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1970~ )는 강릉에서 태어나 강원대 국어교육학과 졸업하고,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도화 아래 잠들다》《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장편소설 《캔들 플라워》《물의 연인들》, 산문집 《물밑에 달이 열릴 때》를 펴냈다. 현대문학상, 천상병시상을 수상한 그는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1. 시혼의 대관령, 옛길이며 지금 여기의 길

생동하는 시어와 기발한 상상력으로 아름답고 따뜻한 시세계를 보여주는 김선우는 80년대 말에서 동구권이 무너지는 90년대 초에 걸쳐 대학을 다녔다. 그 시절, 그는 시와 가깝다기보다는 ‘혁명’을 꿈꾸는 피가 뜨거운 청년이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할 시점인 1992년은 탈냉전의 시대가 도래하여 치열했던 이데올로기의 ‘혁명’은 무용지물이 되고, 함께 꿈을 꾸었던 이들도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처럼 스스로 운동권으로 살지 않았으면 볼 수 없었던 세계, 사유하지 못했을 세계를 경험했던 그야말로 참담한 생의 질곡에서 그를 끌어올려준 게 바로 시였다. 그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인간에 대해 아파하며 뜨거운 청춘과 이별하는 시를 하나 썼는데, 그것이 그의 문단 데뷔작 〈대관령 옛길〉이다.

폭설주의보 내린 정초에/ 대관령 옛길을 오른다/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올리는/ 각양각색 의 얼음꽃// 소나무 가지에서 꽃숭어리 뭉텅 베어/ 입 속에 털어넣는다, 화주火酒― / 싸하 게 김이 오르고/ 허파꽈리 익어가는지 숨 멎는다 천천히/ 뜨거워지는 목구멍 위장 쓸개/ 십이지장에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컹 올라온다/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건/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붉게 언 산수유 열매 하나/ 발등에 툭, 떨어진다// 때로 환장할 무언가 그리워 져/ 정말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워질 적이면/ 빙화의 대관령 옛길,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 는 나의 길을 걷는다// 겨울 자작나무 뜨거운 줄기에/ 맨 처음인 것처럼 가만 입술을 대 고/ 속삭인다, 너도 갈 거니? -〈대관령 옛길〉전문

지독하게 뜨거워져 빙점에 도달한 시인의 삶에 대한 시혼이 그대로 표출되어 있다. 시적 화자는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대관령 옛길’을 걸으며 현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과거와 미래를 함께 생각한다. 소중한 대상의 부재에 시달리는 것 같은 시인에게 추운 겨울 제 허물을 겹겹이 벗으며 “뜨거운 줄기”를 노출하는 자작나무는 시인의 안타까운 속내를 드러내는 이미지이다. “얼음꽃”이 “화주(火酒)”로 변하는 강렬한 감각 이미지가 제시되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다. 마지막 행에서 인격이 없는 존재인 자작나무에게 “너도 갈 거니?”라는 물음은 부재에 대한 절실한 안타까움을 토로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대관령 옛길'임을 함축하고 있다. 한편, 여기에는 외면적으로 보면 이별한 연인의 서러운 속울음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청춘을 떠나는 뜨거운 별사(別辭)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고향인 강릉을 벗어나거나 그곳으로 돌아갈 때 넘게 되는 대관령은 시인에게 현재와 과거, 미래가 겹치는 서정적 공간이 되고 있다. 그래서 대관령은 영원한 ‘옛길’이면서 동시에 ‘지금 여기의 길’이 되는 셈이다.

2. ‘어머니’는 세상 모든 몸들의 원천이자 회향의 공간

김선우의 시에 가장 발랄하게 담겨있는 것은 성(性)에 대한 상상력이다. 1990년대 유행했던 몸에 관한 담론이나 페미니스트들의 몸 해방론 같은 유행보다는 유소년기를 보낸 강릉이라는 자연환경에서 얻은 힘이 그러한 시의 원동력이다. 그래서 살아 꿈틀대는 새롭고 넉넉한 ‘모성성’과 ‘여성성’을 발견해내는 그의 시들은 기존의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시들이 보여주었던 투쟁적이거나 자조적인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벗어나 시각과 이미지, 시적 표현 모두에서 여성적인 정체성을 명징하게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몸의 시학으로서 일체의 미학으로 발현한다. 특히 시인은 어머니의 몸을 통하여 자신의 몸을 인식하고 늙어 병든 육신에 대한 슬픔을 녹여낸다. 다시 말해 여성의 육체적인 운명을 유희나 관념이 아닌 현실의 절실함으로 읽어낸다. 그 대표적인 시가 몸져누운 어머니의 몸을 수발하며 애틋한 마음으로 어머니의 삶을 읽어내는 〈내력〉이다.

