 없이 걸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추위와 헐벗음을 안고 개미네 집으로 걸어가던 베짱이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영화는 베짱이의 잔인한 겨울을 보여줌으로써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요? 노래를 선택당한 베짱이의 비극을 보여주자고 했으며, 이는 인간의 삶의 조건이 꽤 부당하다는 의미고, 나아가 인간에 대한 연민을 표현했습니다.

아카데미 영화제 8회 수상, 칸느영화제 6회 수상의 천재적인 감독인 코엔 형제의 이번 영화는 1960년대 포크 음악의 부흥기에 활동했던 데이브 반 롱크라는 포크 뮤지션의 삶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데이브 반 롱크는 밥 딜런 이전시대의 뮤지션입니다. 밥 딜런이 혜성과 같이 등장해 당대 젊은이들의 우상이 됐던 것과 달리 반 롱크는 무명의 통기타 가수로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를 근거지로 활동했던 그냥 그 시절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실패한 뮤지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인물을 모델로 해서 창조된 주인공 르윈은 삶의 비밀을 많이 보여줄 수밖에 없는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영리한 감독은 스산한 인물에게 코미디라는 옷을 입힘으로써 영화의 전체적 분위기는 블랙코미디에 가깝습니다.

오프닝에서 르윈은 가스라이트라는 카페에서 ‘hang me oh hang me’라는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는 3분 정도 지속됩니다. 순식간에 감정의 물꼬를 바꿀 정도로 호소력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슬프고 처연한 기분에 빠지게 하는 곡입니다.

가스라이트 카페에 앉아있던 관객들도 꽤 진지합니다. 다들 숨죽이고 르윈의 음악으로 빠져듭니다. 누군가의 담배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만이 동적인 장면을 연출합니다. 이렇게 집중된 분위기에서 르윈은 주인공이 돼 노래를 부릅니다. 공연은 배우 오스카 아이삭의 라이브로 진행됐습니다.

영화는 노래 부를 때만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노래 부를 때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고 관심을 받고 주인공이 되고 어쩌면 선망의 대상도 되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모처럼만에 찾아간 누나는 “여기서 당장 꺼져”라고 소리 치고, 여자 친구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어쨌든 그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는 “넌 병신이야”를 입에 달고 있으며, 하다못해 엘리베이터맨도 지하철에서 처음 본 사람들조차 냉소적인 눈빛으로 그를 째려봅니다. 그가 몸담고 있는 현실은 이렇게 춥고 외롭습니다.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떠도는 들고양이와 같은 처지입니다.

오프닝이 끝난 후 고양이가 등장하는데 영화의 전개와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영화에는 모두 두 마리의 고양이가 나옵니다. 둘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았는데 처지는 왕자와 거지처럼 다릅니다. 한 놈은 집고양이고, 다른 놈은 들고양이입니다. 외모가 닮아서 사람들이 헷갈려 했는데, 그들의 정체성은 그들을 다른 길로 인도했습니다. 들고양이는 병들어 쓰러진 사람과 함께 차에 갇혔다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됐고, 집고양이는 자신을 끔찍이도 아끼는 주인이 있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집으로 돌아옵니다. 영화에서는 그들 각자 삶의 장단점을 따지지 않습니다. 무조건 집고양이가 좋다는 가정 하에 들고양이의 살벌한 삶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들고양이는 결코 집고양이가 될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난데없이 고양이가 등장했을까요? 르윈의 처지를 좀 더 형상화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골파인씨네 고양이와는 완전히 다른 처지였던 들고양이의 삶이 바로 르윈의 삶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어서 고양이가 나왔던 것입니다. 차가운 바람 부는 거리를 어깨 움츠린 채 걷는 모습은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인데 르윈의 들고양이 같은 삶을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었습니다.

