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존재는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출가 수행자들이 먹을 음식을 담는 도구인 발우(鉢盂)는 한마디로 밥그릇이다. 하지만 단순히 식사를 위한 도구만은 아니다. 발우의 다른 이름이 선기(仙器)인 까닭은 수행자의 그릇이라는 뜻이고, 응량기(應量器) 또는 응기(應器)라고 하는 까닭은 재가자가 주는 대로 받아서 먹는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흔히 발우는 ‘소욕지족’(小慾知足)의 정신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발우의 크기를 접하는 사람들은 열이면 열 다 놀라고 말 것이다. 발우가 수행자의 일인용 밥그릇이라고 하는데, 저렇게 많이 담아서 한 끼를 먹는다는 말인지 의아하게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사실 발우는 세간에서 사용하는 밥그릇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크기로 만들어져 있다.
더구나 현대 불교 교단에서 전통적인 발우를 사용하여 공양을 하는 것이 매우 특별한 의식처럼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우가 청정 무욕을 상징하는 까닭은 그 본질과 기원이무욕 무착이라는 출가 수행자의 생활상을 함축하는 대표적인 사물이기 때문이다.

가사 입고 발우 들고
본래 고대 인도에서 기원한 출가수행 전통이란 출가자가 어떠한 생산적인 활동에도 종사하지 않고 최소한의 먹을거리마저도 전적으로 재가자들에게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것이 대전제로 깔려 있다.
불교보다 먼저 정립되어 있었던 자이나 교단에서는 불(不)소유라는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자 어떠한 발우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이나 수행자들은 발우도 없이, 손으로 음식을 받아먹었으며, 지금까지도 그 원칙을 고수하는 일파가 남아 있다. 그와 같은 자이나 수행자들의 식습관에서 나온 말이 바로 ‘손발우’이다. 발우의 대용으로 손을 사용했다는 뜻이다.
물론 숟가락도 젓가락도 사용하지 않는 인도의 전통적인 식습관으로 볼 때 발우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먹는 것이 무슨 대수인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수행자가 밥그릇도 없다는 것은 잠시 잠깐이라도 음식을 저장할 수 있는 여지조차 없애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얼마나 철저하게 불소유를 실천했으며, 탐욕의 싹조차 자라나지 않도록 경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불교 교단에서는 손발우를 사용할 만큼 엄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발우의 사용과 관련하여 엄격한 규제가 있었다는 것은 율장 곳곳에 나타나 있다.
먼저, 발우와 관련하여 경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은 “가사 입고 발우 들고.”일 것이다. 이 구절은 붓다와 비구들이 때가 되어 재가자들의 마을로 탁발을 나갈 때 필수적인 준비 동작으로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발우는 가사 더불어 출가자에게 필수품이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출가자에게 최소한의 소지품만을 허용하고 있는 불교 교단에서 발우에 대한 규율은 어떠했을까?
율장에서는 발우의 재료와 색이 법에 맞아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즉 발우는 쇠나 흙으로 만들며, 색은 기름을 발라서 연기를 쏘여 만들며, 크기는 상·중·하가 있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발우는 기본적으로 네 개가 한 벌이다. 그 유래는 붓다의 첫 발우가 총 네 개 한 벌이었다는 데서 비롯한다.
율장에서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뒤에 길을 가던 상인들에게 처음으로 공양을 받던 순간, 하늘의 4천왕은 붓다가 공양을 받을 그릇이 없다고 걱정하는 것을 알아채고, 각각 하나씩 합하여 네 개의 발우를 붓다에게 바쳤다고 전한다. 그 때 이래로 교단에서는 일인용 발우는 네 개가 한 벌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현재 남방 불교 국가에서는 한 개의 발우를 사용하는 것이 기본적이다.
우리나라에선 네 개의 발우, 즉 사합(四合) 발우 각각에는 담는 것이 정해져 있다. 밥, 국, 물, 반찬 등 네 가지를 따로 담아서 사용한다.
그런데 사분율과 마하승기율을 비롯한 율장에서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발우 외에 여벌의 발우 이상을 지녀서는 안 된다는 계를 정하고 있다. 특히 여벌의 발우를 열흘 넘게 지니고 있으면 안 된다고 정해 놓았다. 이를 축발계(畜鉢戒)라고 한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그 옛날 출가자들도 때로는 서로 물건을 숨기면서 장난을 치기도 했던가 보다. 율장에서는 비구 또는 비구니가 다른 비구나 비구니의 발우나 옷 등을 감추고 희롱한 경우를 예로 들면서, 그렇게 자신이 감추거나 남을 시켜서 감추고 서로 희롱하면서 웃기만 해도 계를 범하는 것이라고 경계하고 있다.
그 밖에 발우와 관련된 율장의 규정은 다음과 같다.
△더러운 손으로 발우를 잡아서는 안 된다.
△남의 발우를 빌려 쓰면 안 된다.
△주머니 속에 발우를 넣고 지팡이 끝에 꿰어서 어깨에 메고 다니면 안 된다.
△발우를 씻어 낸 물을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된다.
△새지 않을 정도로 조금 깨진 경우에 새로운 발우를 구해서는 안 된다. 조금 깨진 경우란 다섯 바느질을 할 정도를 말한다.
△식사할 때는 남의 발우를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기 음식과 비교하여 다른 이의 발우 안에 음식이 적고 많은 것을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붓다가 발우와 관련된 이처럼 소소한 계율들까지 제정해 두었던 목적은 출가자들 모두가 수행자다운 위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수행자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발우
붓다 이래로 출가자의 기본 물건 중 하나였던 발우는 이제 수행자의 밥그릇, 그 이상의 상징 법구가 되었다. 자신의 밥그릇은 말 그대로 공양을 받을 만한 그 수행자의 정체성을 대신하는 상징물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선가(禪家)에서는 승복과 발우를 합쳐서, 의발이라 하고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법맥을 ‘의발(衣鉢) 전수’라는 표현으로 대신할 정도에 이르렀다.
지금은 불교 문화의 한 형태로 ‘발우 공양’이 꼽힐 정도이지만, 발우 그 자체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발우를 매개로 하여 먹을거리를 주고받는 관계에 그 본질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재가자가 수행자에게 음식을 보시한다는 공양의 정신이 살아 있을 때, 그리고 그에 앞서서 공양을 받기에 합당한 위의(威儀)를 수행자가 갖추었을 때, 비로소 발우는 그 형태를 막론하고 이름에 빛을 더할 것이다.

김미숙/동국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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