몸져누운 어머니의 예순여섯 생신날/ 고향에 가 소변을 받아드리다 보았네/ 한때 무성한 숲이었을 음부/ 더운 이슬 고인 밤 풀여치들의/ 사랑이 농익어 달 부풀던 그곳에/ 황토먼 지 날리는 된비알이 있었네/ 비탈진 밭에서 젊음을 혹사시킨/ 산간 마을 여인의 성기는 비탈을 닮아간다는,/ 세간속설이 내 마음에 천둥 소낙비 뿌려/ 어머니 몸을 닦아드리다 온통 내가 젖는데/ 겅성드뭇한 산비알/ 열매가 꽃으로 씨앗으로 흙으로/ 되돌아가는 소슬 한 평화를 보았네/ 부끄러워 무릎을 끙, 세우는/ 어머니의 비알밭은 어린 여자 아이의/ 밋 밋하고 앳된 잠지를 닮아 있었네/ 돌아갈 채비를 끝내고 있었네” - 〈내력〉전문

아픈 어머니의 몸을 속속들이 만지고 보살피며 가엾어 하는 딸의 독백에는 어머니가 살아온 삶, 그 자체가 나를 바라보는 삶의 거울로 비쳐지고 있다. 혹독하고도 힘들게 일하지만 그에 비해 소출은 적은 “비탈진 밭”은 어머니의 고된 삶을 대변한다. 그런데 그것은 고향을 버리고 떠나면 그만인 현실상황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인의 모태이기도 한 ‘어머니의 비알밭’은 언젠가는 드러나고야 말 몸의 내력이다. 그 과정을 시인은 열매가 거꾸로 꽃이 되고 씨앗이 되어 다시 흙에 묻히는, 즉 어머니의 몸이 다시 그 본원인 흙으로 돌아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그려낸다. 이러한 몸의 진실 앞에서 시인은 상당한 심적 동요를 느끼기도 하지만 결국 ‘소슬한 평화’를 인식하기에 이른다. 여성의 몸을 단지 소진된 여인의 쓸쓸한 내력만으로 보고 촉촉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지극한 사랑이 없다면 ‘어머니의 몸’은 황폐한 밭에 불과했을 것이고 다시 평화를 찾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생각의 거울은 깨달음을 통해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세상 모든 몸들의 원천이자 회향의 공간인 것이다. 여성의 신체 기관이 구체적인 이름으로 직접 등장해도 전혀 외설스럽지 않다. 김선우의 이러한 시 쓰기 전략은 그냥 끓여도 되는 ‘아욱’을 부드럽게 만들어서 국 끓여 먹이려고 했던 마음, 거기서 사랑과 관능을 말하고자 하는데서 한결 극화된다.

아욱을 치대어 빨다가 문득 내가 묻는다/ 몸속에 이토록 챙챙한 거품의 씨앗을 가진/ 시 푸른 아욱의 육즙 때문에// ―엄마, 오르가슴 느껴본 적 있어?/ ―오, 가슴이 뭐냐?/ 아욱을 빨다가 내 가슴이 활짝 벌어진다/ 언제부터 아욱을 씨 뿌려 길러 먹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으응, 그거! 그, 오, 가슴!/ 자글자글한 늙은 여자 아욱꽃핀 스민 연분홍으로 웃 으시고//... 치댈수록 깊어지는/ 이글거리는 풀잎의 뼈/ 오르가슴의 힘으로 한 상 그득한 풀밭을 차리고/ 슬픔이 커서 등이 넓어진 내 연인과/ 어린 것들 불러 모아 살진 살점 떠 먹이는/ 아욱국 끓는 저녁이네 오, 가슴 환한. -〈아욱국〉부분

