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든 연꽃에 부처님은 앉아 계신다
—여래장경

1. 보편종교로써의 불교, 성불의 근거는 초월적이며 선천적이어야 한다

종교는 인류와 함께 시작하였습니다. 고대인들은 하늘에서 내려치는 번개를 보며 신의 권능을 상상했고, 한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고 새봄에 돋는 새싹에서 신의 섭리를 생각했습니다. 고대인의 종교성은 그들이 처했던 환경과 어울려 특유의 종교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이런 원시종교가 고대원시문화를 구성하는 주요한 특징이라고 보면, 지구상엔 존재했던 종족의 수만큼이나 많은 종교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종교 중에 아주 특별한 몇몇 종교만이 세계인이 다함께 믿는 종교, 이른바 세계종교로 발전하였습니다. 세계종교란 특정 인종이나 민족을 초월하여 세계인이 공통으로 믿을 수 있는 종교를 가리킵니다.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유교 등등의 몇몇 종교만이 이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원시종교나 민족종교가 세계종교가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교리의 보편화 과정이지요.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와 전통이 다른 사람들이 공통의 신앙을 갖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뜨거운 신앙심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보편적인 교리체계를 갖추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세계종교가 되려면 오랜 시간을 두고 진행되는 보편화 과정은 필연입니다. 그래서 세계종교를 보편종교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경우 이스라엘 민족의 민족종교에서 보편종교로 변신하는 과정은 치열한 논쟁의 과정이었습니다. 무수히 많은 토론과 공회(公會)를 거치며 어떤 이론은 살아남고 어떤 건 사라져갔습니다. 이렇게 존몰(存沒)이 교차하며 기독교 교리는 체계화되고 보편화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에 지금도 기독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되는 것입니다.

불교도 같은 과정을 거칩니다. 대승불교의 출현은 불교가 본격적인 세계종교로의 도약을 시도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중관학(中觀學)이 소수에게 독점되는 종교성을 혁파함으로써 그 보편화의 길을 열었다면, 유식학(唯識學)은 중생 하나하나가 우주의 주체임을 천명함으로써 보편적인 성불의 길을 열었던 것입니다. 유식학에 이르면 우주는 내가 그리는 대로 그려집니다. 우주를 향기 가득한 연화장의 세계로 그리는 것도, 악취가 진동하는 지옥으로 만드는 것도 결국 나의 문제입니다. 이때의 ‘나’는 보편적 주체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보다 철저하게 이 길을 가지는 못했습니다. 성불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제약이 있어서는 또 다른 차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보편종교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목표에 도달하는 길이 쉬워야만 합니다. 그 목표가 기독교적 구원이든, 불교적 깨달음이든, 넘기 힘든 장애가 놓여있다면 이 또한 차별입니다. 선택받은 소수만이 가능한 것이라면 결코 온전한 세계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컨대 기독교가 진정한 세계종교로 서고자 한다면, 먼저 선민의식을 완전히 버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는 교리가 갖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대승불교는 유식학 이후에 또 다른 교리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인도 대승불교는 중관학, 유식학, 여래장사상의 세 갈개가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중관학과 유식학이 주류이고, 여래장 계통은 비교적 미미했던 것으로 보는 분도 있습니다. 발생 시기에 대해서도 중관학 다음에 유식학이, 그리고 이어서 여래장사상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는 분도 있고, 동시발생을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중관학이 처음 나오고 이에 대한 비판으로 유식학이 등장하여 양대 흐름을 형성한 이후에 여래장사상이 출현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철저한 고증과 깊은 문헌분석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인류 지성의 보편적인 흐름상의 이해입니다.

중국의 현대신유학자인 머우쫑산[牟宗三]선생은 종교적, 혹은 형이상학적 교의는 반드시 초월적이며 선천적인 근거가 갖추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고 합니다. 즉 구원이든 깨달음이든, 그 근거가 초월적이며 선천적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초월적이라 함은 어떤 상태나 조건에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고, 선천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선천적으로 가능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컨대 반드시 선지식의 도움이 있어야만 성불이 가능하다든가,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구원이 불가능하다면, 이는 조건이 붙는 것으로, 후천적이며 경험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초월적이고 선천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구라도 오직 본인의 선천적인 힘만으로 가능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자성적으로 처음과 중간, 끝이 없기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며,
적정한 법의 핵심이기 때문에 노력 없이 이루어진다고 전해졌다네.
-《보성론》, 견혜보살 지음, 안성두 옮김, 소명출판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천적이며, 이런 선천성을 자성적(自性的)이라고 언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의 핵심, 즉 모든 존재의 근거를 이루며, 그 근거는 아무런 노력 없이도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는 죽었다거나 그는 태어났다고 하는 이것은 세간의 언어용법입니다. 세존이시여! 죽었다는 것은 감각기관의 손상입니다. 세존이시여! 태어났다는 것은 새로운 감각기관이 생기한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결코 태어나지도 않으며 늙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으며 떠나지도 않으며 생겨나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존이시여! 유위의 특질을 초월해 있는 여래장은 상주이며 항구적이며 적정하고 영원합니다.
-《보성론》, 견혜보살 지음, 안성두 옮김, 소명출판 

