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화가. 모든 세상을 그린다 - 화엄경

1. 《양들의 침묵》, 양들은 비명을 멈추었는가?

▲ 영화 ‘양들의 침묵’ 포스터.
다섯 번째 희생자! 여자를 납치 살해하고 살갗만 벗긴 채 버리는 연쇄살인범의 등장에 미국은 경악합니다. 이 살인범은 여자들을 성폭행하지도 않습니다. ‘버팔로 빌’이란 별명 그대로 범인은 다만 뚱뚱한 여자들만 골라 납치한 후 살갗을 벗겨낼 뿐입니다. 범행 동기나 범죄 유형도 전대미문입니다. 해결의 단서라도 잡을 요량으로 FBI의 행동과학부장 잭 크로포드(스콧 글렌 분)는 수습요원 클라리스 스탈링(조디 포스터 분)을 한니발 렉터(앤서니 홉킨스 분)에게 보냅니다. 한니발은 한때 정신과 의사로 명성을 날렸으나 자신의 환자 9명을 죽이고 인육을 먹은 연쇄살인범으로 체포되어 특별히 설계된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스탈링은 어려서부터 홀로된 아빠와 둘이 살았습니다. 그녀의 나이 열 살 때, 보안관이던 아빠는 도둑이 쏜 총에 맞고....... 죽습니다. 아빠는 한 달이나 사경을 헤맸지요. 이 한 달이 어린 스탈링에겐 치유하기 힘든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빠가 죽고 스탈링은 몬타나에 있는 엄마의 사촌 집으로 보내졌습니다. 몬타나의 목장에는 말과 양이 사육됩니다. 두 달 쯤 지나 어두운 새벽녘에 양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그녀는 도살되는 양들을 목격합니다. 스탈링은 어린 양 한 마리를 품에 안고 도망칩니다. 열 살짜리 계집아이에게 양은 너무 무겁고 밤공기는 너무 차가웠습니다. 얼마 못가 그녀는 보안관에 끌려 집에 돌아왔고, 고아원으로 보내집니다. 이후 그녀는 밤이면 양들의 비명소리를 듣다가 깨곤 합니다.

스탈링의 이야기는 범인에 대한 단서를 얻는 댓가로 렉터 박사에게 들려준 것입니다. 렉터 박사는 천재적인 두뇌와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사건을 분석하고 범인의 심리를 읽어 냅니다. 다음의 범행은 어떤 것이 될 것인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분석은 탁월합니다. 그런 능력으로 스탈링의 마음속을 들여다봅니다. 상호간의 예의를 바탕으로 스탈링과 렉터 박사는 교감을 이어가고...... 렉터 박사의 말을 곰곰이 분석하며 스탈링은 마침내 범인을 찾아냅니다. 결국 범인을 죽이고 납치되었던 상원의원의 딸을 구해냅니다. 이제 정식 수사관이 된 스탈링! 축하연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수송 중에 탈출한 한니발 렉터 박사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전해집니다.

“이제 양들은 비명을 멈추었는가?”

2. 아뢰야식 연기, 그 내가 만드는 세계

스탈링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지독한 트라우마입니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스탈링은 아버지의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지요. 한니발 렉터 박사를 처음 만나고 나온 주차장에서 그녀는 울음을 터뜨립니다.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를 보다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던 아빠가 생각났던 것입니다. 울음은 아빠에 대한 기억을 의식 속으로 현행시켰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그동안에는 기억하지 않으려고 억누르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녀의 꿈에 나타나는 양들의 비명은 기실 억압된 아빠의 죽음이 투사된 것입니다. 스탈링은 아빠의 죽음을 회피하는 대신 양들의 비명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려야 하는 고통. 어떻게 하여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스탈링은 아빠에 대한 기분 좋은 기억까지도 생각해내려 하지 않습니다. 아빠에 대한 기억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곧장 아빠의 죽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통을 회피하려는 심리가 기억을 의도적으로 억압하고, 이렇게 억압된 기억은 그녀의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이 무의식 속의 기억이 엄마의 사촌네 목장에서 겪었던 경험을 계기로 양들이 비명을 지르는 꿈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시종일관 전개되는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는 이런 스탈링의 내적 심리상태를 표현합니다.

