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부파불교 시대를 거치면서 매우 복잡한 교리적, 철학적 체계를 만들어 냈다. 현재 우리들이 알고 있는 복잡한 교리 체계는 부파불교 시대에 체계화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교리체계 혹은 철학체계가 아무리 복잡해지고 난해해져도 불교가 지향하는 점은 한 가지이다. 바로 해탈이다. 모든 번뇌로부터의 해탈, 바로 이 하나로 집약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불교는 해탈을 정점으로 해서 그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체계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이론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면 교학체계가 되는 것이고, 실천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면 수행법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론과 실천이 다른 것이 아닌 동전의 양면과도 같으며, 또한 모든 이론체계는 실천의 문제로 귀결되게 된다. 바로 이 점이 불교의 교학체계가 순수 사변의 흐름으로 나아가지 않게 된 이유일 것이다.
만약 불교에서 수행이 빠진다면, 더 이상 불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석존은 해탈에 이르는 실천적 방법론을 가르치신 것이지, 철학적 이론 체계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석존에게 있어 이론은 실천 수행의 필요성과 그것으로 인해 기대되는 결과를 이성적으로 납득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초기 경전을 보면, 석존의 말씀은 언제나 수행으로 귀결되며, 그와 관계없는 말들은 희론(잡담)이라 하여 비판하셨음을 보게 된다. 또한 석존이 설한 수행법은 처음부터 어떤 조직화된 체계를 갖고 설해진 것이 아니다.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는 방법이 제시되고, 개인의 성향을 고려하여 가르쳐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이에게는 부정관이 제시되고, 또 어떤 이에게는 팔정도가 제시되기도 한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수행법을 제시하였기에, 석존을 달리 의왕(醫王)으로 부르기도 한다. 각각의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수행법을 제시하였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불린다.
앞서 말했듯이, 수행의 목표는 해탈의 성취이다. 해탈을 성취한 수행자를 초기·부파불교에서는 아라한이라고 부른다는 점을 전호에서 살펴보았다. 전호에서 본래 아라한은 붇다와 같은 의미였으나, 불멸후 아라한은 불제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로 위치 지워지고, 붇다와 구별되었음을 보았다. 그러나 붇다이든 아라한이든 해탈을 성취한 점에서는 동일하다. 즉 번뇌의 찌꺼기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존재라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붇다에 의해 설시(說示)된 수행법은 해탈을 위한 수행법이며, 그 수행법에 의해 수행하게 되면, 그 결과로서 아라한이란 과위(果位)를 얻게 된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런 수행법에 대한 초기 불전의 기술은 매우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다. 어떤 수행법이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문헌이 맛지마니까-야(MN.III, pp.81~88)라는 경전이다.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 본다.
①사념처(四念處), ②사정근(四正勤), ③사신족(四神足), ④오근(五根), ⑤오력(五力), ⑥칠각지(七覺支), ⑦팔정도(八正道), ⑧자수행(慈修行), ⑨비수행(悲修行), ⑩희수행(喜修行), ⑪사수행(捨修行), ⑫부정관(不?觀), ⑬무상상(無常想), ⑭수식관(?息觀)
위의 14가지 수행법은 초기 불교 승단에서 실제 수행되었던 수행법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들 수행법은 각기 하나의 독립된 수행법으로 제시된다. 이들 중 어느 것을 수행하든 그 결과는 예류과로부터 아라한과, 즉 성인의 과위를 얻게 되는 과보를 초래하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들 수행법은 다시, 수행을 통해 아라한의 과위를 얻게 하는 수행법과, 아라한과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예류과부터 불환과까지 얻을 수 있는 수행법으로 구분된다. 그 중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는 수행법으로 제시된 것이 1번부터 7번까지의 수행법이다.
그렇지만 이들 7가지 수행법을 닦게 되면 반드시 아라한과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라한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7가지 이외의 다른 수행법들은 아무리 잘 닦아도 아라한과를 초래하지는 못한다. 아라한의 바로 전단계인 불환과까지만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7가지 수행법이 다른 수행법과 구별되는 점이다.
이 7가지 수행법이 부파불교 시대에 이르러 하나의 체계로 묶여져 불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37보리분법이다. 37보리분이란 것은 7가지 수행법의 개수를 모두 합한 숫자를 의미한다. 즉 ‘37가지의 깨달음으로 이끄는 요소’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들 수행법의 내용을 살펴보면, 서로 중첩되는 내용들이 눈에 띄며, 다른 수행법들을 포괄하는 형식으로도 기술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어느 하나를 수행하게 되면 다른 수행법도 자연히 같이 닦여질 수 있는 체계로 되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팔정도의 경우, 맛지마니까-야(MN.III, pp.251~252)에는 정견?정정진?정념?정정을 각각 사성제?사정단?사념처?사정려로 정의하고 있으며, 상윳따니까-야(SN.V, p.49)에는 팔정도가 다른 수행법의 기초 수행으로 설해져 있다. 즉 팔정도를 닦으면 사념처?사정단?사신족?오근?오력?칠각지가 원만히 닦여진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디가니까-야(DN.II)의 『대념처경』에는 사념처 속에 수식관·부정관·오온·십이처?칠각지·사성제·팔정도 등의 수행법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설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어느 한 수행법을 닦게 되면 다른 수행법이 같이 닦여지게 된다. 따라서 어느 수행을 하든, 이들 수행법은 해탈로 이끄는 수행법으로 차별이 인정되지 않는다. 만약 팔정도를 닦게 되면, 예류과부터 아라한과에 이르는 과위를 얻을 수 있게 되며, 사념처를 닦게 되면 불환과를 얻거나 아라한과를 얻게 된다고 설해지고 있다. 다른 수행체계 역시 마찬가지의 결과를 얻게 한다. 다만 수행을 하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수행법이 달라질 뿐이다.
그러나 예의 팔정도나 사념처 수행법의 체계는 후대의 발전된 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평가된다. 본래의 팔정도나 사념처 수행법의 모습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후대의 발전된 양상이라고 하더라도, 이들 수행법은 나름의 이론적 근거와 실천적 체험을 바탕으로 체계화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필원/청주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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