모든 존재는 태어나고 죽습니다. 그러나 이런 존재 자체의 생사존멸은 세간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불과합니다. 불교의 인식에 의한다면 생멸은 다만 감각기관의 생멸에 불과합니다. 감각기관은 경험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경험한다는 것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즉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사물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멸은 경험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현상, 즉 유위법은 경험적이고 후천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래장이 유위법을 초월한다는 말은 곧 경험적이거나 후천적인 게 아닌 선천적이며 초월적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선천성과 초월성을 상주불변, 적정영원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도대승불교에서 여래장계통에 와서야 초월적이며 선천적인 성불의 근거가 비로소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2. 자성(自性)은 아(我)가 아닌가

여래장(如來藏)은 타자에 의지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성(自性)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조건이나 상황논리에 따라 자성의 발현이 제한될 수 있다면, 이는 차별입니다. 따라서 여래장자성은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변질되거나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그 상태 그대로 존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특성을 상주불변(常住不變)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보성론》. 여래장계통의 논서로 유일하게 온전한 산스크리트본 남아있다.
그렇다면 자성은 아(我, atman)가 아닌지요? 이른바 독립불변의 실체(實體)인 아와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만약 다르지 않다면 이는 부처님의 제1 교설인 무아설(無我說)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무아설은 연기설과 더불어 불교교설의 양대 축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교리인데, 이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면 심각한 교리훼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논리적 모순 때문에 어느 학자는 여래장사상은 불교 사상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하게 됩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상당수의 불교학자들은 여래장사상이 비불교적인 요소, 특히 인도 정통의 브라만교가 주장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사상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베단타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여래장사상이 당시 인도의 주요 사상이나 종교의 영향을 받는 것은 결코 어색하지 않습니다. 이는 매우 자연스런 현상이고, 조금도 나쁜 게 아닙니다. 다만 그 영향이 불교의 본질까지 왜곡하거나 훼손한다면 이는 분명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 즉 초월적이며 선천적인 성불의 근거를 갖추면서 교주인 부처님의 교설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는 과제가 대승불자들에게 놓여진 것입니다.

공성(空性)을 확신하지 못하는 자는 비불교도와 다르지 않다. 
-《보성론》, 견혜보살 지음, 안성두 옮김, 소명출판 

나는 그들의 스승이 아니며, 그들은 나의 제자가 아니다. 샤리푸트라여! 나는 그들이 어둠에서부터 어둠으로, 내적인 무지로부터 더 커다란 무지로 가는 자들이며, 어둠을 더욱 증대시키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보성론》, 견혜보살 지음, 안성두 옮김, 소명출판 

여래장자성이 실체로 존재한다고 보는 자들에 대해 거의 저주와도 같은 비난입니다. 《보성론(寶性論)》에 드러난 여래장사상은 어떤 형태로든 결코 실재론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래장을 실유형태로 해석하는 어떤 이론도 다 잘못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래장사상은……대승불교정신의 기본이념을 형이상학적으로 기초 다지려는 하나의 시도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절대적인 것은 필히 긍정적인 것으로 되고 붓다를 구성하는 무수한 공덕의 담지자가 되는 것이다. 이 공덕은 본래 산출된 심적 요소이지만 이제 절대적인 것의 무위적 본성 속에 용해된 것이다. 비로소 이런 구체적인 공덕의 용해를 통해 여래장 문헌에게 있어 절대적인 것은 동시에 불성으로서, 그럼으로써 해탈하지 못한 중생의 구제를 위해 작용하는 것으로 사유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작용성이야말로 여래장 문헌의 절대적인 것을 아드바이타 베단타의 완전히 정적(靜的)인 ‘이기적인’ 절대자와 구별시키고 진실로 불교적으로 만드는 점이다.
-《보성론》, 견혜보살 지음, 안성두 옮김, 소명출판 

