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반열반경》의 중요 주제는 여래열반의 진의를 밝히는데 있는데 이를 드러내는 가장 유용하고 중요한 수단이 문자이다. 이 문자품은 여래의 참된 성품과 해탈의 경지를 나타내는 문자의 역할에 대하여 문답을 통하여 밝히고 있어서 우리의 문자(명자)에 대한 이해를 재고하게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문자에 대해서 앞의 여래성품에서는 글자 속의 열반의 이치를 밝혔다면, 이 품에서는 열반의 이치에서 본 명자(名字)의 의의를 밝히고 있다. 곧 여래성품에서는 상(常) 무상(無常), 락(樂) 고(苦), 아(我) 무아(無我), 정(淨) 부정(不淨)을 통하여 사덕(四德)의 명자(名字)에 들어 있는 열반의 이치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품에서는 열반의 진리에서 명자는 어떤 의의가 있는지 밝히고 있다.

세상의 명자는 크게 두 가지로 말한다. 하나는 반자(半字)이고 하나는 만자(滿字)이다. 반자는 완전히 뜻을 갖추지 못한 자·모음의 상태를 말하고[예를 들면, ㄱ ㄴ 또는 a b c] 만자는 완전히 뜻을 갖춘 단어 구절을 말한다. 그래서 가르침에도 반자교와 만자교가 있다고 한다. 여기서 반자교는 소승교를 가리키며, 만자교는 대승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반자교의 경우 경장형식으로는 구부경[게야(geya, 重誦 應誦)·베야카라나(Veyākaraṇa, 記說 분별경)·가타(gāthā, 偈誦)·우다나(udāna, 自說 감흥어)·이티붓타카(Itivuttaka伊帝目多伽, 如是語 本事 )·자타카(Jātaka, 本生談)·비불략(Veddala, 方廣)·아부타달마(阿浮陀達摩, Abbhudadamma, 未曾有經)]를 포함하고, 만자교는 십이부경[구부경에 니다나(Nidāna, 因緣)·아바다나(Avadāna, 譬喩)·優婆提舍(Upadesa, 論議)를 추가]까지로 하여 대승교로 부르고 있다. 또한 학자에 따라서는 세간법은 반자이고, 불성은 만자라고도 한다. 범본에서는 실제 반자 만자의 말이 없고, 다만 일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반자, 성취됨을 만자라고도 한다.

문자품에서는 먼저 글자의 역할을 반자 만자를 통하여 설하고, 실제 문자의 의의를 소개하며,우리가 《대반열반경》을 통하여 문자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를 밝힌다.

먼저 글자의 역할에 대하여 여래가 반자와 만자를 설하여 중생을 제도하였다고 한다. 곧 세상에 있는 갖가지 언론과 주술과 글자 중에는 불교의 말씀도 있고 외도의 것이라고도 하지만, 실은 다 여래가 반자를 근본으로 삼아 모든 언론과 주술과 5음의 실제법을 기록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글자를 이루지 못한 반자나 글자를 이룬 만자를 명자공덕의 입장에서 오로지 출세간 상상의 만자로 해석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옛설의 무상(無常)은 반자이고, 상(常)이 만자라 할 수 있으며, 또는 옛설에서는 무상이 만자라고 할 수 없었는데 지금의 가르침에서는 상과 무상을 갖추어 설하므로 만자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열반불성의 체는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며 상과 무상을 구족하고 있으니 그러므로 만자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실제의 반자와 만자의 명자 의의에 대해서 밝힌다. 지금 이 품은 일체 글자를 여니 다 만자라고 한다. 반자가 모든 경서와 기론(記論)과 문장의 근본이 되고, 만자는 모든 선법을 말하는 근본이고 할 수 있다. 또 모든 경서와 기론은 다 반자를 근본으로 삼지만, 여래와 바른 해탈은 여기에 들지 않는 만자의 경지라고 한다. 그리고 나아가 여래는 법에 걸리지도 집착하지도 않는 참된 해탈을 얻었으므로 글자의 참된 뜻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경에서는 ‘무엇을 글자의 뜻을 안다고 하는가. 여래가 출세하시어 반자를 없앨 줄을 안다면 이는 글자의 뜻을 안다고 할 것이요 만일 반자를 따르는 이는 여래의 성품을 모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경에서는 아(a)·이(i)·우(u)·에(e)·오(o)의 5음을 비롯한 14자 모음과 자음 33자 그밖에 3자를 들어서 여태까지는 반자로 여겼던 글자가 여래의 뜻에 의해서 만자로서의 의의가 있음을 들어내고 있다. 오음을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짧은 아(阿, a)는 파괴하지 못함이요 삼보니 마치 금강과 같다. 또 아는 흐르지 않음이요 흐르지 않음은 여래니 여래의 9구멍에는 흐를 것이 없으므로 흐르지 않으며 또 9구멍이 없으므로 흐르지 않는다. 흐르지 않는 것은 항상하고 항상함은 곧 여래니 여래는 짓는 것이 없어 흐르지 않는다. 또 아는 공덕이라 하니 공덕은 곧 삼보요 그러므로 아라 한다.

