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때 개성에서 피난 온 문수당 보살(속명 이정임 · 작고)은 청량리 시립병원에서 능인심을 급하게 불렀다. 능인심은 서울 북부 남양주 소재 수락산과 상계동 불암산 자락 경계에 자리한 불암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병원에 20대 초반 아리따운 처녀과 함께 온 능인심에게 문수당 보살은 서류봉투를 하나 건네며 꼭 지니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의정부 약수암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 능인심은 문수당 보살을 부축해 젊은 처녀과 함께 약수암으로 갔다. 약수암에서 솟아나오는 약수는 다락원에서는 물론 의정부 일대에서 온갖 질병을 치유하는 영험한 물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곳에서 문수당은 능인심과 능인심을 따라 온 처녀의 정성어린 간호를 받으며 병 치유에 열중했다. 

▲ 약수선원 범종각과 대웅전.

경기도 의정부 호원동 약수선원. 약수선원의 태동 배경은 이렇듯 약수와 불심 돈독한 세 여성의 우정으로 이루어진다. 문수당 보살은 당시 울산에서 승승장구하던 대한유화 회장. 약수선원의 최대 공덕주다. 능인심은 비구니 시현스님으로 약수선원 창건주 보문스님의 은사다. 20대 젊은 처녀가 바로 보문스님이다. 문수당이 건네 준 서류봉투는 약수터가 있던 당시 약수암의 집문서였다. 약수암은 허름한 산신각과 방2칸 짜리 ㄱ자방 요사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시현스님과 보문스님의 약수선원 창건설화가 다시 쓰여진다. 건물만 약수암 소유였지 땅 소유자는 개신교를 믿는 이교도였다. 이런 저런 압박과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두 스님은 벽돌을 찍어 내 관음전을 지었다.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쉽지 않은 건축불사였다.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불보살의 명호를 칭념하며 의지를 다졌다. 마침내 관음전이 완공되자 너무 기쁜 마음에 이를 기념하고자 보살계단을 열었다. 수계법사로는 한국불교의 최고봉에 자리하고 있던 동산 · 청담 · 대휘스님을 모셨다. 창건주 보문스님은 이때 머리를 깎고 사미니계를 받게 된다. 해인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평생을 약수선원과 함께 해오고 있는 것이다.

석조약사여래좌상. 약수선원 경내지 가장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관음전을 완공한 시현스님이 말했다. “비록 절은 새로 지었지만 부처님 만큼은 고불(古佛)을 모시고 싶다.” 시현스님은 노래처럼 이 말을 읊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약수암에 다니는 민보리성 보살(당시 민병두 한국은행 총재 어머니)이 절밑에서 보문스님을 찾았다. 스님은 신발을 급하게 신고 뛰어 내려가니 민 보살이 몸시중도 없이 혼자 타박타박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노구의 행보가 안쓰러워 두 손으로 안아드리니 가뿐했다. 내려달라는 말씀도 없어 가슴에 안고 올라와 인법당에 모셨다. 그러자 민 보살이 살짝 미소를 머금는데 자태가 너무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게 꿈이었다. 꿈 얘기를 은사스님께 말씀드리니 깔깔 웃으며 “가회동 보살님(민보리성)이 오늘 오시려나 보다”했다.

이날 민보리성 보살로부터 “보문스님을 집으로 보내달라”고 실제로 연락이 왔다. 집에 도착한 보문스님을 차에 태워 종로 5가 한 대처승 절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목조보살입상이 스님의 품에 안겼다. 광목에 둘둘 말린 목조입상은 꿈 속 느낌 그대로 가뿐했다. 한달음에 내달려 약수암에 도착한 목조보살입상은 나중에야 예사 불상이 아님이 밝혀졌다.

현재 관음전에 봉안된 목조보살입상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76호다. 보관을 제외한 크기가 84㎝로 해충에 강한 은행나무로 만들어졌다. ‘고불을 모시고 싶다’는 시현스님의 바람은 이 보살입상의 등장으로 실현된다. 개금과 파손된 부위의 복원을 위해 부른 박준주(전한국문화재수리기술협회장)씨는 국보급 불상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보살상 복장에서 광무9년명다라니, 무구정광다라니경, 발원문 및 금판도 발견됐다. 불상은 지리산 유역 경상도 폐사찰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추정됐다.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6호 목조보살입상.

