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면 ‘부처 아닌 것이 없다’ 하고, ‘어떤 것이 큰 지혜의 검입니까’ 하면 ‘죽은 놈은 베지 않는다’ 하고, ‘어떤 것이 사자후입니까’ 하면 ‘누가 그대에게 여우의 울음을 하라더냐’고 하고, ‘어떤 것이 진실한 말입니까’ 하면 ‘마음을 벽 위에다 걸어 두는 것이니라.’ 하는 등등의 수많은 선문답은 선문답의 진수를 체험하기에 충분하다.

선이라 해서 막힘이 없고 지체 없이 나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명필이 된 사람이 글씨 쓰는 법을 말하는 것은 모두 옳거니와, 명필이 되지 못한 사람이 글씨 쓰는 법을 말하면 설사 옳은 말을 했어도 옳지 않은 것처럼, 선사들의 말씀 또한 수증요의(修證了義)한 경계를 말씀하시기 때문에 선문답을 보고 발심할지언정 그 문답을 사량해서는 안 된다.
풍혈연소(風穴延沼·896~973) 선사는 여항 사람이니, 처음에는 경청순덕(鏡淸順德·864~937) 대사에게 출가하였다. 그러나 깊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다가 이어 화엄원(華嚴院)에 가서 수랑(守廊) 상좌를 만났다. 그가 곧 남원의 시자였으니 여기서 남원의 종지를 비밀히 알게 되었다.
대사가 상당하여 대중에게 말했다.
“조사의 심인(心印)을 온통 보이리라. 초월했다 하여도 조사의 심인에 머무른 것이요, 머물렀다면 조사의 심인을 파괴한 것이다. 다만 이러해서 초월하지 못했다 하거나 머물지 않았다 하여도 조사의 심인은 바로 이것이요, 조사의 심인이 아니라 하여도 바로 이것이니 대중 가운데서 말할 수 있는 이가 있느냐?”
이때에 노파(盧陂) 장로라는 이가 나와서 물었다.
“학인에게 무쇠 황소 같은 기틀이 있으나, 스님께서는 인가한다 말아주십시오.”
대사가 대답했다.
“고래를 낚으려고 크고 맑은 물에 갔으나 도리어 진흙탕을 헤매는 개구리를 낚았으니, 애석하구나.”
노파가 가만히 생각하고 있자 대사가 불자를 들어 입을 때리고 말했다.
“장로는 앞의 말을 기억하느냐?”
노파가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는데 대사가 말했다.
“드러내 봐라.”
노파가 입을 열려는데 대사가 또 불자로 한 번 때렸다.
“현묘한 법을 배우는 안목이라면 기틀에 임해서 대용(大用)을 나타내는 것이니 사소한 절차에 구애되지 말라. 설사 말하기 전에 깨달았다 해도 오히려 껍데기에 걸려 물건 끝에 씌우는 뚜껑 속에 드는 것이요, 비록 말한 뒤에 정밀하게 통한다 하여도 가는 곳마다 미친 소견을 면치 못한다. 그대들을 관찰하건대 전부터 남에 의해 알음알이로만 배워 왔으나, 이제 그대들의 미혹하고 어두운 두 갈래 길을 쓸어버려 사람마다 포효하는 사자가 되게 하여 천 길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것 같이 하리니, 누가 감히 바로 보겠는가? 바로 보는 자는 당장에 그의 눈이 멀게 될 것이다.”
또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어떤 것이 부처가 아닌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바람결에 우짖는 나무 말은 인연의 얽매임이 없고, 등에 뿔이 솟은 진흙 소를 채찍으로 아프게 때리노라.”
“어떤 것이 광혜(廣慧)의 검입니까?”
“죽은 놈은 베지 않는다.”
“옛 거울을 갈지 않았을 때는 어떠합니까?”
“하늘 마귀의 간이 찢어지느니라.”
“옛 거울을 갈은 뒤엔 어떠합니까?”
“십이 면의 거울을 만든 원숭이의 도가 없어졌느니라.”
“어떤 것이 바로 끊는 한 길입니까?”
“굽었으면 바로 끊어라.”
“어떤 것이 사자후입니까?”
“누가 그대에게 여우의 울음을 하라더냐.”
“어떤 것이 진실한 말입니까?”
“마음을 벽 위에다 걸어두는 것이니라.”
대사는 대송(大宋) 개보(開寶) 6년 8월 1일에 법상에 올라 게송을 말하고, 15일에 이르러 가부좌를 틀고 떠났다. 떠나기 하루 전에 손수 글을 써서 신도들에게 이별을 알리니, 수명은 87세요, 법랍은 5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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