관능이라는 육체의 오르가슴과 김선우의 ‘아욱국’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양상이다. ‘관능’에 깃든 짙은 편견 때문이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아욱국’의 관능은 시야를 가리는 값싼 이미지를 걷어내고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온다. 화자는 엄마에게 “엄마, 오르가슴 느껴본 적 있어?”라고 묻는다. “오, 가슴이 뭐냐?” 엄마의 순진한 반문에 발칙한 딸은 ‘가슴이 활짝’ 벌어진다. 딸은 ‘오르가슴’을 묻는데 어머니는 ‘가슴’을 묻는다. 어머니는 홍조를 띠고 웃는다. 하지만 엄마라고 오르가슴을, 관능을 모를까. 모성의 신화에는 오르가슴은 없다. 오랫동안 가난을 참고 아버지를 보필하며 자식을 거두어 먹이는 것이 어머니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몸속에 이토록 챙챙한 거품의 씨앗을 가진/ 시푸른 아욱의 육즙’에서 화자는 제 몸, 뭇 여성의 몸, 생식(生殖)하는 몸의 동물적인 어떤 상황과 현장을 유추한다. 싱싱한 성, 경이로운 관능을 느끼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시든 듯 보이지만 물에 치댈수록 풀잎처럼 싱싱하게 살아나는 ‘아욱’은 세계를 낳고 기르는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을 표방한다. 오, 가슴! 은밀한 곳에서 속삭이는 단어들을 자연을 닮은 보편적인 풍경으로, 건강한 일상으로 흡수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이처럼 김선우는 여성의 몸과 생리를 파고들어 감각적인 시구로 조형해내는 데 탁월함을 보여준다. 생명의 출구이자 궁극적 회귀의 공간으로서 여자의 몸이 성소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는 소모되는 무엇이 아니라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그리고 세상을 창조한 신들의 거처로 본다.

수련 열리다/ 닫히다/ 열리다/ 닫히다/ 닷새를 진분홍 꽃잎 열고 닫은 후/ 초록 연잎 위에 아주 누워 일어나지 않는다/ 선정에 든 와불 같다/ 수련의 하루를 당신의 십 년이라고 할 까/ 엄마는 쉰 살부터 더는 꽃이 비치지 않았다 했다/ 피고 지던 팽팽한/ 적의赤衣의 화 두마저 걷어버린/ 당신의 중심에 고인 허공/ 나는 꽃을 거둔 수련에게 속삭인다/폐경이라 니, 엄마,/ 완경이야, 완경! -〈완경(完經)〉전문

시에서 어쩌면 ‘월경’은 금기어처럼 되어 왔지만 시인은 그런 시각을 과감히 뛰어 넘고 있다. 첫 연에서 화자는 꽃이 진 수련을 ‘선정에 든 와불’로 비유한다. 수련은 와불이고 와불은 곧 폐경을 맞은 어머니이다. 그러나 화자는 연민이나 처연한 눈길로 대상을 바라보지 않고, ‘꽃을 거둔 수련’에게 ‘폐경’이 아니라 ‘완경’이라고 속삭인다. 또 다른 존재의 완성이다. 아울러 화자는 어머니의 몸속에서 ‘허공’을 본다. ‘허공’을 여성성의 종결이나 소멸로 보지 않고, 충일한 ‘원’(圓)의 세계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주체와 타자, 여성과 남성 등 이분법을 초월한 새로운 삶의 자리이다. 이와 같이 시인은 거대한 경전을 그러나 거창하게 읽어내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시의 가장 큰 매력이자 독자의 가슴을 건드리는 이유이다.

3. 중중무진의 불교적 생태인식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이 있는 것들의 진정한 삶은 대상과의 합일인 소유이고, 소유는 나와 타자의 관계에서만 온전하게 성취될 수 있다. 대상과의 합일을 시도할 때의 ‘나’는 자연의 한 조각으로 모자이크돼 생명력을 얻게 된다. 이런 시각에서 김선우는 물질사회의 풍부함보다는 자연의 영적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생태적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순환성의 여성성이나 생명을 가진 것들의 생명 꽃 피우기에 닿아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만나지는 세계가 불교적 사유이다. 그래서 자연의 일부로 여기며 살아온 시인은 꽃의 몸과 자기 몸이 포개어져 성애와의 화해로까지 의미를 확장시킨다. 타자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진정한 ‘나’를 드러내는 본능적 행위임을 2008년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 시’ 수상작인〈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에서 명료하면서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전문

