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승>의 마지막 장면은 지금까지 본 불교영화 중 가장 인상적인 엔딩 씬이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동자승은 바랑을 짊어지고 절을 나옵니다. 절에서 나온 동자승을 기다리는 것은 눈보라 휘몰아치는 들판이었습니다. 높이 쌓인 눈 때문에 발이 푹푹 빠지고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길을 동자승 혼자 까마득하게 걸어가면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고단하고 외로운 운명을 표현하는 엔딩이었다고 봅니다. 대부분 불교 영화들이 결국에 가서 주인공들은 욕망을 극복하는데 반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욕망에 대한 집요함 때문에 고통스런 현실에 던져지면서 영화가 끝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중생을 대변하는 두 개의 단어를 고르라면 ‘욕망’과 ‘고(苦)’일 텐데 인간의 이 운명을 가장 적절하게 보여준 엔딩 씬이었습니다. 영화에서 동자승은 중생을 대변합니다. 헛된 욕망인데도 불구하고 결코 그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동자승의 모습은 욕계를 사는 중생의 삶과 닮았고, 슬픈 운명을 예고합니다.

그런데 영화의 온도는 대체로 따뜻합니다. 욕망에 집착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탓하기 보다는 헛된 욕망인줄 알면서도 거기서 헤맬 수밖에 없는 처지에 안타까운 시선을 보냅니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동자승을 불쌍하게 여기고 따뜻하게 감싸 안는 인수아버지의 모습은 영화의 지향점이기도 합니다.

<동승>(한국, 2002)의 원작은 함세익이라는 극작가가 쓴 같은 제목의 희곡입니다. 이 작품이 발표된 연대는 1939년으로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힘들던 시절입니다. 이때 작가는 금강산 어느 사찰에 놀러 갔다가 사미승을 만났고, 이 만남에서 영감을 얻어 <동승>을 썼다고 합니다. 함세익의 희곡 <동승>은 1949년에 <마음의 고향> 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가 주경중 감독에 의해 <동승> 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된 것입니다.

영화는 암자를 배경으로 해서 동자승과 큰스님 그리고 사춘기를 막 벗은 젊은 스님이 나오고, 인수 아버지라고 허드렛일을 하는 부목이 있습니다. 인물 구성 면에서 보면 대체로 동자승과 젊은 스님을 한 그룹으로 볼 수 있고, 큰스님과 부목을 같은 그룹으로 무리 지을 수 있습니다. 앞의 젊은 그룹은 욕망을 갖고 있는 존재들이고, 뒤의 그룹은 욕망을 초월한 집단으로 앞 그룹에 대해서 조력자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조력자 그룹인 큰스님과 인수 아버지는 역할 면에서는 동질적이지만 뚜렷한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큰스님에게는 자신의 틀이 있습니다. 이 틀은 불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세속의 삶은 고통스런 것이니 그것에 마음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큰스님은 동자승이 욕망으로 가득한 세속의 삶에 빠지는 걸 경계하면서 한 편으로는 수행자의 틀 안에 동자승을 가두려고 합니다.

반면에 인수 아버지의 시선은 동자승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봅니다. 동자승이 괴로워하면 더불어 괴로워하고, 동자승이 기뻐하면 자신도 기뻐하고, 동자승이 원하는 건 자신도 소원하는 편입니다. 교육자의 역할보다는 엄마 역할에 가깝습니다. 중생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을 가진 관세음보살과 같은 존재로서 그의 행동 기준은 휴머니즘입니다.

어린 동자승이 엄마를 그리워하자 부목은 어린 동자승의 마음을 이해하고 비록 거짓이긴 하지만 동자승에게 희망을 줍니다. 단풍나무에 금을 그어 키가 그만큼 자라면 엄마가 온다고 일러줍니다. 동자승은 그 희망을 갖고 하루를 버티면서 살아갑니다.

