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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관과 간신, 언론의 책임
[특별기고-김문갑 박사] 종편3사 재승인에 부쳐
2014년 03월 25일 (화) 08:42:17 김문갑 meastree@naver.com

“전하께서는 훌륭한 자질로 열심히 학문을 익혔으니 군주로서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 근본을 함양하는 공부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말과 행동이 깊은 생각 없이 경솔하고 급하여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숙종, 겨울왕국의 시대

듣기 민망한 이 인신공격성 발언은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가 숙종(肅宗)에게 보낸 상소문에 나온다. 숙종이 누구인가? 그의 묘호(廟號)에 숙(肅) 자를 쓴 것처럼 그의 통치기간은 벌벌 떨며 보내야 했던 시기이다. 《주역(周易)》에서는 겨울을 숙살(肅殺)하는 때라고 했다. 모조리 죽여 버린다는 의미이다. 엄숙하고 스산하게 휘몰아쳤던 겨울왕국이 바로 숙종이 다스리던 때였으니, 세 번에 걸친 환국(換局)이 이를 증명한다. 경신환국(庚申換局)에서는 허적(許積)을 비롯한 남인(南人)이, 기사환국(己巳換局)에서는 송시열(宋時烈)을 영수로 하는 서인(西人)이, 갑술환국(甲戌換局) 때에는 민암(閔黯), 이의징(李義徵) 등의 남인이 사사된다. 이런 살벌한 시기에 서인이었던 송상기가 왕에게 보낸 상소문이다. 상소문은 이어진다.

“비록 전하께서 스스로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얽매이지 않았다.’고 하시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십니다. 또한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여기며 고집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신하들이 탄식하며 근심하는 바입니다.”

공정성을 상실한 채 일방으로 치우쳤다는 비판인데, 이런 비판을 받은 숙종은 정작 송상기를 무척이나 아꼈다. 그리하여 숙종 재위기간동안 송상기는 일곱 번이나 이조판서에 임명된다.

목숨걸고 왕에게 직간

일찍부터 전제군주제가 발달한 동양에선 왕권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간관(諫官)제도가 발달하였다. 조선은 역대 그 어떤 왕조보다도 간관제도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삼사(三司)는 목숨을 내걸고 왕에게 직간하여야만 하는 곳으로, 이 삼사의 언관(言官)을 조선의 선비들은 가장 명예로운 자리로 여겼다.

정관(貞觀)의 성세(盛世)를 이룬 당태종 이세민에게는 명재상 위징(魏徵)이 있었다. 태종은 위징을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앉히며 쓴소리를 당부했고, 위징 또한 충신(忠臣)이 아닌 양신(良臣)이 되겠다며 직언을 망설이지 않았다. 위징이 죽자 태종은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득실을 알 수 있는데, 이제 위징이 없으니 나는 거울 하나를 잃었다.”라고 한다. 간관은 천하의 거울이다. 거울이 뒤틀리거나 가려지만 천하가 위태로워짐을 당태종은 진즉에 알았던 것이다.

민주국가에는 언관이 없다. 왜냐하면 언론이 그 일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언론을 제4부라고 한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잇는 네 번째 부처라는 말인데, 이 말은 언론에 그만큼의 권력이 주어져 있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그만큼의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다.

종편 3사의 재승인

종편 3사가 모두 재승인되었다. 종편들이 막말과 빈말로 얼룩져 있음을 국민 대다수는 알고 있는데, 방통위만 모르나보다. 권력자를 미화하고, 권력비판자를 조롱하는 언론이라면 이미 언론이 아니다. 언론에 주어진 권력은 비판과 직언을 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권력자를 향한 용비어천가나 부른다면 이는 간관(諫官)이 아니라 간신(奸臣)이다.

조상(曹商)이란 사람이 있었다. 왕이 그를 좋아하여 수레 백승을 하사하였다. 조상은 장자에게 자신은 이처럼 수레를 얻는 일에 능하다고 자랑하며 가난한 장자를 비웃었다. 장자가 말하였다.

“진(秦)나라 왕이 병이 들었소. 종기를 째고 고름을 짜주는 자에겐 수레 한 채를 주고 입으로 빠는 자에게는 다섯 채를 주었소. 아래로 내려갈수록 수레가 많아졌으니 당신은 치질을 빤 거요?”

권력에 아부하는 자들은 권력자의 치질에 밴 피고름도 맛있게 여긴다. 핥고 빨 기회만 엿보는 자들로 넘쳐날수록 세상은 어지러워진다. 종편 삼사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언론인들과 치질의 피고름 빠는 사람과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권력을 향해 쓴소리 할 줄 모르는 언론은 더 이상 언론이 아니다. 간관인지 간신인지 모호해지는 요즘이다.

<철학박사·충남대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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