내가 꽃이 되는 느낌, 그 상상이 자연스럽게 몸으로 습득되어 시를 낳게 했다. 꽃들은 시기를 달리하여 경쟁하지 않고 차례대로 그 아름다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다. 꽃은 기본적으로 여성성을 내포하고 있어서 꽃이 피는 것과 연동하여 몸이 떨리고 아득하고 뜨거워지는 것은 자연스런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화자는 꽃이 피는 것을 보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그대가 피는 것인데/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라고 의아해한다. ‘나’와는 상관없을 것 같은 ‘너’의 행위가 나를 떨게 하는 이유가 못내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다. 더 이상한 것은 꽃으로 꽃벌 한 마리가 날아들었는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 순간 화자는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입아아입(入我我入)’이라고 했다. 저것이 나한테 들어 있고, 내가 저것 속에 들어 있다고 했다. 내 몸속에 잠든 이는 ‘나’뿐이었을 것이지만, 내가 아닌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꽃을 피워내는 몸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생태계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주고받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로 인지해가는 과정이 투명하고 선명하다.
시인은 사물의 소리를 듣고 사물에게 영혼을 불어넣는다. 사물은 물론, 물이나 심지어 허공에도 몸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몸들을 통해 사랑을 깨닫고 희생을 깨닫고,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낸다. 이와 같이 몸들의 수평적 연대와 몸들의 수직적 연계에 대한 경험론적 사유는 김선우가 세상 만물을 아프지만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생태인식의 출발점이자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 전형적인 시가 여성적인 몸을 통해 세상의 귀를 여는〈돌에는 귀가 많아〉이다

귀가 하나 둘 넷 여덟/ 나는 심지어 백 개도 넘는 귀를 가진 돌도 보았네/ 귀가 많은데 손이 없다는 게 허물될 것 없지만/ 길 위에서 귀 가릴 손이 없으면 어쩌나/ 나도 손을 버 리고 손 없는 돌을 혀로 만지네/ 이 돌은 짜고 이 돌은 시네/ 달고 맵고 쓴 돌 칼칼한 돌 우는 돌/ 단 듯한데 실은 짜거나/ 쓴 듯한데 실은 시거나/ 혀끝을 골고루 대어보아야/ 돌 이 자기 손을 어떻게 자기 몸속에 넣었는지/ 알 수 있네 무미무취라니!/ 무취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귀가 많으니 돌이야말로 맛의 궁전이지/ 당신이 가슴속에서 꺼내 보여준/ 막 쪼갠 수박처럼 핏물 흥건한 돌덩이/ 맵고 짜고 쓴데 귀 가릴 손이 없으니/ 내 입술로 귀를 덮네/ 입술 온통 붉은 물이 들어/ 어떻게 자기 귀를 몸속에 가두는지 보라 하네
-〈돌에는 귀가 많아〉전문

소외되고 배제된 존재들에 공감하는 시인의 섬세한 감수성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2006년 제20회 소월시문학상 우수상 수상작품이다. 돌에는 생명이 없다. 그런 돌에게서 세상의 말을 엿듣는 귀가 있다고 생각하는 시인이다. 말 못하고 움직이지 않는 돌의 귀가 무엇인지, 그 돌의 귀가 자신의 몸의 대상으로 비추어 지는 것을 잘 담아내고 있다. 짜고 맵고 싱겁다는 말은 사람이 혀로 맛을 보아야 느끼는 것들이다. 그러나 사람의 삶을 비유하여 표현할 때 짜고 맵고 싱거운 사실들은 사람의 내면 성향과 관계된다. 화자는 뜨겁게 자기 입술을 돌에 대고 늙음도 죽음도 없는 생명체인 돌의 근원을 느끼고 있다. 그런 맛을 보는 입술들이 무아경 속에 깃들어 있는 돌을 구분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은 내 입술로 귀를 덮고, 입술 온통 붉은 물이 들어 어떻게 자기 귀를 몸속에 가두는지 간파해 낸다. 여기에는 다분히 여성의 정체성이 사회적 참여를 통해 세상과 일체감을 가져야 한다는 시인의 에코페미니즘적 시각이 놓여진다.
이와 같이 남녀의 성차와 빈부의 차, 인간과 자연의 분열 등을 넘어 모든 것이 공생하는 생명을 꿈꾸는 것이 김선우식 에코페미니즘이다. 동해안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성장한 그는 환경과 생태계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 4대강 사업과 후꾸시마 원전사고 등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던진 그는 진화가 가장 늦된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이 저지르는 자연에 대한 폭력을 경고하고, 구제역 파동으로 인한 ‘살처분’ 행위를 명백한 집단 살해로 규정한다. 나아가 그의 이러한 생태인식은 바다풀로 종이를 만든다는 소식을 접하자 희망의 불빛을 발견하는데서 잘 드러난다.

