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곧 중생의 마음이다.-대승기신론

1. 논에다 밀을 심으면 빵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을까?

중학교 때 한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서쪽 로마가 아니라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더라면 우리가 지금의 서양처럼 잘 살게 되었을 것이라고.!? ‘근대화=서구화’라는 등식이 별다른 의심 없이 자리하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허망하게도요.

과연 기독교가 처음부터 동방으로 선교에 나섰다면 동양이 서양처럼 되었을까요? 분명한 사실은 기독교는 처음부터 동방으로의 선교에 나섰습니다. 《노득개교시말기(路得改敎始末記)》에는 서기 34년에 바빌론이 유태인을 학살하자 유태인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마원(馬援)이 교지(交趾, 베트남 북부지방)를 정벌할 때 서로 만나 천주교도도 함께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노득(路得)은 ‘루터’의 음역입니다. 마원은 중국 후한(後漢)의 장군으로 교지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신식후(新息侯)에 봉해진 인물입니다. 서기 34년이면 예수가 죽고 불과 5년밖에 되지 않은 때입니다.

또 《연경개교략(燕京開敎略)》에 의하면, 서기 65년에 로마 황제 네로가 천주교도들을 학살하고 69년 예루살렘이 패망하자 천주교도들은 재난을 피해 동으로 왔다고 합니다. 기타 실증된 건 아니지만 몇몇 자료에 기독교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중국에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중국종교의 역사,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참고)

당나라 태종연간에 이르면 가톨릭의 교리논쟁에서 패배한 네스토리우스파가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들어와 융성합니다. 경교는 당시 당나라 황제의 적극적인 비호 하에 크게 교세를 떨치다가 무종(武宗)연간에 벌어진 훼불사건과 함께 배척되면서 중국에서 사라집니다.

한편 불교 또한 일찍부터 유럽 쪽으로 전파에 나섭니다. 불교가 서쪽으로 가다가 그리스문명과 만나 탄생한 것이 바로 간다라 불상입니다. 간다라 미술(Gandhara Art)은 이미 BC 2세기에 싹을 틔웁니다. 하지만 불교는 더 이상 서진하지 못합니다.

당무종에 의한 배척은 불교나 경교나 같았는데, 불교는 다시 일어나 중국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비하여, 경교는 왜 그냥 사라지고 만 것일까요? 그리고 불교는 왜 유럽 깊숙이까지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체질에 맞지 않으면 소화를 시키지 못합니다. 종교나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름이 무덥고 습기 찬 동양에는 벼가 잘 자라고, 더워도 건조한 유럽에는 밀농사가 제격입니다. 그렇듯 기독교는 본래 서양의 토양에는 잘 맞지만 동양에는 맞지 않았고, 불교는 동양에는 잘 맞았지만 서양에서는 뿌리 내리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같은 세계화 시대에는 지리적 경계가 무의미해져서 유럽에도 불교신자가, 중국에도 기독교신자가 많아졌지만 근대 이전은 달랐습니다. 따라서 그 토양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잘 살펴보지 않으면, 중학교 때의 선생님처럼 물 가득한 논에다 밀을 심고서 배불리 빵을 먹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2. 중국문화의 원동력,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

중국문화는 황하강가의 작은 부족에서 시작합니다. 하화(夏華)족이 중국인들의 시조입니다.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말씀이 오히려 중국문화에 어울릴 정도로, 작았던 하화족이 어떻게 이처럼 거대한 문명을 세울 수 있었을까요? 비밀은 포용력에 있습니다. 이들은 좋은 것이라면 내외, 고하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중국문화의 수용능력을 보면, 그 탄력성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중국의 역대 왕조 중에 가장 폐쇄적이었던 왕조가 명(明)나라입니다. 남방에서 탄생한 유일한 왕조답게 명나라는 북방왕조의 개방성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런 명나라의 신종(神宗)황제 만력제(萬曆帝)는 천주교 예수회 소속 선교사 마테오리치에게 선교에 필요한 모든 편의를 제공합니다. 마테오리치가 북경에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할 때가 1600년인데, 이때 유럽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간의 이른바 종교전쟁으로 죽고 죽이는 피의 제전이 한창이었습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사이에서 붙은 불은 프랑스를 거쳐 독일로까지 번지며 거의 100여 년 동안 유럽을 화염에 휩싸이게 하였던 것이지요.

같은 하느님, 같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신・구교 간의 전쟁은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곳에 동양의 한 스님이 나타나서 내가 절을 짓고 부처님의 말씀을 전파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다면 그 스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중국에는 전 세계 거의 모든 종교와 사상이 유입됩니다. 공자가 설파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다름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합니다. 나와는 다른 종교, 다른 사상, 다른 문화에 대한 거부감 없이 전 세계의 주요 문화와 사상을 흡수하였던 것입니다. 당연히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그리고 불교든 중국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은 적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살상한 적도 없습니다.

