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익진 박사.
한국불교학회(학회장·김용표 동국대교수)는 12월6일 동국대 다향관 세미나실에서 ‘병고 고익진의 학문세계’를 주제로 동계 학술워크숍을 가졌다. 이 원고는 이중표 교수(전남대)가 이날 고익진 박사에 대한 ‘초기불교와 아함경 연구’를 발표한 내용 가운데 결론을 전재한 것이다. 이 내용 만으로도 고익진 박사의 학문적 업적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필독을 바란다. <편집자 주>

이 중 표(전남대 철학과 교수)

지금까지 필자는 고익진의 초기불교 해석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고익진이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를 발표했던 197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초기불교를 소승불교라고 경시했다. 불교연구자들도 초기불교의 연구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학문풍토에서 고익진의 석사학위논문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는 초기불교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고익진은 동국대에서 김동화를 이어 <원시불교>를 강의하면서 초기불교의 연구가 모든 불교 연구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그 결과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초기불교를 연구하고 가르치기 시작한 인물은 김동화이지만, 그는 불교학 전 분야에 걸쳐 현대적 연구의 초석을 놓았기 때문에 그를 초기불교 연구자로 한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의 《원시불교사상》은 개론서로서 전문연구서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초기불교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는 고익진에서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고익진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초기불교 연구를 시작한 초기불교 연구의 효시일 뿐만 아니라, 후학들에게 초기불교 연구의 중요성을 일깨워 이후 활발한 연구를 가능하게 했다.

고익진은 석사학위논문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에서 초기불교를 대승불교의 기초로 보고, 초기불교의 여러 교리들을 하나의 사상체계로 이해한다. 그리고 불교 용어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작업을 한다. 이러한 고익진의 연구태도는 초기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의 불교 연구에 귀감이 된다고 생각한다.

고익진이 초기불교를 대승불교의 기초로 이해한 것은 김동화의 지적과 같이 “불멸 후 형성된 불교 문헌들의 중심사상이 붓다의 교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대승불교를 불설이 아니라고 배척할 것이 아니라 초기불교와의 관계를 밝혀서 그 의의를 살려야 한다” (김동화, 《原始佛敎》, p. 19 참조. “佛敎 專門學者는 모든 大乘經이 非佛說이라는 汚名을 쓰는 것을 슬퍼 말고 釋迦世尊의 根本思想中에서 華嚴의 圓融思想이나 法華의 一乘思想의 근거를 찾아내는 것이 華嚴經을 살리고 法華經을 살리는 길임을 自覺하여 불교 敎理의 體系的 연구에 노력하는 것이 그 義務일 것이다.” )는 점에서 마땅하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고익진이 생각하는 ‘대승불교의 기초학으로서의 아함’은 김동화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는 초기 대승경전인 반야경과 법화경을 초기불교에 뿌리를 두고 후대에 성립한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고익진의 이러한 주장은 문헌학이나 경전 성립사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그는 현대학자들의 문헌학이나 경전 성립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고익진, 《佛敎根本經典》, 발문(跋文) 3쪽 참조.)

그는 아함에서 반야, 법화에 이르는 교리체계에 빈틈이 없기 때문에 반야와 법화도 불설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도 고익진의 주장처럼 교리의 정합성은 불설 비불설을 판단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익진이 이야기하는 아함에서 반야, 법화에 이르는 교리의 정합성이 과연 반야와 법화를 불설로 인정할 만한 것인가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익진은 자신의 깨달음을 아함, 반야, 법화삼부경을 통해서 확인한다. 그 내용은 붓다가 아함경에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밝혀 해결책을 마련해주었고, 반야경에서는 모든 것이 공하다는 가르침을 주었으며, 법화경에서는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불이라는 것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위의 책, 발문(跋文) 2쪽. )

고익진이 이와 같이 반야와 법화를 불설이라고 주장하게 된 실질적인 근거는 법화경의 일불승설이다. 그는 아함경의 연기설은 반야경의 공사상에 이르고 있는데, 불교의 궁극적인 이념은 반야의 완성으로 그치지 않는다고 본다. 왜냐하면 반야의 논리는 일체의 소득을 변증법적으로 부정해 나가 결코 현실에 되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화경에서는 불교의 궁극적인 이념은 결코 피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불’하는 데에 있다고 주장한다. 즉 법화경에서는 지금까지 설해온 교설을 크게 삼승으로 갈라 사제를 닦아 아라한이 되고, 십이연기를 닦아 벽지불이 되고, 육바라밀을 닦아 보살이 된다고 이야기하고, 이러한 삼승의 교설은 방편이고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삼승은 있을 수가 없고, 오직 한줄기 성불에 이르는 ‘일불승’만이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일불승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피안이 아니라 차안으로의 회향이다. 따라서 아함경의 연기론을 떠나 반야경의 공은 이해될 수 없고, 삼승의 교리 없이 법화경의 일불승은 있을 수 없다. (고익진, <一佛乘의 菩薩道>, 《현대한국불교의 방향》, pp. 64-69 참조.)