바다풀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발명되었다/소식을 듣자마자 이력서를 쓰고 있어요/바다 풀 공장에 취직하고 싶어요//나무들의 유령에 쫓겨 발목이 자꾸 끊어지는/잊을 만하면 덜 컥 나타나는 악몽이 지겨워요/청동구두 같은 종이구두가 무서워요/(저 좀 들여보내주세 요)//나무들에 대한 진부한 속죄는 말고/바다풀 냄새 가득한 공장에서 일하고 싶어요/내가 만든 종이로 바다풀 시집을 엮고 싶어요 -〈바다풀 시집〉부분

아름다운 지구인 종이는 숲이다. “종이는 자연인 인간의 역사를 가장 자연스럽게 기록하는 숨결이다”라고 말하는 시인의 생태인식이 명징하게 드러나 있다. 종이 한 장을 쓰더라도 나무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인이 ‘바다풀’로 종이를 만든다는 뉴스를 보고 내가 드디어 종이를 쓸 때마다 나무들에게 갖는 이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을 기대한다. 종이가 인간이 추출한 물질이지만 이것의 근원이 자연이라는 느낌을 너무 자연스럽게 체험을 하고 자랐기 때문에 바다풀 종이로 시집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표출한다. 종이가 나무고 흙이고 숲이라는 느낌을 이론으로 배우기 이전에 이미 시인은 체험한 것임이 읽혀진다.
발우공양 때 외는 경전인 《소심경》 정식게(淨食偈)에서는 보이지 않는 작은 미물, 특히 국이나 물에 들어있을 수많은 박테리아나 세균까지 생각하는 극도로 세심한 생명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들어있다. “물 한 방울을 여실히 살펴보니, 팔만사천마리의 생명이 있구나. 만약에 이들을 살피지 않고 먹는다면, 중생의 고기를 먹는 것과 같다”라고 생각하며 그 생명을 위해 염불을 한다. 김선우의 이러한 생태적 감수성은 할머니가 설거지한 물도 한꺼번에 휙 버리지 않고 미물들이 다치지 않도록 조금씩 나누어서 버렸던 환경에서 자랐기에 일찍이 체득되었던 것이다.

토담 아래 비석치기 할라치면/ 악아, 놀던 돌은 제자리에 두거라/ 남새밭 매던 할머니/
원추리꽃 노랗게 고왔더랬습니다.// 뜨건 개숫물 함부로 버리면/ 땅속 미물들이 죽는단다
뒤안길 돌던 하얀 가르마/ 햇귀 곱게 남실거렸구요// 악아, 개미집 허물면 수리님이 운단 다/ 매지구름 한소쿠리 는개 한자락에도/ 듬산 새끼노루 곱아드는 발/ 싸리꽃이 하얗게 지곤 했더랬습니다. - 〈할머니의 뜰〉부분

이 세상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쉼 없이 움직이고 있는 작은 미물들, 그들이 거대한 생명의 숲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개숫물을 버릴 때도 뜨거운 물은 바로 버리지 않고 식혀서 버렸다. 뜨거운 물에 죽을 미물들을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다. 뜨거운 물을 함부로 버렸던 시인은 미물일지라도 생명을 귀히 여기는 할머니 마음에서 생명사랑의 깨달음을 얻고 있다. 여기에는 모든 생명체들은 서로 어울려 살며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시인의 생태인식이 담지되어 있다.

4. 절간에 불러들인 ‘세속의 사랑’

불교적 상상력은 문학적 상상력의 촉매역할을 종종 하곤 한다. 비로자나불은 특히 그 독특한 수인과 분열되고 소외된 타자가 없는 화엄 광명을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이 청정하면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는 부처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다. 비로자나불을 시적 소재로 한 김선우의 관능성은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두툼한 귀볼과 자비로운 미소에서 풍겨 나오는 그윽한 관능성과 닮아 있다.

