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을 여행할 때 부자들의 휴양지를 여행한 적 있습니다. 휴양지에 있는 대형 쇼핑몰에서 피자를 먹고 있었습니다. 우리 테이블 바로 옆에는 이란 소년 둘이서 피자를 먹고 있더군요. 소년의 테이블에는 교과서로 보이는 책이 있었어요. 우리 집 애들 또래로 보이는 애들한테 호기심이 생겨서 관심을 좀 보였지요. 그런데 이 소년들의 반응이 놀라웠습니다. 책을 가리키면서 무슨 책이냐고 물어도 못 들은 척 하고 우리 쪽을 쳐다보지도 않더군요. 경계하는 태도가 확연했고, 관심이 귀찮다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소년들뿐만 아니라 그곳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게 냉랭한 스타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이란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이란인들을 만났습니다. 무슬림도 만났고,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람도 만났고, 대도시 사람도 만났고, 시골 사람도 만났으며, 파키스탄에서 온 노동자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는 별로 차이점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믿던 어디에 살던 그들 대부분은 이방인에게 관심이 많고, 친절했으며 손님을 왕처럼 대접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자들은 사뭇 달랐습니다. 이들은 무관심했고, 이방인을 경계했습니다.

돈을 좀 더 가진 것뿐인데 이렇게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는 게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것보다도 부자냐, 아니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란 영화 <하얀 풍선>(1995)을 보면서 이 의문이 해결됐습니다. ‘금붕어’라는 욕망을 갖고 있는 일곱 살짜리 아이를 통해 욕망과 이기심 그리고 자비심과 친절의 관계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이기심과 욕망은 한 부류이고, 또한 자비심과 봉사, 친절 이런 게 다른 부류인데 둘 사이엔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욕망이라는 개념은 자아를 강화시키고, ‘나’라는 개념이 강화될수록 타인에 대한 자비심은 발붙일 틈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작은 영화는 이러한 섬세한 메커니즘을 단순한 구성을 통해 효과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얀 풍선’은 기존 이란 영화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어린 애가 주인공이고, 비전문 배우를 등장시킴으로써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허물면서 네오리얼리즘을 지향하고, 단순한 에피소드를 통해 오늘을 사는 이란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이 영화로 칸 영화제 신인 감독상과 동경영화제 금상을 수상하면서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 감독으로 성장했습니다, 또한 이 영화는 이란 영화로는 드물게 미국에서 흥행에 성공했으며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초청됐던 작품입니다.

‘하얀풍선’이라는 영화에는 몇 개의 상징이 숨어있는데 영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장치입니다. 영화의 중요한 소재인 금붕어와 하얀 풍선 그리고 새해가 의미하는 바를 해석해봄으로써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다가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는 새해 1시간 28분 30초 전을 카운트다운으로 해서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새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소녀는 새해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예쁘고 통통한 금붕어를 사고 싶어 하지만 영화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새해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날과 다름없이 자기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이고, 다른 사람 호주머니를 노리고,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새해라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삶을 의미하고, 사람들은 이 삶을 허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카운트 다운하듯 영화가 진행된 것도 이런 속내 때문이지 싶습니다. 한정된 삶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가 주요한 관건인데 다들 그리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할까요? 영화는 욕망 때문이라는 대답을 합니다. 영화에서 욕망은 ‘금붕어’라는 메타포로 표현됩니다.

이란에는 새해가 되면 금붕어와 거울을 사는 풍습이 있는데 소녀는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갔다가 하얀 지느러미가 춤추듯이 하늘거리는 예쁜 금붕어를 보고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소녀는 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엄마를 조릅니다. 그러나 엄마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마당 연못에도 금붕어가 있는데 뭐 하러 돈을 낭비하느냐는 것이지요. 가난한 엄마로서는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욕망을 갖게 된 소녀는 엄마 사정 같은 건 봐줄 수가 없었습니다. 오빠까지 동원해서 엄마한테서 돈을 뜯어냅니다.

