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상을 바로 보는 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한다. 세상을 바르게 본다는 것은 바른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며 이렇게 보면 바른 삶이 이루어져서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바른 마음이 뒤바뀌어 버리면 괴로움 속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품(四倒品)에서는 우리가 세상 사는데 가장 중요한 네 가지 뒤바뀐 생각들을 바로 알도록 깨우치는 법문이다.

전도심이란 술취한 사람이 중심을 못 잡고 어지러이 빙빙 도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미혹으로 인하여 뒤바뀌는 것이다. 전도심은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네 가지, 여덟 가지 내지 여러가지 전도심이 있다.

한 가지란 무명(無明)의 마음 때문에 허망한 그물에 자신을 가두고 스스로 그 속에서 쌓여 있음을 말한다.
두 가지란 보는 것마다 허망한 생각을 내고, 마주치는 대상들에 집착하여 바른 마음을 손상시킴을 말한다.
세 가지란 진리에 대한 의심(疑心)으로 마음이 뒤바뀌며, 도리를 벗어난 생각으로 마음이 뒤바뀌며, 분별심으로 견해가 뒤바뀌게 된 것을 말한다.

네 가지란 상(常)·락(樂)·아(我)·정(淨)이 위장되어 있어 진실됨이 없음을 말한다.
여덟 가지란 앞의 네 가지와 상·락·아·정이 없어서, 마치 기와나 조약돌처럼 진실하지 않음이다.
여러 가지란 열반의 불성은 결국 청정하여 진리가 아닌 것에 전도되지 않는데, 미혹된 이해가 인연이 되어 전도된 진리를 설하는 것을 말한다.

경문에서 네 가지 뒤바뀐 생각은 열반에 드는 부처에 대한 네 가지 뒤바뀐 생각을 말한다. 곧 여래의 경지는 반야 법신 해탈을 이룬 경지이므로, 첫째는 열반락[樂]이 있고, 둘째는 영원한 삶이 있으며[常], 셋째는 참된 나[我]가 있고, 넷째는 법신의 청정한 몸[淨]을 이룬다는 것이다.

사전도에 대해서는 애탄품에서 무상 등의 병을 다스린 바가 있는데, 여기서는 다만 미혹의 병 네 가지를 밝힌다. 곧 고의 전도, 무상의 전도, 무아의 전도, 부정의 전도심을 밝힌다. 이러한 전도의 병에 대해 이해한다면 약을 내놓을 수 있다. 진리가 아닌 것에 전도됨을 여위고 연에 따라 갖가지로 설하니 그러므로 사전도를 밝힌다고 한다.

경에서는 사전도에 대해 그 경계를 말하고, 다음으로 전도의 본체를 밝힌다.

첫째, 고의 전도이다. 부처님의 경지는 괴로움이 없는데 늙어 병들어 죽는 괴로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부처의 본체를 미혹했기 때문이다. 부처는 제법의 이치를 다 통달하여 생사의 괴로움에서 해탈하여 열반에 들어있으니 여래는 생멸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부처가 열반에 드는 것은 나무에 불이 꺼지듯 무상하고 괴롭다고 하면 이는 세속의 중생심에서 헤아려 일체법이 변이 하는 것처럼 여래도 무상하고 생사의 괴로움이 있다고 보는 것이므로, 중생의 무명으로 전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에서는 “괴로움이 아니라는 것은 여래요, 괴롭다는 생각을 내는 것은 여래가 무상하고 변이한다는 것이니라. 여래가 무상하다고 말함은 큰 죄와 괴로움이요, 여래가 이 괴로운 몸을 버리고 열반에 드는 것이 마치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고 하면, 그것은 괴로움이 아닌데 괴롭다는 생각을 내는 것이므로 뒤바뀜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둘째, 무상의 전도이다. 여래는 항상한데 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여래의 본체는 법신으로 열반에 머물러 있으니 영원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이 제법이 인연에 따라 변하여 성주괴공하고 생로병사하는 것을 보고 무상하다고 하여 여래의 수명도 입멸에 들어가시 무상하다고 한다면 이는 전도심이라는 것이다. 제법이 공한 이치를 안다면 현상적으로 변이하는 것은 자성이 없는 것이요, 본래는 공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적한 이치로서 여래의 영원한 경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셋째, 무아의 전도이다. 여래는 영원한 열반의 불성을 갖추고 있어서 참된 나가 있는데, 중생의 안목으로 헤아려 나가 없다고 하면 이는 전도심이라고 한다. 여래의 본체에서는 세간사람도 아(我)가 있고 부처님법에도 아가 있다고 하지만, 중생들은 비록 비록 생사의 내가 있지만 불성이 없어 내가 없다고 하거나, 부처도 생멸을 보이므로 부처님법에도 내가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이는 전도심이다.

넷째, 부정하다는 전도이다. 여래는 해탈을 이루어 법신이므로 청정한데 중생들은 육신의 뼈와 힘살과 잡식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부정하다고 하는 이것을 전도심이라고 한다. 옛적에 육체가 부정한데 깨끗하다는 생각을 전도되었다고 한 것은 중생들이 자신의 육신에 대한 집착과 망상을 청정히 하기 위함이었다. 여래는 육신의 뼈와 중기로 얽힌 몸이 아니고 잡식하는 몸이 아니어서 법신에는 부정한 것이 없으니 여래가 육체가 부정하다고 한 것은 전도심이라 한다.

사전도의 법은 초기불교와 대승 열반경에서 설하는 취지를 잘 이해해야만 하는 교리이다.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셔서 무명심으로 제법에 집착하여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중생들을 위하여 사전도를 파하는 가르침으로 무상 무아 고 부정의 법을 세상에 남기신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방편에서 생사고에 떨어지는 중생을 위해 병에 따라 시설한 법문이다.

이것은 글자에 집착하고 잘못된 종지로 방편의 약을 알지 못하여 약이 오히려 독이 되었으니 곧 상·락·아·정의 네 가지 전도심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이 처음 세상에 나오셔서 무상약을 투여하여 전도심을 씻어내게 하였다.

이제 대승 열반경에서는 중생의 병이 없어지고 여래의 약이 남아 이것을 상·락·아·정이라 하였다. 결국 사전도의 법문은 부처님의 방편을 미혹하여 무상 등을 일으키니 부처님이 이를 관하고 병에 따라 상(常)·락(樂)·아(我)·정(淨)의 약을 사용하여 그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