불영산 수도암에 갔다가 / 비로자나 부처님과 한바탕 엉겼네//신랏적 부처들은 왜 그리 섹시하냐고 / 슬쩍 농을 건넸더니 반개한 두 눈 스스르 뜨시네 /허리춤을 간질였더니 예 끼, 손을 저으시네/ ... 아사달 아사녀의 달아오른 눈빛이/ 부럽지 않았나요 허허, 웃는 비로자나 부처님/ 아름다운 귓볼이 벌게지셨네// 色卽是空을 설한 부처의 몸을 빌려/ 관 능을 조각한 석공의 번뇌... / 법당 앞 고즈넉이 서 있는 삼층석탑 / 금간 탑신 아래 주 먹만한 벌집이 매달려 있었네/... 벌집 속으로 무상하게 드나드는 달마들 / 선남선녀 옷 자락이 하염없이 스쳐가네 /이 뭣꼬! / 부처를 범했더니 거기 내가 있네 - 〈벌집 속 의 달마〉부분

김천 수도암은 청암사의 부속 암자로 불령산 정상 부근에 있다. 도선국사가 이곳에 절터를 잡고 너무 좋아 사흘 밤낮으로 춤을 췄다는 옥녀직금형(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의 길지 중의 길지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수도암의 비로자나불은 석굴암 본존불에 버금가는 크기의 불상이다. 석공은 부처의 온몸을 수없이 매만지며 잘 다듬어 미남으로 낳고 싶었을 것이다. 시인은 대적광전 앞 삼층석탑 금간 탑신 아래 매달린 주먹만한 벌집에서 자궁의 서사를 읽어낸다. 자궁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창조의 장소이다.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에 행해야 할 것이 있다. 곧 육체의 결합이다. 그 놀라운 깨달음이 말미의 “이 뭣꼬!/ 부처를 범했더니 거기 내가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육체로 맞아들이고 인간의 성체험과 불교의 선적인 세계가 만나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결국은 안으로 보듬어 안아 생명을 창조하고 있다. 시인은 참으로 놀라고도 기발한 상상력으로 관능과 불도의 두 세계를 충돌하지 않고 융합하고 때론 이격시키면서 조화를 시키고 있다.
2005년 여름, 법보종찰 해인사에서 시차를 두고 제작되어 대적광전과 법보전에 따로따로 봉안되었던 두 부처가 통일신라시대 진성여왕이 죽은 연인 각간 위홍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최고의 쌍둥이 목조비로자나불로 밝혀졌다. 이를 기념하는 ‘비로자나 축제’에 부친 11편의 작품을 제본해 한정본으로 펴낸 시집이 《비로자나의 사랑》이다. 시인은 연꽃을 바라보며 진성여왕과 위홍이 나누었을 사랑의 감정을 우주적인 정서로 승화시키고 있다.

연꽃 속의 연꽃 속의 연꽃 속의 연꽃이여/그대와 나 꽃 속에 들어가네/그대와 나 꽃 속에 들어가/천 개의 꽃잎을 보네/천 개의 꽃잎 하나하나마다/천 개의 꽃잎 가진 연꽃이 들어 있네/처음 연꽃보다 작거나 크지 않네/성한데 하나 없는 비로자나 비로자나/그대가 온 곳 몰라도 /그대가 간 곳 몰라도/그대와 나 꽃 속에 들어가네/그대와 나 꽃 속에 들어가/천 개의 꽃잎 하나하나 속에/천 개의 꽃잎 가진 그대가 핀 걸 보네 -〈사랑의 정원2〉전 문