르윈은 영화적 표현을 빌리면, 꽤 잡놈입니다. 길거리에 나앉은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가 원인인 것이지요. 친구의 여자 친구를 건드려 임신시켰으면서 그 친구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떼 쓸 정도로 원칙도 규칙도 없는 인간이지요. 영화에서 진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여자가 “넌 미래에 대해 생각이라도 해봤어?” 할 정도로 그냥 되는대로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심지어 조카조차도 ‘나쁜 놈’이라는 말에 동의할 정도로 사람들로부터 개차반 취급을 받는 인물입니다.

르윈의 성향은 자신을 타인들로부터 소외받게 하고, 또한 되는 일이 없는 실패한 인간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서 또 반문할 수 있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부른 게 아닌 것처럼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이 또한 그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을 것입니다. 그게 더 편한 길이니까요. 그렇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 더 많은 것입니다. 결코 규칙에 물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르윈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영화의 엔딩은 오프닝과 동일한 장면으로 구성됩니다. 오프닝에서 멋지게 주인공 같은 모습으로 노래를 불렀던 르윈은 노래가 끝나자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밖으로 나가고 어두운 골목에서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얻어맞는데 감독은 영화 엔딩에서도 똑같은 장면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는 알고 보니 르윈이 전날 망신을 주었던 가수의 남편이었고, 르윈은 맞을만했습니다. 그 남자는 “우린 떠날 것이다. 이런 시궁창 같은 곳에 너나 살아, 멍청아!”라고 말하고 떠납니다. 르윈은 그에게 “잘가.”라는 인사를 하고 영화는 끝납니다.

이렇게 누군가는 떠나고 집고양이는 집으로 돌아오고, 그런데 르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들고양이의 삶을 청산하고자 노력했지만 그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고,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르윈의 미래는 그의 아버지입니다. 세션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스튜디오에서 계약서를 쓸 때 그는 주소를 쓰는 난에서 망설였습니다. 집이 없는 그에게 주소가 있을 리 만무하니까요. 그리고 전 여자 친구의 낙태를 맡았던 의사를 만나러 갔을 때 그 의사도 연락을 하려고 했지만 주소도 연락처도 몰라서 못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정체성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를 기억해냈습니다. 오디션에 떨어지고 선원이 되려고 선원협회에 갔을 때 직원은 “네가 휴즈의 아들이구나.”라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휴즈는 르윈의 아버지고, 아버지는 선원이었습니다. 르윈은 아버지의 삶을 찌질하다고 무시했었습니다. 근근이 살아가는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다고 했었는데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선원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르윈을 르윈 자신으로서 봐주지 않고 아버지의 아들로 인식했으며 르윈의 정체성은 선원 휴즈의 아들이었습니다.

영화에서 한 번도 이렇게 구체적으로 정체성을 부여받은 적 없었는데 그는 아버지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골파인씨네 고양이가 집을 찾은 것처럼 르윈의 집은 결국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골파인씨네 집은 좋은 냄새가 나고 따뜻하고 밝은 곳인데 르윈의 주소에 해당하는 르윈의 아버지는 요양원에서 오줌이나 싸는 정신없는 노인네입니다. 결국 그가 돌아갈 곳은 여기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니까 들고양이의 스산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에게는 어떤 보상도 없다는 것이지요. 지금을 견디면 뭔가 좋은 것이 있을 거야 하지만 무의미한 고통일 뿐인 것이지요. 바로 이게 삶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고통뿐인 삶, 이런 삶에서 그가 유일하게 평화와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은 노래를 부르는 순간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나면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리고 참 피곤하다는 생각도 들고 슬프고 스산한 기분에 빠지기도 합니다. 주인공의 처지가 돼 아마도 그가 겪었을 감정을 105분 동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의 삶은 르윈과 별로 다르지가 않을 것입니다. 들고양이든 집고양이든 나름의 고통은 있고, 이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삶인데, 사람들은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말을 읊조리면서 묵묵하게 잘도 견뎌내는데 영화는 정확하게 말해줍니다. ‘내일이라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고. 그렇지만 어떡하겠는가, 이게 인간의 삶의 조건이니 그냥 노래를 부르면서 살아가는 수밖에’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삶의 척박함을 확인하게 하는 서글픈 영화였습니다.

-김은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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