스탈링은 한니발 렉터 박사의 말을 아리아드네의 실(그리스신화에서 테세우스가 미노스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하러 미궁에 들어갈 때,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도록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가 준 실) 삼아 한 걸음 한 걸음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고, 결국 이 사건을 해결합니다. 이제 비로소 양들의 비명이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을 짓누르던 고통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이를 유식학의 논리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어린 시절 스탈링의 기억은 아뢰야식에 종자로 저장됩니다. 이 종자는 그녀의 의식에 영향을 주지요. 그녀의 악몽, 수습 수사관의 길, 그리고 불안하고 공포스런 그녀의 주변 모두가 결국 이 종자에 근원합니다. 이를 아뢰야식 연기(阿賴耶識緣起)라고 합니다. 즉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의 발현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종자는 먼저 제7식인 말나식에 영향을 주고, 이는 다시 제6식인 의식, 그리고 전5식으로 발현됩니다. 이를 전변(轉變)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세계는 우리들의 의식이 투영되고, 현행하고, 선과 악, 미와 추가 분별됩니다. 세계는 아뢰야식에 의지한 전변의 결과입니다.

두 가지 추증(麤重, 잠재적인 악)을 끊으면 곧 광대한 전의(轉依)를 증득하게 된다. 의(依)는 소의(所依)로서, 의타기(依他起)를 말한다. 이것은 염정법(染淨法)의 소의(所依)이다. 염(染)은 허망한 변계소집(遍計所執)이다. 정(淨)은 진실한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전(轉)은 두 가지를 버리고(轉捨) 얻는 것(轉得)이다. 여러 무분별지(無分別智)를 닦아서 본식(本識)에 있는 두 가지 장애(障碍)의 추중[麤重,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끊었으므로, 의타기(依他起) 위의 변계소집(遍計所執)을 소멸한다. 또한 의타기(依他起) 안의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증득한다. (번뇌장(煩惱障)을 전환하여 대열반을 얻는다. 소지장(所知障)을 전환하여 최고의 깨달음을 증득한다. 성유식론, blog.daum.net, 如少水魚에서 인용. 훌륭한 글을 올려주신 풍진객님께 지면을 빌려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 《성유식론(成唯識論)》, 유식논서로 호법(護法) 등이 짓고 현장(玄裝)이 번역하였다.
우리들의 경험은 기억이 되고 아뢰야식에 종자로 저장됩니다. 기분 좋은 경험은 좋은 기억으로, 나쁜 경험은 나쁜 기억으로 저장될 겁니다.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종자로 아뢰야식을 물들인다는 점에서는 모두 염오식(染汚識)의 원인이 됩니다. 사실 종자와 연관되어 좋다거나 나쁘다는 표현은 결코 좋은 표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종자는 다만 하나의 잠재력으로서 현상의 원인이 되는 것인데, 좋다 나쁘다 하는 표현은 이미 어떤 결과를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기분 좋고 선한 결과를 가져온 기억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종자로 저장되어 전변을 일으킨다면 기본적으로 염오식으로 발현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나한테는 좋은 기억이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결과를 가져오거나, 그 반대의 경우는 너무도 흔합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있는 이념논쟁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 논쟁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과거의 경험이 음으로든 양으로든 현재 그들의 사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지나간 기억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좋았는지는 몰라도 국민들에게는 혐오감을 가져다주는 행태를 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아집(我執) 때문일까요? 아니면 일부러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청정식(淸淨識)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의 깨끗한 부분을 가리킵니다. 염오를 걷어내어 깨끗해진 상태로 아마라식(산스크리트어 ‘amala-vijñāna’를 음역한 것으로 청정식(淸淨識)·무구식(無垢識)·백정식(白淨識) 등으로 번역된다. 이 식을 진제(眞諦) 계통의 섭론종(攝論宗)에서는 8식과는 별도로 제9식으로 보지만, 현장(玄裝) 계통의 법상종(法相宗)에서는 제8아뢰야식이 깨끗해진 모습으로 이해한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청정식이란 다만 변계소집을 제거한 상태입니다. 그러면 의타기가 그대로 드러나지요. 과거의 기억이 소멸되는 게 아니라 기억 그대로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스탈링의 고통은 과거의 기억을 애써 회피하려는 태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이게 번뇌장입니다. 아집(我執)으로 말미암는 거지요. 스탈링이 양들의 꿈을 자주 꾸는 이유는 고통으로부터 나를 지키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지장은 법집(法執)인데, 이는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아(我)와 법(法)이 모두 실유(實有)한다는 생각에 집착함으로써 세계는 왜곡되고 진실은 가려집니다.