삼존불 중 협시불로서 이 불상과 제작연대와 형태가 아주 흡사한 관음보살입상은 현재 동국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화재청은 목조보살입상의 조성 시기를 16세기 정도로 보고 있다. 인간문화재 박준주는 보살입상 친견의 인연을 지중하게 여겨 약수선원에 대형 괘불을 선물한다. 장정 3~4명이 달려들어야 겨우 펼쳐서 걸 수 있다는 이 대형괘불은 큰 행사 아니고는 평소에 볼 수 없다. 보문스님도 생전예수재를 봉행하느라 3번 정도 대형괘불을 펼치고 천도재를 지냈다고 회고할 정도다.

1962년 선학원에 등록된 약수암은 1969년 약수선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시현스님은 이 와중에 도봉산에 호국선원을 건립하고 약수암을 떠났다. 보문스님은 막내사제와 함께 약수선원을 이끌어야 할 책임을 떠안게 됐다. 1972년 비록 콘크리트지만 대웅전도 건립했다. 비로소 도량과 당우가 제 자리를 차지하며 어엿한 도량으로서의 면모를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1981년엔 스레트와 벽돌로 지어진 관음전을 목조건물로 개축했다. 주변 자연과 어울리며 풍광이 더욱 돋보였다. 신도들도 크게 기뻐했다. 선학원 이사장 범행스님을 초청해 낙성법회를 성대하게 봉행했다.

▲ 약수선원 창건주 보문스님.

약수 위에 자리한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약수선원의 독실한 신도인 안경환 노(老)보살의 시주로 봉안됐다. 안보살은 약수를 배경으로 중생들의 질병과 재앙을 소멸하는 발원을 담아 약사여래를 모셨다.

1986년엔 일주문도 세웠다. 약수선원은 망월사역을 지나 호암초등학교를 꺾어 오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가장 먼저 들여놓은 발길에 주차장이 있고 도량이 시작되는 초입에 일주문이 사람들을 반긴다. 일주문 안으로 발을 옮기면 ‘약수선원’과 ‘관음정사’ 판액이 정면으로 시야에 들어오고 오른 쪽으로 요사채 ‘청송당’이 위치하고 있다. 청송당은 2007년에 신축된 것으로 보문스님과 보문스님의 상좌이자 현 주지인 지선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지선스님도 약수선원의 중창에 있어선 중심의 역사다. 70대 후반 연로한 보문스님이 기억하지 못하는 옛일을 지선스님은 주섬주섬 기억해낸다. 약수선원의 역사를 같이 해 온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교도인 땅임자를 상대로 ‘밀당(밀고 당기기)’ 전략을 구사, 2001년 땅 매입에 성공함으로써 지금은 2천7백평에 달하는 사찰부지를 소유하고 있다.

▲ 가장 먼저 찾는 이를 반기는 약수선원과 관음정사 현판.

1987년 대웅전을 목조로 개축해 확장한 것과 1988년 종각신축불사로 약수선원은 비로소 대외적으로 자랑할만한 사격을 갖추게 된다. 그 배후엔 역시 최대 공덕주라 할 이정님씨와 형제들이 있었다. 이정님씨에겐 자신을 포함한 6형제가 있었다. 이들을 위한 기도처로 처음 약수암을 매입했던 것이다. 이 가운데 남동생 이정구씨는 보문스님을 끝까지 후원한 시주자였다. 이씨는 임종 직전에도 부인에게 “보문스님의 용돈을 잊지 말고 챙겨줘라”고 유언할 정도였다.

보문스님은 그래서 남은 원력이 있다면 입적 전 꼭 사적비를 경내에 세우고 싶다고 말한다. 이 원력도 실현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장담한다. 간절한 염원과 기도엔 늘 불보살님이 화응해 주셨기 때문이다. 관음재일 지장재일 등 기도가 있는 날엔 거르지 않고 보문스님과 주지 지선스님은 법당에 올라가 신도들과 함께 목청껏 염불 정진한다.

▲ 새로이 단장한 약수터는 지금도 인기가 높다.

-김종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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