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불성이라 하였고, 이 불성이 중생들에게 갖추어져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중생들은 이 불성을 어떻게 알아내고 개발해야할 것인가.

《열반경》에서는 불성이 선업(善業)을 일으킨다고 밝히고 있다.

경에서는 먼저 불성의 실체에 대해서 밝힌다. 불성은 원래 금강석과 같아서 깨뜨릴 수 없으니 땅 속에 보배가 있는 줄 알고 괭이로 파고들어가 자갈과 돌은 깨뜨려 파낼 수 있으나 금강륜에 다다르면 뚫을 수 없듯이 우리의 불성도 천마나 파순이나 천상이나 아무리 나쁜 악인이라도 이를 깨뜨릴 수 없다. 이 불성을 “참 나”라고도 하고, “오온”이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이는 불성을 알지만 어리석은 자는 불성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마치 어떤 사람은 부처님의 대승의 뜻이 들어있는 방등경전을 감로라고 하지만, 또 다른 사람은 방등경이 독약과 같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감로를 먹고 장수하지만 어떤 이는 감로를 먹고 단명하며, 또한 어떤 이는 독약 먹고도 살지만 어떤 이는 독약 먹고 죽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걸림없는 지혜를 가진 이는 방등경전을 잘 알아 익혀서 감로로 먹지만 어리석은 이는 이를 삭이지 못하고 독약이 되어 해치게 된다는 것이다. 곧 어리석은 이는 불성을 알지 못해 독약이 되고, 성문 연각 대승의 지혜로운 자는 불성을 잘 알아 감로가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불성의 바탕은 삼보(三寶)라고 한다. 우리가 삼보에 귀의하면 그 성품이 곧 불성이요 내 성품에 불성 있는 이치를 안다면 부처님의 비밀법장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삼보에 귀의하여 불법의 이익을 얻고 오는 세상 부처를 이룰 수 있을까. 우리가 불성이 있는 줄 알기 위해서는 삼귀의(三歸依)로부터 시작해야한다는 것이다. 삼귀의는 불보와 법보와 승보에 귀의함이다. 귀의한다는 것은 존경하고 따르는 것이니 우리가 지성으로 부처님과 그 가르침과 승가를 존경하고 따르다보면 불도에 가까워지고 비밀법장에 들어가게 되어 우리가 불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신자라면 모두 삼귀의로부터 출발하고 이런 이들을 우바새 우바이라고 한다.

그런데 진실한 마음으로 삼보를 따르지 않고 부처님의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를 ‘가명 우바새, 우바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어리석은 이들은 이름만 귀의했다고 할 수 있어서 미혹의 그물에 걸리고 생사의 지옥에서 헤매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 있는 이들은 삼귀의 하여 오는 세상 부처를 이룰지 알지만, 어리석은 이들은 오는 세상 부처가 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삼보에 귀의하느냐고 의심한다.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어찌하여 아기를 배지도 않고 아들 낳을 생각을 가지는가. 반드시 태중에 아기가 있으면 자식이 있는 이라 이름하리니, 아기가 태중에 있으면 반드시 오래잖아 낳게 되며 이를 일러 자식이라 하느니 중생들의 업보도 그러하다”라고 하신다.

그런데 이 삼보에도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대소승에 삼보의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대승에서는 불성 가운데 법과 승이 있어 차별이 없지만, 소승에서는 성문과 범부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불보와 삼장의 법보와 소승교단의 승보가 있다고 분별하였다는 것이다. 보살은 부처님께 귀의하였으니 이 몸이 불도를 이루어 불성이 드러난다면 다른 세존께 공경 예배 공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곧 부처는 평등하여 똑같이 모든 중생의 귀의를 받기 때문이다. 한편 대승에서는 불성이 드러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경에 공경하고 탑에 공경 귀의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부처의 법신사리가 들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나의 몸 가운데 탑이 있다고 보아 예배 공양하게 한 것으로 곧 법신에 귀의하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대승에서는 삼귀의에 차별이 없다. 여래의 비밀법장에는 불성이 있고 이를 선양하면 몸 가운데 불성이 있게 되며 오는 세상에는 내 몸도 삼보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이룬 부처에야 불성을 헤아릴 수조차 없으리라.

다음에는 중도 원관(圓觀)으로 불성을 관한다. 불성을 알기 위해서 삼귀의 하였다면 중도 원관을 이루어야 반드시 여래가 될 여래장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만약 사람들이 영원한 내가 있다고 하면 제법이 항상하다고 하는 것으로 괴로움을 여의지 못하고, 내가 없다고 헤아리면 청정행을 닦아도 이익이 없다는 단견에 빠지게 된다. 불법의 중도는 이 두 가지 치우친 견해를 여의고 진실한 법을 말한다. 있다 없다는 견해는 중생의 성품이 일정하지 않아서 이를 알고 치우쳐 다스리고자 한 것이다.

여래는 중생들의 뛰어난 의사가 되어 중생들의 번뇌의 자체와 모양이 다른 것을 알고서 이를 끊어서 여래의 비밀법장에 청정한 불성이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음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이는 이 몸이 무상하다고하여 모든 것이 괴롭다하면서 우리에게 영원한 즐거움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한편 지혜로운 이는 법의 참된 성품을 잘 알아서 희론에 떨어지지 않고 우리에게 불성의 종자가 있으므로,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하지 않고 여래의 비밀법장이 고요하여 변함이 없음을 잘 안다. 또한 범부들은 무명의 인연으로 행이 일어나 명과 무명, 십선과 십악, 악도와 선도라는 두 가지 생각을 낸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둘이 없는 성품이 실다운 성품임을 알므로 여래의 비밀장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런데 중생들은 불성이 번뇌의 숲에 덮여 있어서 보지 못한다. 마치 바닷물이 한 결 같이 짜지만 그 속에 젖과 같이 훌륭한 물이 있고, 설산이 비록 갖가지 풀로 덮여 있지만 약초와 독초가 나는 것과 같다. 중생의 몸도 이와 같아서 비록 독사와 같은 사대종자가 있지만 그 가운데에도 묘한 약이 있으니 곧 불성이요, 이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번뇌에 덮여 있으므로, 중생들이 누구나 이를 끊기만 하면 불성을 보아 위없는 보리를 이루게 된다.

열반경에서는 이 불성 보기 어려움을 열 가지로 비유한다. 첫째는 소경을 치료하는 의사의 비유로 소경이 의사를 찾아가 갖가지 시술을 한 후에야 겨우 조금 보인다고 하는 것과 같다. 둘째는 허공 멀리서 기러기를 알아보는 어려움, 셋째는 길 떠나는 술 취한 사람이 길을 알아보기 어려움, 넷째는 목마른 사람이 숲에 흰 학을 보고 나무와 물을 구별하기 어려움, 다섯째는 망망대해에서 망루를 보고 허공과 구별하기 어려움, 여섯째는 허약한 왕자가 밤새 놀다가 새벽에 모든 걸 보아도 분명히 알기 어려움, 일곱째는 신하가 나랏일로 골몰하며 귀가하다가 번개 빛에 소떼와 구름을 구별하기 어려움, 여덟째는 청정 계행의 비구가 물결을 보고 벌레인지 구별하기 어려움, 아홉째 어스름한 밤에 멀리 있는 아이를 소인지 구별하기 어려움, 열째는 어스름한 밤에 보살을 보고 자재천인지 구별하기 어려움을 들고 있다. 이는 십주(十住) 보살들이 자기 몸에 여래의 성품이 있는지 아는 것이 이와 같이 아득하여 알기 어렵다고 한다.

-이기운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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