다음에 긴 아(阿, ā)는 이름이 아사리(阿閣梨)니 아사리란 뜻은 무엇인가. 세간에서 성인이라 하니, 어째서 성인이라 하는가. 성인은 집착이 없음이니, 욕심이 없어 만족한 줄을 알므로 청정이라고도 한다. 3유(有)에서 흐르는 나고 죽는 바다에서 중생들을 제도하므로 성인이라 한다.

…오(烏. o)는 번뇌란 뜻이니, 번뇌는 루(漏)라고 하거니와, 여래는 모든 번뇌를 영원히 끓었으므로 오(0)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오음의 뜻을 밝힌 것은 이론 주술의 일체 문자가 다 불설이며 외도의 설이 아요, 부처가 설한 것은 내도(內道) 정법이니 이 정법이 만자가 된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글자의 근본이 되는 것이 반자이지만, 이 모든 글자는 여래의 출세로 인하여 진리를 담는 단어 구절로서 그 역할을 하였다. 때문에 때로는 “반자는 모든 경서 논서 문장의 근본이다.”라고 하면서, 반자는 번뇌 언설의 근본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만자는 선법의 근본이고 일체선법 언론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단순히 오음으로 여겼던 문자도 여래의 진의를 담아내는 진리의 표상임이 드러나 이미 만자였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우리가 《반열반경》을 통하여 문자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를 밝힌다.

그런데 《열반경》에 오면 여래의 성품과 해탈의 진의는 반자를 여의고 나아가 문자마저 여의어야 한다. 곧 만자를 쫒아서 일체법에 걸림이 없고 집착함이 없으면 이미 반자가 없고, 또한 만자도 없다고 한다. 때문에 글자는 글자가 아니니 글자가 없는 것이 만자가 된다. 여래의 불성은 문자를 빌리지 않고 청정하니 불성은 스스로 청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모든 문자가 다 불성이라 하며, 나아가 불성은 문자가 아니고 문자가 아닌 것도 아니라고 한다. 이와 같이 문자이고 문자가 아니므로 만자라고 부른다.

결국 《열반경》의 문자의 진의는 하나하나가 다 문자이고 문자가 없으며, 하나하나의 문자를 열면 다 불성이고, 법성과 법계 역시 이와 같아 일체문자를 포함한다. 한 문자가 일체문자임을 얻어야 한 문자가 일체문자를 갖추게 되니 반자의 변두리를 떠나 만자를 이루게 된다고 한다. 경전에서는 이와 같이 될 때, 여래의 항상하고 무상함, 늘 있고 있지 않음, 법보와 승보와 계율과 경전, 마군의 말과 부처님 말을 분별할 줄 알게 되고 반자를 여의고 만자를 알게 된다고 한다.

-이기운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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