반면에 큰스님은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마음 때문에 동자승이 괴로움에 빠질 걸 알기 때문에 큰스님은 그 마음을 헤아려주기 보다는 단칼에 끊어버리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 타령 좀 그만하라고 나무라면서 스님 나름의 처방을 내립니다. 나무 아래 앉아 바위를 바라보면서 바위가 마음속에 있는지 마음 밖에 있는 것인지 알아보라고 합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 또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준 처방이지만 배 아픈 사람에게 두통약을 주는 것처럼 동자승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물론 인간이 처한 욕망과 고통의 근본적 해결이라는 틀에서 봤을 때는 큰스님의 태도가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큰스님이 만든 울타리는 욕망에 들뜬 어린 승려에게는 너무 갑갑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여타의 불교 영화들에 나오는 승려들은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여기 나오는 젊은 스님과 동자승은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고 환속한 사람들입니다. 기질적으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성향의 사람들에게 건조한 가르침이나 장벽 높은 계율은 어울리지 않는 울타리였습니다.

동자승에게는 가르침을 주는 사람보다는 결여감을 채워줄 따뜻한 엄마 같은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인수 아버지는 동자승에게 이런 역할을 했습니다.

절에 오는 보살님 중에 동자승이 특히 엄마처럼 여기는 보살이 있는데 그 보살이 두른 하얀 털 목도리를 보고나서 동자승은 자신도 엄마를 만나면 그 털목도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보살이 둘렀던 털목도리는 욕망의 중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털목도리를 보지 않았다면 동자승은 토끼를 잡고 그 가죽을 벗길 생각을 못했을 텐데 동자승은 어느 날 그 털목도리를 봐버렸고, 그래서 토끼를 한 마리씩 잡아 살생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만 큰스님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부목은 자신이 토끼 덫을 놓았고, 동자승에게는 잘못이 없다면서 대신 죄를 덮어씁니다. 부목은 동자승의 잘잘못을 판단하기 보다는 혼날 걸 걱정하면서 괴로워하는 동자승을 도와주는 쪽을 택했습니다. 엄마에 대한 욕망 때문에 동자승이 살생을 저질렀다는 걸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헛된 욕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자승이 부목에게는 그저 안쓰러울 뿐인 것입니다. 아마도 이게 보살의 마음이지 않나 싶습니다.

한편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욕망에 대한 해석입니다. 여타의 불교 영화에서 욕망은 해결해야할 과제고, 숙제였는데 이 영화에서 보여준 욕망은 가혹한 운명이었습니다.

동자승의 욕망은 엄마입니다. 9살짜리 동자승에게 엄마란 절대적 존재인 것입니다. 동자승의 마음속은 엄마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욕망의 부피 때문에 다른 것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엄마에 대한 동자승의 욕망은 토끼를 살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마침내 절을 나가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절을 나가면서 인수 아버지에게 한 말이 인상 깊습니다.

“엄마를 찾아 세상 끝까지 가볼 거예요.”

욕망을 쫓겠다는 결론입니다. 그 끝에서 동자승은 서울 보살이 말한 것처럼 ‘세상 모두가 어머니였다’는 차원 높은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한 욕망을 부여안고 살아가는 떠돌이의 스산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동자승의 욕망은 동자승을 울타리 밖으로 내몰았고, 그 세계는 큰스님이 말한 것처럼 욕망과 고통이 가득한 세계인 것입니다.

한편 젊은 스님은 세상 구경을 다녀온 후 여자에 대한 욕망을 갖습니다. 욕망을 갖는 자신이 너무 괴로워서 이를 악물고 참선을 하고 염불도 외우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손가락을 연비하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안 되겠는지 어느 날 절을 떠납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입니다. 욕망을 거스르면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노스님의 여유 자적한 경지는 결코 그냥 이뤄진 게 아니었습니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동자승이 세상을 여행하면서 세상 만물이 어머니 아닌 게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경지고, 또한 사춘기 스님의 들끓는 욕망을 이겨낸 경지기도 한 것입니다. 젊은 스님이나 동자승이 욕망을 이겨냈을 때는 큰스님처럼 불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두 사람 다 욕망을 끊기 어려운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젊은 스님처럼 나름 노력은 했지만 패배하는 경우도 있고, 동자승처럼 욕망을 쫓아가는 경우도 있고, 어쨌든 이들은 모두 욕망의 덫에 갇힌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영화는 이 가여운 존재들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패배자들이 바로 우리 중생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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