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처연한 소멸의 아름다움을 내뿜는 단풍과 가을 하늘의 온전한 쾌청함을 만끽하면서 탈핵 도보순례길에 동참했다. 변산반도 끝자락 줄포 성당에서 출발해서 판소리의 거장 김소희 생가가 있는 후포 갯벌을 지나 선운사에 이르는 일정이었다. 그 길에는 ‘화려한 삶’을 산 이 고장 사람 미당 서정주와 인촌 김성수의 자취가 있기도 했지만 눈길이 가지 않았고, 대신 고부에서 흥덕, 무장에 이르는 동학군 진격로를 따라 걷는 감회를 나누며 역사의 여여함을 작은 전율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순례길은 고리 핵발전소에서 출발해서 서울에 이르고, 다시 서울에서 출발해서 영광 핵발전소에 이르는 여정으로 이제 마무리단계다. 내년 초에는 영광에서 고리를 잇는 길을 계속 걸을 예정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호응이 적고 그러다보니 어떤 때는 순례단의 규모가 너무 단출해져서 민망한 느낌을 가지기도 한다. 지난 10월3일 광화문 이순신장군 동상 앞에서 서울에서 영광에 이르는 제2의 출범식을 할 때도 그리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는 않았다.

어떤 일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관심 정도가 그 일의 중요성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만드는 이 순례길에서 그 ‘세상사람’의 하나인 나는 가끔 절망감이나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길을 앞장서서 걷는 강원대 성원기 교수님이나 수원대 이원영 교수님의 열정 앞에서 그런 절망감은 순식간에 어떤 확신으로 변하곤 했다. 매 주말마다 함께하는 사람이 몇 명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묵묵히 그날의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그분들은 각자의 종교는 다르지만 마음은 모두 ‘탈핵 보살’의 그것이다. 그분들 외에 거의 살인적인 탈핵 강의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동국대 김익중 교수님 같은 탈핵 보살의 노고와 열정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분들의 노력에 동참해보고자 불교생명윤리협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불교 생명윤리의 관점에서 본 탈핵 문제’라는 주제발표를 했고, 그 논문을 통해 왜 탈핵문제가 우리 시대 불교 생명윤리의 핵심 쟁점 중 하나인지를 밝히고자 했다. 다행히 이런 내 주장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었지만, 그 탈핵의 염원을 실행으로 옮기는 순례길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그만큼 늘지는 않았다.

탈핵의 과제는 핵무기와 핵발전소 위협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두 가지 맥락을 지니고 있다. 한반도 평화의 출구는 북한과 미국, 중국의 핵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비핵화이고,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국제정치적 맥락과 국내정치적 맥락 사이의 변증법적 소통을 전제로 해서 해결이 가능하다. 그에 비해 핵발전소로부터의 탈출은 우리들 스스로의 결단과 실천만으로도 소기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좀 더 손쉬운 과제이다. 물론 우리들 스스로의 결단과 실천이 일상의 대부분을 전기에 의존하고 있는 21세기 한국인들의 고통스런 불편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보면 결코 쉽다고 말할 수 없는 국면도 있다.

그러나 그 ‘작은’ 불편함 때문에 이웃나라 후쿠시마의 공포와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협하는 거대한 방사능 우산을 더 이상 허용할 수는 없다. 이미 독일을 비롯한 유럽사회 대부분이 탈핵의 구체적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상황 속에서 여전히 “우리는 원자력이 안전하고 지속적이며 저렴한 에너지원을 제공한다고 믿는다”고 한․영 정상회담(6일)을 통해 되뇌는 국가지도자의 모습은 절망감을 안겨준다. 그 절망을 넘어서는 길은 바로 우리 안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직시하면서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실천뿐이다. 이른바 원전마피아가 우리 사회를 장악하고 있지만, 그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은 연기적 동체(緣起的 同體)임을 자각하면서 내 안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등불을 켜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지혜의 등불을 함께 켜들고 작은 발걸음이나마 한 걸음 내딛는 사람의 아름다운 시선을 마주하고 싶은 늦가을이다.

박병기/한국교원대 교수, 동양윤리교육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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