3. 중국에서 기독교는 왜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나?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귀신 섬기는 법을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사람 섬기는 줄도 모르면서 어찌 귀신 섬기는 걸 알려 하느냐?”였습니다. 또 사후세계를 묻자 “생이 뭔지도 무르는데 어찌 죽음 이후를 알려고 하느냐?”라고 대답합니다.

중국의 이른바 3대 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 중에 오직 유교만이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서 신(神)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주지하다시피 불교에서 이런 신은 허망한 망념이고, 도교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직 유교만이 이런 신을 긍정하기에 마테오리치는 유교에 맞춰 《천주실의》를 썼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교조차도 신보다는 인간이 우선입니다. 사후세계가 인간의 사고에 더 이상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곳이라면 기독교는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경교나 마테오리치가 당시 황제의 비호 아래 잠시 세력을 키우지만, 이는 일시적인 기세에 불과합니다. 중국문화의 인문주의(人文主義)는 절대적 초월신이나 현세를 지배하는 내세와는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비록 수용된다 하더라도 현세적 인간을 위해 변형되거나 재구성됩니다. 마테오리치가 제사를 용인했던 것처럼 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테오리치 사후 로마 가톨릭은 제사를 금지시키고, 중국 내의 천주교는 쇠퇴합니다.

4. 중국 불교는 왜 소승이 아닌 대승인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말이 있습니다. 안으로는 도덕적 인격을 완성하고 밖으로 세계평화를 이룬다는 의미인데, 《대학》에 나오는 말이지요. 《대학》은 옛날 중국 사회를 이끌고 갈 사람들이 반드시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교재 중의 하나입니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공부한 중국 엘리트들의 의식에는 언제나 평천하(平天下)라는 관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춘추시대 제자백가들도 대부분이 천하태평을 꿈꾸었던 사람들입니다. 공자와 맹자는 말할 것도 없고, 묵자나 한비자 모두 태평천하를 위해 불철주야 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양주(楊朱)처럼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가 이롭다고 해도 하지 않겠다”는 극단적 위아(爲我)주의자의 출현 또한 자연스런 반동으로 이해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천하경영이 중국인의 기본적인 사유임을 이해하여야 노자와 장자의 너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주장이 비로소 온전한 의미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세계에 불교가 들어갔다면 그건 소승이 아닌 대승이어야 할 것입니다. 소승불교는 중국문화를 소화시키지 못합니다. 대승이라야 비로소 유교나 도교와 대화가 됩니다. 천하를 한 사람의 소유물로 여기지 않으며, 외롭고 불쌍한 사람이 없는 세상, 그리하여 누구라도 문 활짝 열고 편안히 잠 잘 수 있는 세상, 이른바 대동(大同)세계가 중국인들이 꿈꾸었던 세계이고, 이런 세계라야 대승불교가 비로소 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법(法)은 곧 중생의 마음이다

만물은 모두 내게 갖추어져 있다.

맹자가 한 말입니다. 맹자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니 어떻게 저 소나무와 대나무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이야?”라고 의문을 품는다면 그는 중국문화를 이해 못하는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맹자의 이 말을 아주 쉽게 받아들입니다.

법은 곧 중생의 마음이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하 기신론으로 약칭―의 이 말은 맹자의 말과 똑같은 논리입니다. 중국인들은 이 말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래 세계는 곧 마음이야. 마음이 보는 대로 보이는 거지.”라고 바로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인도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왜 유식학과 여래장사상의 등장 이후에 불교가 인도에서는 더 이상의 진전을 이루지 못했을까요? 저는 인도인들의 사유에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의미를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구조가 없었던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인도의 전통 브라만사상은 영원불변의 실체인 브라흐마나의 존재성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들이 범아일여(梵我一如)를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 객관적 실재성은 결코 부정되지 않습니다. 이런 인도인들에게 아뢰야식연기설의 주관인식론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름의 보편적 실재성을 띠게 되는 여래장사상은 그들 고유의 종교 사상으로 흡수되고만 것은 아닐까요.

인도인들과 매우 비슷하게 사유하는 사람들이 그리스 사람들입니다. 플라톤에 의한다면 눈에 보이는 이 세계의 배후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이데아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이데아를 아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기독교의 교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철학적 기반이 되어 영원불변한 절대신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사유에는 유식무경이란 말이 쉽게 이해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다릅니다.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본성을 알고 본성을 아는 것이 곧 하늘을 아는 것이다.

맹자의 말입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교에서조차 하느님은 마음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설혹 저 높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라고 할지라도, 그 하느님은 나의 마음으로만 이해되는 하느님입니다. 철저하게 마음으로 돌아가 이 세계의 일체 현상을 이해하려는 태도는 실로 중국철학과 종교문화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6. 생명 없는 논리, 생명 있는 논리

주지하다시피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게 측은지심(惻隱之心)입니다. 갓난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면 누구나 다 불쌍한 마음이 들어 구하고 본다는 거지요. 하지만 같은 논리라면 인간의 이기심은 성악설의 근거가 됩니다. 사실 맹자의 논리는 전혀 논리적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강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본의 한 불교학자는 중국인은 생명없는 질서보다는 생명있는 무질서를 더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중국인들이 생명을 중시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맞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중국인들이 무질서하거나 비논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단지 서양의 논리와는 많이 다른 것뿐입니다.

