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기술과 자본주의적 생산체계는 우리의 삶을 속속들이 지배할 뿐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 내지는 잠재의식의 영역인 욕망의 메커니즘까지 조종하고 있다. 현대를 지배하는 세계관은 ‘기술·과학적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하이데거와 선(禪)』(한스 페터 헴펠, 이기상·추기연 옮김, 민음사)에 주목하게 만든다. 즉, 산업적·과학적·기술적 발전이 약속하는 ‘무한한 진보라는 저 위대한 약속’에 동참하려고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실정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출발점은 독일의 슈피겔지 기자의 “서구사유의 전환에 동양적 사유가 한 몫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는 하이데거의 답변이다.
하이데거의 답변은 이렇다. “오직 현대의 기술적 세계가 생겨난 그 같은 세계의 장소로부터만 하나의 전향 또한 준비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확신입니다. 말하자면 전향은 선불교나 다른 동양의 세계경험의 수용을 통해서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유의 전향을 위해서는 유럽이 갖고 있는 전승들과 이것들에 대한 새로운 자기 것 화(化)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사유는 오직 동일한 유래와 규정을 갖는 그 사유를 통해서만 변화될 뿐입니다.”
하이데거는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저자 헴펠은 이성과 논리에 앞서 존재생기의 사건자체를 강조해 온 하이데거가 동양의 선과 도와 만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바로 이런 생각에서 양자의 소통을 모색한 것이 『하이데거와 선』이다. 여기서 저자는 자연이나 인간 자신을 자본의 도구로 삼아 정보의 속도전에 매진하는 정신 황폐의 이 시대를 극복하는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우리가 우선 나타남·밝음·있음 등에만 주목한 나머지 그렇게 보인 것들에 대한 소유와 집착을 증폭시키는 길 대신, 그런 것들이 감춤·어두움·없음 등과 이중적으로 동거하고 있다고 보는 관계적 사고를 회복하는 길이다.
이는 사유의 풍요를 가져오고, 물질의 부에 대해 마음의 가난을 감내하는 그런 길이다.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 갈마들기 등으로도 표현되는 이런 동거성의 사유야 말로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저자의 공력의 총화라 할 만한 지점이다.
그런 동거적 사유의 변주로 생산되는 동서 사유의 성찬이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다소의 티를 잡는다면, 이 책의 핵심어인 법(法)이나 성(性) 개념이 지닌 인도 불교적 배경이나 중국 철학적 변용에 대한 설명이 미흡하다는 점이다.
그래도 살아가면서 내공의 진한 표출을 보는 건 즐거운 긴장이다. 이 책은 창조적 사유로의 비상을 위한 그런 즐거운 스트레스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일방적 식이요법에 익숙한 지식인들에게 둔중한 망치가 될 그런 책이다.
헴펠은 이 책을 통해 어떻게 하이데거가 ‘유럽의 전승을 새롭게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는가’를 보여주면서 그 노력의 귀결점이 선수행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존재경험과 그리 멀지 않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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