형이상학적으로 기초를 다진다는 말은 곧 교리의 보편화를 시도한다는 말입니다. 대승불교정신이란 일체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고자 하는 정신입니다. 누구든지 어떤 경우라도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는 논리체계를 세우는 과정에서 여래장사상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당시의 불자나 논사들은 어떻게 극복하고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살피며 그 의미를 추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래장사상은 반드시 붓다 교설 안에서 독해되어야만 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인 무아설을 부정하거나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상발전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 밖에 아무리 비슷한 사상이나 이론이 있다고 하여도 함부로 끌어들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표면상의 유사함에 현혹되지 않고 그 차이를 분명히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여래장자성(如來藏自性)은 베단타철학과 매우 유사합니다. 하지만 이는 외견일 뿐 내면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슈미트하우젠은 베단타의 절대자, 즉 초월적이며 선험적인 존재는 완전히 정적이며 이기적인 것으로 여래장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말합니다. 여래장은 동적(動的)이며 이타적인 것입니다. 여래장자성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이며, 이들 모두를 구제하겠다는 지극한 이타심이며, 반드시 구체적인 행위로 실현되는 역동적인 열정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번뇌도 자리하지 않는 지극히 깨끗한 것이기에 여래장자성청정심(如來藏自性淸淨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 여래의 세계, 부정에서 절대긍정으로

여래장사상은 대승불교 〈인간학〉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불의 당위성을 대전제로 하면서 한편으로 유식학이 인간의 미혹된 현존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여래장사상은 여래와 다르지 않은 인간의 내재적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로부터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다. 또한 유식학이 인간의 앎과 의지 그리고 성불에의 과정을 밝히고 있다면, 여래장사상은 깊은 종교체험에서 드러나는 부처님의 자비 그리고 한없는 인간에의 신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정호영, 여래사상의 실천적 이해, 석림 32호, 98. 12.

따지고 보면 붓다도 인간인데 나와 다를 게 뭐 있겠습니까? 나도 얼마든지 붓다가 될 수 있지요. 유교의 맹자는 누구라도 요순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사상은 지극히 천박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너무도 간단한 건데, 여기까지 혹 너무 먼 길을 돌아온 것은 아닐까요? 이는 불교의 태생적인 특성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불교가 추구하는 해탈을 현대적 용어로 말한다면 완벽한 자유입니다. 이를 절대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어떤 사상이나 관념에 구속되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경지가 곧 여래의 경지입니다. 이를 위해 불교는 종교나, 사상, 어떤 이념이나 관념에 의해 야기되는 일체의 독단과 억압을 부정합니다. 심지어 대부분의 종교가 갖고 있는 신성(神性)마저도 거부합니다. 이것이 불교가 무신론적 교리체계를 갖추게 되는 이유입니다.

이런 태생적 특성이 불교교리가 부정론, 즉 “~이 아니다”라는 형태로 기술되게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이다”라는 긍정론으로 서술됩니다. 존재론적 사유에 따른 실유형태의 교리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어떤 절대적인 신이 존재한다고 보고, 신은 “~이고, ~이다.”라는 형태로 기술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불교는 이런 관념, 즉 신이 존재한다든가. 혹은 어떤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망념으로 간주합니다. 이런 망념을 깨기 위해서 “~아니다”라는 형태의 기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종일관 이런 부정론으로 무장한 대표적인 불자들이 바로 중관학자들이며, 유식논사들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중관학은 일체의 독단을 깨뜨리기 위해서 그리고 유식학은 인간실존의 미혹을 씻어내기 위해서 이들은 부정론적 논리를 구축해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여래장사상은 긍정론입니다. 같은 인간으로써 붓다와 조금도 다를 게 없는 성불의 가능성을 직접 제시하며 스스로를 믿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슈미트하우젠에 의하면 불교교리는 크게 두 방향, 즉, 부정적-주지주의적(negative-intellectualist) 경향과 긍정적-신비주의(positive-mystical) 경향이라는 두 방향으로 전개된다고 합니다. 중관학이나 유식학이 전자를 대표한다면, 후자의 대표는 여래장사상입니다.

하나의 종교나 사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해석과 이해를 낳습니다. 나아가 서로 다른 해석과 이해 간에 치열한 논쟁도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정통과 비정통을 나누고, 그런 와중에 이단(異端)이 발생합니다. 이 모든 현상은 사상이 전개되어 나가는 필연적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여래장사상은 정통인가요? 아님 이단인가요? 한 가지 분명한 건 부정은 절대긍정을 향할 때 의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붓다의 무아설도, 나가르주나의 팔불설도, 절대긍정의 세계를 위한 것입니다. 일체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그 어떤 이념이나 사유에 의해서도 장애되지 않는 경지, 이를 절대자유의 경지라고 한다면 여래장사상은 그 경지를 직접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여래장 또는 불성은 소박하게는 핍박받는 민중의 고통을 위무하기도 하였지만 근본적으로는 깊은 종교적 체험을 촉발시키고 인간의 궁극적 자유와 해방을 일깨우는 가르침으로 작용하였다.
-정호영, 여래사상의 실천적 이해, 석림 32호, 98. 12. 

여래장사상은 비록 가난하고 천한 중생일지라도,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누구라도 아무런 장애 없이 성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각성에서 출발하여 절대자유의 경지를 열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붓다 교설의 대자비심입니다. 만발한 연꽃이든 시든 연꽃이든 어디에도 부처님은 앉아 계십니다.

김문갑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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