어느 시대인들 사랑보다 강력한 치유력이 있겠는가? 너와 내가 경계 없이 하나로 꽃피고, 너와 내가 삼라만상의 꽃으로 피어남과 동시에 삼라만상의 꽃잎이 하나의 존재에 깃들어 있음을 시인은 간파한다. 천 개의 꽃잎 속에 또 천 개의 꽃잎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다분히 화엄적 시각이다. ‘옴마니 밧메홈’은 ‘연꽃 속의 보석'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연꽃이란 여성의 가장 은밀한 속살인 부분이며, 보석이란 남성의 가장 우뚝한 돌기인 성기를 말한다. 이를테면 남녀 ‘두 몸이 한 몸 되어’ 합일을 이루는 가장 황홀경의 상태이다. 성한데 하나 없는 비로자나불 보듬는 사랑, 그것은 천 년 전의 사랑이나 천년 후의 사랑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고 꽃을 피웠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각인한다. 즉 천년 세월을 흘러온 여여한 마음이 ‘지금 여기’ 사랑의 기원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의 마음 얹힌 자리가 진흙연못의 가장 환한 경전이 된다. 비로자나불이 자연인으로서 개인의 사랑의 발원지가 되었다는 것은, 불상이되 신성함의 권위보다 인간의 피와 감성이 도드라짐으로써 불교적 상상력의 자장을 넓히고 있다 할 수 있다.
천수천안의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아픔과 중생의 고통을 치유하고자하는 대자대비의 원력보살이다. 숱한 존재들에 대한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시인은 그러한 염원을 잠자리의 아주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행위 혹은 몸짓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천 개의 손과 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상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천 더하기 하나를 통해서라도 구원의 가능성을 끝까지 모색하고자 하는 열망이 다음의 시에 잘 묘출되고 있다.

쓰러진 것들의 냄새 가득해요 비 그친 후 세상은/ 하루의 반성은 덧없고 속죄의 포즈 세 련되지만/ 찰기가 사라졌어요 그러니 안녕, 나는 반성하지 않고 갈 거예요/ 뾰족한 것들 위에서 악착같이 손 내밀래요/ 접붙이듯 날개를 납작 내려놓을래요// 수 세기의 겨울이 쌓여 이룬 가을 봄 여름이에요/ 비 그친 후 쓰러진 것들의 냄새 가득한/ 사랑이여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을 위해 울어요/ 이 빛으로 감옥을 짤래요 쓰러진 당신 위에 은빛감옥 을 덮을래요/ 나는 울어줄 손이 없으니/ 당신의 감옥으로 이감 가듯 온몸의 감옥을 접붙 일래요 -<잠자리, 천수관음에게 손을 주다 우는> 부분

비가 내린 후에 쓰러진 존재들의 아픈 상처의 냄새가 오래 지속되고 있는 풍경이다. 그 풍경 위를 잠자리 한 마리가 떠돈다. 시의 제목을 보면 화자는 분명 잠자리이다. ‘뾰족한 것들 위에서 악착같이 손 내밀래요/ 접붙이듯 날개를 납작 내려놓을래요’라는 구절이나 ‘은빛 감옥’을 ‘날개’로 해석한다면 잠자리가 틀림없다. 사실, 잠자리는 세상의 비와는 전혀 무관하다. 그런데 그 잠자리가 세상을 슬퍼하고 아파한다. 자신을 보호하던 그 무엇인가가 비로 인해 사라지고 “쓰러진 것들”을 아파하는 것이다. 그래서 잠자리의 ‘상처-아픔’은 잠자리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많은 존재들에 대한 것이 된다. 여기에 제목의 ‘천수관음’은 잠자리의 눈이 지닌 생물학적인 특성에서 천수관음이라는 이미지가 연상된다. 손 내밀고, 몸으로 덮고, 접붙이는 구체적인 육체의 행위 혹은 몸짓이 바로 그것이다. 시 안에서 잠자리는 자신의 날개를 고통에 접붙이는 데 쓰며, 시 밖에서는 자신의 날개 곧 손을 천수관음에게 건네준다. 그렇다면 잠자리의 손 건네기는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구체적 몸짓인 동시에 중생들의 행복을 얻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연대의 몸짓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동체대비의 마음이 문학, 특히 시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김선우는 미적 감성과 사회적 감성의 상호공존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그래서 그는 아픔과 기쁨, 상처를 공감하는 시인이다. 여린듯하면서도 당찬 목소리로 체감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그의 시가 생명의 온기와 애틋한 사랑의 정념으로 충만한 것도 이런 연유이다. 때문에 저마다의 삶의 방식은 달라도 서로에게 기대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지형하는 그의 시적 세계는 구겨져도 아픔을 모르는 착한 혼들을 감싸 안으며 세상의 낮은 곳을 향하여 삶의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연대적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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