이와 같이 아함에서 시작된 붓다의 가르침은 반야경을 거쳐 법화경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법화경의 일불승설을 근거로 반야와 법화를 불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고익진이 주장하는 대승 불설은 대승불교가 아함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대승불교의 이해에 아함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고익진의 불교이해가 실체론적이라는 점이다. 그는 불교가 실체론이라는 것을 당당하게 주장한다. 3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익진은 무아를 아트만으로 규정한다. (고익진, <阿含의 無我輪廻說>, 위의 책, p. 158 참조. )

그가 생각하는 ‘아함법상의 체계’는 이러한 궁극적 실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이것을 진여법계, 진여실상 등으로 부르며, 이것이 아함경에서는 십팔계, 육계, 명으로 표현되고, 반야경에서는 반야바라밀다로 표현된다고 주장한다. (고익진, <般若心經의 緣起論的 敎說>, 위의 책, pp. 151-152 참조.)

이러한 실체론에 입각하여 아함을 해석한 것이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이다. 고익진에 의하면 진여법계, 또는 진여실상은 궁극적 실체다. 그것을 알지 못함으로써 중생들의 유위세간이 연기한다. 육육법이라는 유위세간은 십팔계라는 실체를 미혹하여 연기한 것이고, 오온이라는 유위세간은 육계라는 실체를 미혹하여 연기한 것이며, 십이연기라는 유위세간은 명이라는 실체를 미혹하여 생긴 것이다. 이것이 반야경에 이르면 반야바라밀다라는 궁극적 실체가 된다.

기실 고익진이 아함, 반야, 법화를 불설이라고 주장한 것은 이러한 궁극적 실체를 염두에 둔 것이다. 궁극적 실체가 아함에서는 십팔계, 육계, 명, 공 등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반야경에서 제법개공이라는 변증법적인 부정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나 반야경의 이러한 부정은 무한부정으로 시종하지 않고 어떤 궁극적 실체에 도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무한부정의 논리는 시공적으로 원융무애한 진여법성의 현발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에서는 그것을 반야바라밀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위의 책, p. 154 참조.)

이와 같은 실상론의 전개 과정에서 아함은 필연적으로 반야로 이어지고, 반야는 법화로 나아가야하기 때문에 아함, 반야, 법화는 한줄기 성불에 이르는 일불승이다. 그리고 이 일불승은 한줄기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고익진의 생각인 것이다.

고익진은 이러한 실체론적 실상론에 의하여 인연(hetu-paccaya), 집(samudaya), 연기(paṭiccasamuppāda)를 해석한다. 고익진에 의하면 이 세 개념은 아함에서 유위법의 성립과정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인연론은 어떤 결과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인과 연이라는 두 개의 조건이 필요하다는 교설이다. 예를 들어 버터는 우유라는 연과 우유에서 버터를 발생하도록 하는 동력인(因)이 필요하다. 이때 우유와 버터는 각기 다른 존재이다. 즉 연이 되는 전법[우유]은 사라지고, 그 과로서 후법[버터]이 발생하는 것을 설명하는 이론이 인연론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연론은 십팔계라고 하는 진여법계에서 육육법이라는 유위세간이 발생하는 원리로 작용한다. (고익진,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 p. 64-68 참조.)

집(samudaya)은 인연론적인 발생의 뜻은 없고, ‘함께(sam) 올라(ud) 간다(aya)’의 뜻만을 갖는다. 즉 이미 존재하고 있는 법들이 ‘결합하여 상승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이러한 의미의 집은 육계라는 진여법계에서 오온이라는 유위세간이 성립하는 것을 설명하는 개념이 된다. (위의 책, p. 104-108 참조.)

연기(paṭiccasamuppāda)는 ‘연하여(paṭicca) 함께(sam) 일어남(uppāda)’을 뜻한다. 연기는 ‘결합하여 위에 있다’는 의미는 집과 같지만, 집에는 없는 인연론적인 발생의 뜻이 있다는 점에서 집과 다르다. 그리고 인연론적인 발생의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는 인연과 같지만, 인연론에는 없는 결합의 뜻이 있다는 점에서 인연과 다르다. 즉 인연론에서는 인연의 화합으로 과가 생기면, 연은 반드시 멸하는데, 연기론에서는 연이 사라지지 않고 과와 결합해서 일어난다. 이러한 연기는 인연과 집을 하나로 결합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연기라는 개념이 명이라는 진여실상에서 십이연기라는 유위세간이 성립하는 것을 설명하는 개념이 된다. (위의 책, p. 116-117 참조.)

이와 같이 고익진이 해석한 아함의 체계는 십팔계라는 진여법계를 인연으로 육육법이라는 유위세간이 발생하고, 육계라는 진여법계에 미혹하여 오온이라는 유위세간이 집하고, 명이라는 진여실상에 미혹하여 십이연기라는 유위세간이 연기하는 치밀한 형이상학체계이다. 아함의 복잡하고 다양한 교리들을 이와 같이 질서 정연하고 치밀한 교리체계로 구성한 점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해석은 전체적으로 많은 검토를 요한다. 특히 불교를 실체론적으로 이해하고, 그 실체론에 의하여 아함의 교설을 해석한 것은 깊이 논의해야 할 부분이다. 기존의 모든 해석을 뒤집는 고익진의 혁명적인 초기불교 해석에 대하여 후학들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기를 기대하며, 이 논문이 그러한 작업의 밑거름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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