이 두 개의 장애를 제거하여야만 진실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증득(證得)이란 말은 산스크리트어 ‘adhigama’의 번역어로 ‘얻다’라는 의미 외에 ‘도달하다, 가까이가다’는 의미도 내포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다’란 뜻의 ‘adhigama bodhi’는 ‘진실에 도달하다’, 혹은 ‘지혜에 가까이 접근하다’라는 의미로도 읽히는 것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바른 지혜를 얻어야만 하고, 바른 지혜를 얻는다는 것은 곧 진실에 다가간다는 말입니다. 스탈링이 밤마다 양들의 비명을 듣는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고통의 진실에 다가가야만 합니다.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범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하여 범인과 마주하여야만 그를 잡을 수 있듯이 아버지의 죽음에 직면하여야만 그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은 그 어느 누구도 대신해주지 못합니다. 오직 스탈링 본인만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한니발 렉터 박사는 스탈링에게 한편으론 범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지혜를 주면서, 동시에 그녀의 고통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도록 이끌어준 멘토이기도 합니다. 그의 치밀한 계산속에 스탈링은 한 발짝 한 발짝 어둠 속에 묻어 놓았던 기억을 끄집어냅니다. 기억의 해방은 곧 고통의 해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마침내 온전히 기억을 다 드러내 놓고, 그 실상 앞에 섰을 때 스탈링은 비로소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참된 진리를 얻는다는 건 곧 실상을 바로 본다는 것이고, 실상을 바로 본다는 건 실상을 가리고 있던 모든 염오(染汚)를 걷어내는 것입니다. 거울에 티끌이 묻으면 사물이 왜곡되거나 은폐됩니다. 거울에 묻은 더러운 자국을 하나씩 하나씩 지우듯, 스탈링은 어두운 무의식속에 묻어둔 아픈 기억을 차례차례 밝은 햇빛 속으로 끄집어냅니다. 비록 렉터 박사의 반 강요에 의한 길이지만 회피하지 않고 그 일을 해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버지의 죽음과 대면합니다.

3. 전식성지(傳識成智), 멀고도 험한 길

만약 한니발 렉터 박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스탈링은 양들을 침묵시키지 못할까요?

지혜(知慧)는 진여(眞如)를 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진여를 은폐하고 왜곡하는 일체의 염오식을 지워야 한다면, 이는 스탈링의 의식에서 아빠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우는 일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아빠에 대한 기억을 기억 그대로, 아빠와의 추억, 아빠의 죽음, 그 모든 기억을 기억 그대로 회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행복은 행복 그대로, 고통도 고통 그대로 대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탈링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의식이 전환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의식을 지혜로 바꾸는 일, 바로 전식성지(傳識成智)입니다.

유식학자들을 유가행파(瑜伽行派)라고 부르듯, 이들은 요가수행을 통해 전식성지가 가능하다고합니다. 유가행(瑜伽行)을 통해 아집을 여의고, 법집을 제거해 감으로써 궁극적으로 아법이공(我法二空)의 진여를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단계를 십지(十地)로 설명합니다.

또 다른 방법은 정문훈습(正聞薰習)입니다. 바른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아뢰야식에 저장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장된 종자를 정문훈습종자라고 합니다. 불교는 본래 부처님의 깨달음에 근거하여 성립된 종교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 바로 진리이며 불교교설을 이룹니다. 따라서 불자가 진리를 증득하려면 먼저 부처님의 교설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해탈할 수 없는 걸까요? 즉 정문훈습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진여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인가요? 다시 스탈링이 한니발 렉터 박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양들의 비명을 잠재울 수 없을까요? 물론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앞에 말한 것처럼 요가수행을 통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요가수행은 혼자서도 가능할까요? 이 또한 불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너무 어렵고 힘든 길이 되겠지요.

지난 시리즈19회에서 중관학이 대승을 위해 대승을 가로막고 있는 일체의 독단을 깨부수었다면, 유식학은 그 큰 수레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20회에선 유식학이 제시한 방향은 바로 주체의 의식, 즉 우리들의 마음이었음을 말했습니다. 이는 정확하고 옳은 길입니다. 스탈링이 양들을 침묵시키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내면, 그 의식의 저 밑바닥까지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면 이제 대승은 모든 중생을 구제할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걸까요?

적어도 한 가지 대승(大乘)이 진정 큰 수레가 되려면 누구라도 주체적으로 쉽게 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굳이 렉터 박사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스탈링은 스스로의 힘으로 평화로운 잠을 잘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문훈습으로 전식성지하는 길, 그 길은 사실 너무도 멀고 어렵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중생들은 그 길을 끝까지 가기 힘들어 할지도 모릅니다. 결국 대승이 나아가려면 누구라도 쉽게 스스로의 힘으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요가수행을 하지 못하더라도 지혜를 얻을 수 있어 하는 것입니다. 한니발 렉터 박사의 도움 없이도, 스탈링이 쉽게 양들을 침묵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이제 우리는 유식학을 이어 이 일을 해낼 대승불자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김문갑(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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