《노자》에 보면 ‘형상이 없는 형상(無狀之狀)’, ‘하지 않는 함(爲無爲)’등의 말들이 툭툭 튀어 나옵니다. 서양의 논리로 보면 매우 비논리적이며 궤변입니다. 이런 궤변을 장자는 조궤(弔詭)라고 하였습니다. 이상한 이야기라는 뜻이지요. 바로 역설(paradox)입니다. 역설에는 통쾌함이 있습니다. 파딱파딱 뛰는 생명이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이런 생명력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중국문화 속의 역설과 모순어법은 공허한 말장난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을 일깨우는 논리입니다. 대승불교는 이제 활짝 꽃을 피울 기름진 토양을 발견한 것입니다.

7. 왜 꼭 필연이어야 하는가? 우연이면 안 되나?

삼계(三界)는 거짓이요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다.…… 마음이 생하면 가지가지 법이 생하고 마음이 멸하면 가지가지 법이 사라진다.

이 세계가 온통 마음이 짓는 것이라는 말은 바로 이해하겠습니다. 여기에서 “도대체 어떻게 마음으로부터 가지가지 법이 생한다는 말이냐?”라고 재차 묻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음과 법 사이의 인과관계를 거듭 추구하며 그 시원을 밝히라고 한다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기신론》에 의한다면 마음이 빚어내는 일체의 상념[念]은 모두 망념입니다. 이 망념이 들쭉날쭉 참치부제(參差不齊)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지요. 가지가지 법은 모두 망념이 만들어내는 것이고, 망념은 무명(無明)에 의해 발생합니다. 즉 법의 원인은 망념이고 망념의 원인은 무명입니다. 그렇다면 무명의 원인은 무엇이고 어떤 계기로 망념이 생기는가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요?

마음에 상응함 없이 홀연히 망념이 일어난다. 이를 이름 하여 무명이라고 한다.

그냥 생기는 것입니다. 마치 평지에 풍파가 일 듯, 계곡에서 문득 구름이 피어나듯, 그렇게 홀연 일어난다고 합니다. 《기신론》에서는 아예 ‘마음에 일어나는 그 시초는 알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합니다. 《주역》에서도 ‘어떻게 태극으로부터 음양이 생하는가?’라는 질문에 ‘부득이해서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서양이나 인도 사람들은 이런 식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시원을 파고듭니다. 인과관계가 분명할 때까지 그들은 질문과 대답을 계속합니다. 결국 그들은 궁극적 실체나 초월적 절대자에 도달하고 나서야 분석을 멈출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필연적 인과사슬의 시초에 전지전능한 신이나, 영원불변의 브라흐마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는 순간, 우리는 결국 또 하나의 독단을 만들어내고, 그 독단에 스스로를 묶게 됩니다. 그래서 붓다는 이런 식의 분석적 질문에 대해 무기(無記), 즉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저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네가 지금 독단이란 독화살을 맞았는데, 화살을 뽑을 생각은 안 하고, 이 화살이 어디에서 왔으며 왜 나를 쏘았나를 생각하고 있으면 어찌 되겠느냐고 오히려 반문하는 것입니다. 이런 무기를 인도나 서양의 사상가들은 수용하지 못하지만, 중국인들은 아주 잘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논리보다는 생명을 더 중시하니까요. 그리하여 필연적 인과율을 좇음으로써 생명이 다치기 보다는 우연을 따라 자유로운 생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8. 불교의 재구성, 대승기신론

▲ 신라의 원효가 쓴 《대승기신론소》.
중국은 대승불자들에겐 마음껏 사유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처음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고, 중국 속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그들은 도교에 기탁합니다. 이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하지요. 이때까지는 인도로부터 들어오는 불교를 그냥 수용하는 정도였다면, 어느 시점에 이르게 되면 중국인에 의해 주체적으로 불교를 추구하게 됩니다. 이런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裝)입니다. 현장은 스스로 인도로 건너가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와서는 번역에 매진합니다. 바로 중국인의 시각에서 중국인의 사유에 맞게 불교를 재해석하였던 것입니다. 천태・화엄에 의한 교상판석(敎相判釋)도 같은 맥락에서 수행되는 것입니다.

《기신론》은 인도불교가 중국에서 다시 해석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종합적으로 보여줍니다. 《기신론》은 산스크리트어 원본이 없습니다. 저자인 마명[馬鳴, 아슈바고샤(Aśvaghoṣa)] 또한 확실치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가설과 주장이 나옵니다만 《기신론》에 중국적인 사유가 농후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아울러 주요 개념이나 사상은 여전히 인도 대승불교에서 온 것임을 이해한다면 대략 얼마간의 해명이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기신론》은 불교가 중국으로 동래(東來)하여 중국적으로 개화하기 시작하였음을 알리는 선언문과도 같다는 생각입니다.

-김문갑(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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