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할 권리도 없이 우격다짐으로 주어지기는 했지만, 근대는 한때 박복한 조선 땅의 미개와 혼몽을 깨우는 메시지였다. 신문물에 발을 들여 놓으면 들여놓을수록, 예전에 태어나 쫓겨나온 세상이 박복했다는 확신도 들었다. 하지만 등 떠밀려 들어선 근대는 도심의 바람처럼 계통 없이 마구 몰려왔고, 선(禪)은 노비가 수태한 자식마냥 안쓰러웠다. 근대라는 역사의 문맥 속에서 선은 도리 없이 타자였다.”

박재현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새로 펴낸 《한국 근대 불교의 타자들》에서 근대 한국 간화선의 중흥조 경허 스님과 그의 제자 만공,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한암, 그리고 만해 한용운 스님을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타자(他者)로 보았다.

박교수는 “불교철학의 주요연구 대상은 이른바 큰스님이나 대선사였다. 이 범주에 포함되는 인물은 대부분 이판비구승이었다. 특히 근대에 들어 대처(취처) 여부가 사문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는데, 주류가 아닌 타자들 중에 분명히 근대불교계의 한축을 담당했던 이들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근대 불교사의 변방에 겨우 기록되었거나 기록조차도 되지 못한 이들은 말의 타자들이다. 하지만 말의 소외가 곧 삶의 소외는 아닐 것이어서, 그들은 그저 맹렬히 살아내는 것으로 제 삶을 복되게 했다. 그들의 자취를 기록하지 못했거나 못 본 체한 이들 역시 가엾기는 매일반이지만, 선이 말을 관통하여 자신을 완성하는 길이라면, 말하여진 자나 말하여지지 못한 자 모두 저마다의 삶은 온전하여 자족했을 것이다.” 라고 머리말에 썼다.

박 교수는 한국의 근대가 격동기라는 특성상 종교의 사회적 역할 및 책임과 관련된 문제를 살펴보기에 적절하며, 간화선의 지향점이 선명히 노출되는 시기 역시 근대”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또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광복을 거치면서 불교계의 선사들은 ‘간화선’을 통해 세상 속과 세상 밖을 동시에 가로지르는 길을 모색했다.”고 보았다.

박 교수는 또 불교사상의 본질적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인 출세간(出世間·속세와 관계를 끊음) 중심주의와 불교의 대사회적 관계가 첨예하게 드러났던 때가 근대였고 현대 불교의 방향도 이 시기에 결정됐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한국 근대불교 연구 경향은 정치·사회적 시각을 견지했다. 연구주제 역시 당시 인사들의 정치·사회적 발언과 활동에 초점을 맞췄고, 불교와 결부된 정치·사회적 역할관계에 비중을 두었다.”고 지적하고 근대 불교 연구의 편중성 극복을 촉구했다.
박 교수는 근대 불교에 대한 기존 연구는 ‘큰 스님’이나 ‘대선사’의 행적과 사상을 선양하거나 민족주의에 초점을 맞추면서 근대 불교의 철학적 역할의식이나 성격에 대한 본질적 물음에는 접근하지 못하는 한계를 노출했다고 보았다.

박재현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는 “한국 불교에서 소외됐던 이들의 목소리를 복원해야지 전체를 볼 수 있고 잃어버린 가치를 생각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의 《한국 근대 불교의 타자들》은 2부로 나눠졌다. 1부는 경허·만공·한암·만해 스님등을 통해 ‘선(禪)’이 근대 불교의 문제의식과 가치를 드러내는데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했다. 선을 통한 사회적 역할 의식의 변화 등을 살폈다. 2부는 해방 이후 ‘불교계의 타자’가 된 대처승과 사판승, 그리고 비구니와 재가신자 등을 조명했다.

“불교정화운동 이후 불교계의 주류는 비구 이판승(理判僧 수행승)이었고, 대처승, 사판승, 비구니, 재가신자들은 비주류였다. 타자들과 재가신도들의 비중과 역할이 줄면서 불교는 쇠퇴했다. 또한 수좌들도 좌선 중심의 정적 수행을 답습하고 재가신자와의 연대 및 사회와의 소통을 단절함으로써 사회적 역할이나 책임에 둔감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선불교를 연구해 온 박 교수는 《한국 근대 불교의 타자들》에서 경허, 만공, 한암, 만해를 통해 근대 불교계가 어떤 방식으로 외부 환경변화에 대응하고 내부 수행전통을 정립해 갔는지 살폈다. 박 교수는 아울러 “종교와 사회의 접점을 살펴 동아시아 불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적 책임의식과 역할의식을 집중 고찰”했다. 02)720-8921

박재현/푸른역사/18,000원

서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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