돈을 들고 시장으로 달려가다가 뱀 쇼를 하는 노인들을 만납니다. 스스로를 탁발승이라고 하는 이들은 소녀에게서 돈을 빼앗듯이 가져가면서 “이 돈으로 우리 가난한 탁발승들은 저녁을 먹을 수 있게 됐다”면서 자비스러운 소녀라고 치켜세웁니다. 소녀에게 욕망이 없었다면 하루 종일 굶었다고 징징대는 노인들에게 돈을 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금붕어를 사야 한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노인들의 딱한 사정 같은 건 봐줄 수가 없었습니다. 돈을 돌려달라고 울면서 얘기했고, 그 중 한 노인이 소녀를 딱하게 여겨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금붕어 가게에 도착했습니다. 200토만짜리 금붕어를 100토만에 사려고 주인과 흥정을 벌이다가 주인이 먼저 돈부터 보여 달라고 하자 소녀는 비로소 돈이 없어진 걸 알게 됩니다. 주인은 소녀의 절망감 같은 건 아랑곳없이 돈을 가져와야 금붕어를 줄 수 있다면서 소녀를 좇아내고, 어떤 마음씨 착한 아주머니가 소녀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지나온 곳을 되짚어가면서 돈을 찾아보자고 합니다.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돈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돈은 어느 집 지하로 떨어졌는데 그 집은 문이 잠겨있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동생을 찾으러 나온 오빠의 도움을 받아 돈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오빠가 주인을 찾아 뛰어다니는 동안 동생은 누가 돈을 훔쳐 갈까봐 지키고 앉았는데 휴가 나왔다가 복귀하던 군인이 소녀 주위를 어슬렁거렸습니다. 소녀는 그 군인을 경계했습니다. 돈을 훔쳐 달아날 그런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군인이 말을 시켜도 잘 대답도 안 하고, 사탕을 주어도 받아먹지도 않았습니다. 군인은 자기 여동생 얘기를 한참동안 하다가 자신을 태우러 온 군용차를 타고 떠났습니다. 군인은 사실 그의 말처럼 여동생이 생각나서 소녀에게 말을 시켰던 것이지 돈을 탐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돈을 지켜야 했던 소녀는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고 경계하는 눈초리로 바라봤습니다. 이게 바로 금붕어라는 욕망과 돈이라는 자본이 일으킨 정신의 황폐화였습니다. 휴양지에서 느꼈던 부자들의 무관심이나 경계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사실 나도 군인을 의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영화는 이때까지 소녀의 시점으로 진행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객들도 소녀와 마찬가지로 그 500토만을 움켜잡은 채 혹시나 잃어버리지 않을까 안절부절했고,, 잠깐이나마 소녀 돈을 가져갔던 뱀장수 노인을 비난했고, 또 돈을 안 찾아주는 양복점 주인을 매정하다고 욕하고, 심지어 소녀 주변을 기웃거리는 군인을 불한당 취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갑자기 시점을 이동시켰습니다. 시점이 소녀에게서 아프가니스탄 소년에게로 옮겨가면서 소녀를 객관적으로 보게 하는 장치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열렬하게 지지했던 소녀는 과연 어떤 애일까요?

기다란 막대기로 돈을 끌어올리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남매는 막대기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마침 막대기에 하얀 풍선을 매달아서 팔러 다니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소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소년은 남매의 사정을 듣고는 막대기를 흔쾌히 빌려줍니다. 그런데 막대기만 있다고 돈이 따라 올라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껌이 필요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소년은 뛰어가서 껌도 사와서 도와주었습니다. 이 소년의 도움으로 남매는 마침내 돈을 되찾게 되고 금붕어도 사게 됐습니다.

영화는 해피 엔당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묘한 쓸쓸함이 남았습니다. 남매가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 자리에 혼자 남겨진 아프가니스탄 소년에게로 시점이 옮겨가자 소녀가 매정하고 이기적으로 보였습니다. 자신을 성의껏 도와준 사람에게 인사 한 마디 없이 ‘금붕어’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은 욕망에 치중한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이었고, 다른 중요한 가치를 외면한 모습이었습니다.

소녀가 돈을 찾기 위해서 되짚어갔던 것처럼 객관적인 시선으로 소녀를 봤을 때 소녀는 이기적이었습니다. 금붕어라는 욕망 때문에 엄마를 괴롭혔고, 뱀 쇼를 하던 노인들에게는 자비심을 갖지 못했으며, 군인 아저씨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모습은 키쉬섬에서 만났던 소년들의 모습처럼 불쾌했습니다. 그냥 순수한 아이일 수도 있는 소녀가 욕망을 갖게 되면서 어른들이나 보일 법한 이런 모습을 보였던 것인데 , 소녀의 시점이었을 때는 욕망에 눈이 가려져 관객은 이런 모습을 캐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영화에서 돈이라는 것은 금붕어를 사기 위한 수단이자 또한 욕망을 실현시킬 방법입니다. 그러니 역시 욕망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녀의 욕망은 사람들을 경계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됐고, 다른 사람들을 믿을 수가 없으며 혼자를 고립시켰습니다. 그런데 욕망은 여기서 끝나지가 않았습니다. 자비심의 씨를 마르게 하는 게 또한 욕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욕망만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금붕어’라는 욕망의 대척점에 위치한 ‘하얀풍선’이라는 상징 속에 숨어있는 자비심까지 보여주었습니다. 돈을 잃고 울고 있는 소녀를 도와 주었던 아주머니나 풍선을 팔러 다니는 아프간 소년이 이런 종류의 사람들인데 그들은 자신의 이익 보다는 타인의 고통을 먼저 보았으며 상대방을 도와주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소녀의 시점이었을 때는 관객들은 욕망의 이기적인 속성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자비심을 갖고 있는 아프간 소년의 시점으로 옮겨가자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영화 말미에서 보인 이 반전효과가 꽤 오래 여운으로 남았습니다.

불교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 욕망인데, 이 욕망의 문제점을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로 이렇게 설득력 있게 들려주는 감독의 재능에 감탄했습니다.

 -김은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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