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대(謝裕大)차장’은 흥업한지 40여년이 흘러 사정안(謝正安)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네 명의 아들들에 의해 합작경영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게 된다. 그러나 연이어 발생한 중국 내지의 군벌들의 내란과 중일전쟁 등의 크고 작은 전란이 끊이지 않던 역사적 인 격동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황산모봉은 그 생산량이 감소됨과 동시에 각지에 있던 ‘사유대차장’의 분점들마저 하나 둘씩 패쇠되어갔다. 이로 인해 영국과 러시아 등지로 대량 수출되던 국제 판로(販路)마저 막히게 되자 ‘황산모봉’은 마침내 세상으로부터 서서히 잊혀져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양길에 접어든 ‘황산모봉’이 다시 기사회생(起死回生)하게 된 것은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중화민국)과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신중국(新中國)’1)을 건립한 후, 중국 정부의 장기적인 경제계획정책의 통제를 받기 시작하면서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정통 ‘황산모봉’의 생산량은 여전히 위축되어 있는 상태였다. 생산량 통계에 따르면, 1982년에 3등급 모봉이 445.5㎏; 1983년에 2등급과 3등급의 ‘모봉’이 합쳐서 2863.3㎏; 1984년에 특1, 2, 3등급이 7382.3㎏, 1985년에는 11405㎏이 생산되었다.
비록 ‘황산모봉’이 외교부와 상업부에서 우수명차의 칭호를 받았지만 당시 시장의 명품의 관리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체, 여전히 혼란한 틈을 타 가짜 ‘황산모봉’이 대량으로 시장에 출시되는 바람에 중국에서 전국적으로 시행한 찻잎추출검사에서 ‘황산모봉’의 명성은 거의 0점에 가까운 낮은 합격률을 받아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이 때 가짜 황산모봉(黃山毛峰)으로 인해 정통 황산모봉의 명성이 훼손되는 모습을 더 이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던 모봉의 창시자 사정안(謝正安)의 적통후손인 ‘사일평(謝一平)’은 ‘정통 황산모봉의 회복’이란 기치를 내걸고 ‘모봉’의 품질과 명성의 회복에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사일평(謝一平)은 1995년 자신이 근무하던 ‘흡현(?縣)차엽공사’를 사직하고 직접 차사업을 하기 위해 낙향하여 조계(漕溪)2)에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가업을 이어 드디어 ‘조계차창(漕溪茶廠)’을 창업하기에 이른다. 그는 조상들로 물려받은 전통 가공기법의 기초에다 현대과학기술을 접목하여 마침내 모봉의 품질을 한층 더 발전시킴은 물론 명차(名茶)로써의 모봉의 원래 명성을 회복하는데 성공하기에 이른다.
중국의 휘상(徽商)들의 경영이념은 바로 ‘성신(誠信)’을 우선으로 한다. 원래의 맛과 향을 살린 황산모봉을 생산하기 위해 ‘사일평’은 두 가지 방법을 동시에 실시하였다. 한쪽으로는 차 생산기지를 건설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상품의 이미지를 결정짓는 상표관리에 주중하였다. 아울러 황산모봉의 재배에 적합한 지역, 기후, 토양 등의 조건에 부합하는 해발 500미터3) 이상에 위치한 부계(富溪)와 갈석(竭石) 두 마을에 모봉차의 생산기지를 건설하였다.
10여년의 고심어린 경영 끝에 사일평의 ‘사유대(謝裕大)’에서 생산한 황산모봉은 마침내 ‘국가원산지 생산품 보호범위’에 속하는 국가 주요 농산품으로 지정되었음은 물론, ‘중국차왕’이란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현재 ‘사유대’차창에서 생산되는 차는 10여만㎏에 달하며 생산가로는 인민폐2000여만 원(한국 돈 26억여 원 상당)에 달한다.
‘황산 사유대 유한공사(황산 휘주 조계차창)’는 ‘황산모봉’의 창시자인 사정안(謝正安)의 고향인 황산시 휘주구(徽州區)에 위치하고 있다. 모봉의 생산·가공·판매와 과학적 연구가 합일되어있는 민영과학기술기업단체로 안휘성 농업 산업화의 선두 기업에 속한다. ‘사유대’기업의 사장(법인대표)은 바로 창시자 사정화의 제5대손이자 가업인 ‘황산모봉’을 부흥시킨 ‘사일평(謝一平)’이다.
현재 회사 직원과 공원들은 모두 286명이며, 그중에서 고급 설계사 2명, 농예사(農藝師)가 4명, 회계사 1명, 상품포장설계사 1명, 농업기술연구원 8명, 공정기술인원이 28명인데, 이는 ‘황산모봉’이 상품으로 출시되기까지 모든 분야가 굉장히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단계를 거쳐 연구 진행되고 있음은 물론이고, 또한 각 책임분야가 체계적으로 세분화되어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유대(謝裕大)’차장은 ‘황산모봉’의 정통원산지로써 품질이 우수함을 밑천삼아 ‘황산(黃山) 제일가(第一家)’라는 명성에 걸맞게 투철한 경영이념과 새로운 시장 요구에 맞추어 가기위해 부단히 연구하고 있다. ‘황산모봉’이 명차로써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을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과거 조상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전수하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발전시켜 오늘의 모봉 최고의 조계품질을 생산하게 되었다.”라고, 게다가 이들은 전통공예를 철저히 계승하여 복원함은 물론 선진과학기술을 수용하여 활용함과 동시에 우수한 인재들의 과감한 등용으로 ‘품질의 개선’과 ‘상품 브랜드 전략’을 실시하여 마침내 세계적으로 유명한 ‘황산모봉’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차의 생산 기지를 건립하고 협회를 조직하며, 농민을 함께 이끌고 가는 즉, ‘기업+기지+협회+농가’ 형태의 일원화된 선진 산업화 경영시스템을 이룩하였다.
‘사유대(謝裕大)’의 표준 찻잎의 초제(初制)가공 기지는 황산모봉의 원산지인 휘주구 부계향(富溪鄕)으로 점유면적이 253아르(a)이고 작업장 건설면적은 약 1만 평방미터 규모로 각종 공정단계가 완전히 현대화 설비시스템으로 갖추어진 중국 최대의 황산모봉차 생산기업이다. 뿐만 아니라 조계(漕溪)는 중국 정부에서로부터 ‘황산모봉차의 생산기지(生産基地)’로 공식 지정되었으며, 동시에 조계의 ‘황산모봉차’는 중국의 10대 명차 중에서도 중국의 ‘국차(國茶)’로 공식 지정되는 영예를 얻기도 하였다. 2007년 3월 중국의 국가주석 후진타오(胡錦濤)는 중국을 방문한 러시아의 푸친 대통령과 함께 부계(富溪)를 방문하여 공장과 ‘사유대차엽박물관’을 관람한 뒤, 직접 그에게 ‘황산모봉’을 선물하기도 했다. 

박영환/동국대 강사

각주)-----------------
1) 신중국(新中國): 그들은 모택동의 공산당이 건립한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을 일컬어 늘 ‘신중국(新中國)’이라고 표방하기를 좋아한다.
2) 조계(漕溪): 현재 안휘성의 부계(富溪)
3) ‘사유대(謝裕大)차엽박물관’의 자료에 의하면 ‘사유대’에서 운영하는 황산모봉의 재배 다원(茶園)은 모두 해발 800미터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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